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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파스테르나크 『닥터 지바고』Ⅲ

by 답설재 2010. 1. 12.

B. 파스테르나크 『닥터 지바고』

김재경 옮김, 혜원출판사, 2007

 

 

 

 

 

 

 

 

 

 

<음반「닥터 지바고」의 표지 그림을 다시 보았습니다. 지바고와 라라, 지바고의 부인 토냐가 보입니다. 이 블로그에서 '라라의 테마'가 들려오게 하면 참 좋겠지만,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들리는 그 '라라의 테마'를 생각만 합니다.

 

큰 눈이 내린 이튿날인 1월 5일 아침에 안양과학대학을 찾아갔습니다. 그곳에서는 ‘초등 보직교사 직무연수’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새벽밥을 먹고 나섰지만 버스나 전철, 택시 어느 것 한 가지도 쉽지 않아서 안양역 앞 택시 승강장에 도착하자 이미 시작 시간이 지난 9시 20분이었습니다. 자칫하면 마치는 시각에 도착하겠다 싶었습니다.

 

“안양과학대학 가시는 분 계십니까?”

 

두 분의 여성이 대답해서 급조(急造)한 일행으로 함께 택시를 탔습니다. 그분들은 제 이름을 알고 있는 교사들로, 그 중 한분은 “교장선생님과 함께 근무해보지 못해 아쉬워하는 교사가 많다”고 해서 저를 기분 좋게 해주었고, 택시를 내려 눈길을 걸어 강의실로 걸어가며 이런 얘기도 했습니다.

 

“어제는요, 눈발 속을 걸으며 ‘라라’가 된 느낌이었어요.”

 

'라라'……, ‘닥터 지바고’의 여주인공 '라라'. 짐작으로는 현실적인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되고 싶은 여성이 많은 것 같습니다. 『닥터 지바고』에서 라라 이야기 몇 군데를 옮겼습니다.

 

 

<유리 지바고의 집안을 파탄으로 몰아간 그 변호사 코마로프스키와의 관계>

 

라라가 여학교 졸업 학년에 올라가기 전인 1906년 봄, 코마로프스키와의 6개월 동안 계속된 관계는 그녀의 인내를 뛰어넘어서 참을 수 없는 상황까지 되어버렸다. 그는 라라의 처참한 기분을 교활하게 이용하여 필요할 때면 언제나 그녀의 수치스러운 생활을 은근히 상기시켜주곤 했다. 이런 암시는 호색한(好色漢)이 여자에게 바라는 그런 혼란된 상태로 라라를 몰아갔다. 그 결과 라라는 육욕의 악몽으로 차츰 깊이 빠져들었고, 악몽에서 깨어날 때면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끼곤 했다. 밤의 어둠 속에서의 그녀의 광기는 그야말로 불가사의한 것이었다. 거기서는 모든 것이 전도(轉倒)되어 있었고, 모든 것이 논리를 벗어나 있었다. 지르는 듯한 고통은 은방울을 굴리는 듯한 웃음소리로 표현되고, 저항과 거절은 곧 동의를 의미하는가 하면, 그녀의 입술은 감사의 키스가 되어 박해자의 손등을 미친 듯이 더듬고 있었다.(85)

 

  <지바고와 라라의 재회>

 

지바고는 이전 멜류제예보에서 받은 인상과 똑같은 것을 다시 느끼게 되었다. ‘저 여자는 남성의 주의를 끌거나 예쁘게 보이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성의 본능을 깡그리 경멸하고 있었다. 마치 자기가 아름답기 때문에 자기를 벌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자신에 대한 반발은 오히려 그녀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주었다. 그녀가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다 잘되어가는 것 같았다. 마치 독서가 가장 고상한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짐승들도 할 수 있는 매우 단순한 일이며, 우물에서 물을 푸거나 감자 껍질을 벗기듯이 쉽게 책을 읽고 있었다.’

  이렇게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에 그는 마음이 편안하게 가라앉았다. 그 평온한 마음은 그의 영혼을 감싸 주었다. 이제 그는 이런저런 문제 때문에 줄달음치지 않았다. 라라의 존재가 신경질을 부리던 여직원에게 영향을 주었듯이 그의 신경에도 편안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에, 지바고는 혼자서 미소를 지었다.(318~319)

 

  <지바고의 그리움>

 

어려서부터 지바고는 숲속의 저녁놀을 좋아했다. 그 순간에는 마치 그 빛의 기둥에 자신도 몸뚱이가 꿰뚫려 있는 것만 같았다. 마치 산 성령의 선물이 가슴 가득히 흘러들어와 한 쌍의 날개처럼 두 어깨를 뚫고 나오는 듯했다. 청년 시절의 원형(原型), 누구에게나 한평생 계속되어 형성되며, 그런 뒤에는 한 인간에게 있어서 영원히 그 내면적인 얼굴, 그 개성으로 구실을 하며 그렇게 여겨지는 원형이 갑자기 그 원초의 힘을 가지고 그의 내부에 되살아났다. 그리하여 자연과 숲과 저녁놀과 눈에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로 근원적이며 여인처럼 만물을 감싸는 형태로 변모해갔다. 그는 눈을 감고 “라라!” 하고 속삭였다. 자기의 전 인생을 향해, 신의 대지 전부를 향해, 햇빛을 받으며 그의 앞에 펼쳐진 공간의 모든 것을 향해 불렀다.(374~375)

 

  <라라의 편지>

 

하느님,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당신이 살아 계시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근처에서 당신을 보았다는 사람이 나한테 달려와서 알려주었어요. 당신이 우선 바르이키노에 가시리라고 생각해서 전 카텐카와 함께 그리로 떠납니다. 하지만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열쇠를 여기에 넣어둡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는 아무 데도 가지 마시고 여기서 기다려주어요. 당신은 모르시겠지만 저는 지금 길가에 있는 방에서 살고 있어요. 물론 들어가 보시면 알게 되시겠지요. 먹을 것을 좀 놔두고 갑니다. 삶은 감자뿐이에요. 쥐가 모여들 테니 내가 늘 하던 것처럼 다리미 따위를 냄비 뚜껑 위에 얹어 놓아두세요. 너무 기뻐서 미칠 것만 같아요.(413)

 

  <라라의 회한에 대한 지바고의 생각>

 

"(...) 얘기가 좀 벗어난 것 같군. 하여튼 당신이 슬픔과 회한 같은 걸 가지지 않았더라면 나는 당신을 이토록 사랑하지 않았을 거요. 나는 한 번도 발을 헛디디거나 낙오하거나 잘못을 하지 않는 사람을 좋아하지는 않아요. 그런 사람의 미덕이란 생명이 없는 것이며, 따라서 가치도 없는 것이니까. 그런 사람은 인생의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어요.”

“바로 그 인생의 아름다움 말인데요. 그것을 알게 되면 상상력에 때가 묻지 않은 어린애 같은 순결이 필요해요. 그런데 나는 그것을 잃었어요. 인생의 첫걸음에서 내 마음이 비열하게 타인의 낙인이 찍히지만 않았더라도 나는 좀 더 다른 눈으로 인생을 볼 수 있었을 거예요. 그뿐만이 아니에요. 인생의 시발점에서 부도덕한 자기 쾌락 탓으로, 그 후 나를 꽤나 사랑하고 나도 역시 사랑했던 좋은 사람과의 평범한 결혼 생활마저 파탄에 이른 거예요.”

“잠깐만, 당신 남편 얘기는 뒤로 미루기로 합시다. 나는 자기와 대등한 자에게보다는 훨씬 저열한 자에게 질투를 느낀다고 하지 않았소? 나는 당신 남편에겐 질투를 느끼지 않아요. 하지만 ‘그 사람’은?”

“‘그 사람’이라뇨?”

“당신의 인생을 망쳐버린 사람 말이오. 대체 어떤 인물이오?”

“저 유명한 모스크바의 변호사예요. 우리 아버지 친구였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우린 생계에 곤란을 받았어요. 그때 그 사람이 어머니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주었어요. 독신 생활을 하는 돈 많은 사람이었으니까. 내가 너무 나쁘게 말하는 바람에 오히려 당신한테는 흥미있는 인물로 생각되는가 보군요. 사실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인간이에요. 이름을 밝힐까요?”(432~433)

 

  <지바고가 본 라라의 모습>

 

밤늦게 지치고 허기져서 집으로 돌아오면, 라라는 식사 준비며 세탁 등 살림에 골몰하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흩어지고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치맛자락을 허리춤에 낀 라라의 소박하고 평범한 모습은 숨 막힐 듯 매력적이었다. 설사 그녀가 가슴이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고, 키가 날씬해 보이도록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폭이 넓은 화려한 치맛자락을 흔들며 무도회에 나가는 모습일지라도 그는 이토록 매료되지는 못했을 것이다.(440)

 

  <라라에 대한 지바고의 첫인상>

 

“(...) 나의 은밀한 천사인 당신이 전쟁과 동란의 하늘 밑에서 내 인생의 종막에 나와 함께 있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오. 왜냐하면 당신은 내가 아직 어렸을 때, 평화로운 하늘 아래서 내 인생의 시발점에 나와 함께 있었으니까. 당신은 그날 밤 커피색 제복을 입은 여학교 졸업반 학생이 호텔 방의 반쯤 그늘진 어둠 속에 있었지. 지금도 당신은 그때와 조금도 변한 데가 없소. 지금처럼 그때도 놀랍게도 아름다웠어. 그때 당신이 나한테 던진 그 매혹적인 빛깔, 그 어둑어둑한 빛과 사라져가는 소리가 후에 나의 전 존재에 배어들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이해하는 열쇠가 되었어. 나는 이따금 그 마법의 힘을 알아내려고 고민해 왔었지. 여학교 제복을 입은 당신이 방안의 어둠 속에서 그림자처럼 솟아올랐을 때, 소년인 나는 당신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었으면서도 왠지 당신에게 자꾸 끌려들어가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았어. 그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고, 이 연약하고 가냘픈 몸매의 소녀가 이 세상에서 생각할 수 있는 여자다운 모든 점을 전기처럼 극한까지 내포하고 있음을 깨달았지. 만약에 다가가서 대는 순간에 눈부신 불꽃이 일어나 방안을 대낮처럼 밝히고, 나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거나 한평생 억제할 수 없는 연모와 애수의 자력에 걸려들고 말리라 생각했어. 나는 쏟아지는 눈물을 억제하지 못하고 가슴에 뜨거운 것을 느끼며 울었어요. 그리고 나는 이렇게 묻기도 했소─여성을 사랑하고 여성의 전파를 흡수하는 것이 이토록 괴로운 것이라면 그 전파를 발하여 사랑에 눈뜨게 하는 자신은 백 배 더 괴로울 게 아닌가, 그래 드디어 고백하고 말았어. 미칠 것만 같았어. 그건 어찌할 도리가 없었어.”(461)

 

  <행복한 순간>

 

한참 일을 하다가 두 사람의 손이 우연히 맞닿는 일이 있었다. 그러면 머릿속에서 여러 생각이 하나도 남지 않고 빠져나가 버리고 서로에게 다정한 마음이 맹렬히 다가오는 것을 막지 못해 힘이 빠지고 현기증이 나서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아야만 했다. 그런 순간이 흐르다 보면 어느덧 날이 저물기도 했는데, 그러면 그들은 정신을 번쩍 차리고 너무 오랫동안 카텐카를 돌보지 않았거나 말에게 먹이나 물을 주지 않았음을 깨닫고 놀라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게을리한 일을 뒤늦게나마 하려고 허둥지둥 서둘렀다.(474)

 

  <다시 라라에 대한 지바고의 그리움>

 

이따금 지바고는 글을 쓰다가도 문득 라라를 눈앞에 그리며 그리움에 몸부림쳤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세상을 뜬 후 여름에 콜로그리보프 정원의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서 어머니 음성이 들리는 듯했듯이 이제는 라라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고, 그것이 삶의 일부이기를 원한 터라 청각이 그를 희롱해 옆방에서 라라가 ‘유로츠카!’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489)

 

지바고가 글을 쓰다가 눈 덮인 들판을 내다보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행복감과 불안감이 교차합니다. 소설가들은, 사랑은, 영원하지 않은 것으로만 그립니다. 그게 사실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날 저녁에 빨래하고 남은 더운물로 모두 목욕을 했다. 라라는 카텐카를 씻어주었다. 지바고는 몸이 가뿐하여 날아갈 듯한 기분으로 창가의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등 뒤의 방에서는 목욕수건으로 몸을 두르고 비누 향기를 풍기며 라라가 다른 수건으로는 머리를 모자처럼 감싼 채 카텐카의 잠자리를 봐주고 있었다. 지바고는 정신을 집중하는 작업의 맛을 미리 즐기면서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행복하고 세밀한 주의력을 가지고 둘러보았다.

밤 한 시였다. 그때까지 자는 척하고 있던 라라도 잠이 들어 버렸다. 그녀와 카텐카의 속옷이며 침대의 시트 등이 새하얗게 보였다. 라라는 그 무렵에도 용케 빨래에 풀을 먹였다.

지바고는 감미롭게 정적을 호흡하면서 안일하고 완전한 행복에 휩싸였다. 등잔 불빛이 흰 종이를 부드럽게 비추고 잉크 표면이 황금빛으로 비쳤다. 창밖에는 차가운 겨울밤이 창백할 정도로 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그는 밖을 더 잘 내다보려고 캄캄한 옆방으로 가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보름달빛이 눈 덮인 끝없는 설원을 달걀흰자나 흰 그림물감처럼 끈끈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겨울밤의 눈부신 아름다움은 더할 데가 없었다. 지바고의 마음은 평화로웠다. 그는 다시 따뜻하고 환한 불이 밝혀진 방으로 되돌아가 다시 펜을 잡았다.(470~471)

 

그는 다시 밖을 내다보려고 캄캄한 옆방으로 갔다. 그러나 글을 쓰고 있는 동안 유리창에 온통 성에가 얼어붙어 밖이 잘 보이지를 않았다. 지바고는 현관 문틈의 바람을 막으려고 가려놓은 양탄자를 치우고 외투를 걸치고 현관으로 나갔다.

그림자 하나 없는 눈 덮인 벌판에 흰 달빛이 눈부시게 반사하고 있어서 처음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뱃속에서 끓어오르듯 긴 포효가 멀리서 들리더니, 골짜기 저 쪽 들판에 연필로 짧게 그은 선 정도의 조그만 네 개의 그림자가 희미하게 떠올랐다.

늑대들이 한 줄로 서서 머리를 들고 집 쪽을 쳐다보며 달이나 창문에 비친 은빛 달의 영상을 보고 울부짖고 있었다.(472)

 

거실에서 내다보는 눈, 안전이 확보된 시·공간에서의 낭만적 눈길 말고, 육체적·정신적 굴욕과 회한, 전쟁과 혹정(酷政), 추위와 굶주림, 희망과 좌절, 끊임없는 고난과 고통의 연속, 기약 없는 이별, 그리고 영원한 헤어짐 같은 것들을 다 겪게 된다 해도 좋다면, 그러면 ‘라라’, 그녀의 미모와 재능, 사랑, 운명을 받아들여도 좋을 것입니다. 한번쯤 '라라'가 되어도 좋을 것입니다.

 

눈이 내릴 때만 '라라'가 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생각만으로는 나도 저 '지바고'가 되어보고 싶은 때가 더러 있기는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