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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메리 로취 『스티프 STIFF』

by 답설재 2010. 1. 29.

메리 로취 『죽음 이후의 삶, 스티프 STIFF』

권루시안 옮김, 파라북스, 2004

 

 

 

 

 

 

 

 

스티프(STIFF)란 '딱딱한' 상태, 즉 사후 경직이 일어났다는 의미로 시체를 가리킨다. 그렇게 시체가 되어 누워 있을 때 우리의 영혼은 어디에 있을까?

메리 로취는 영혼은 안중에도 없고, 다만 그 시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인상적으로, 혹은 과학적으로 표현했다.

 

죽어 있다는 건 배에 타고 있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은 듯하다.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 지내고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또 살이 물러지고 새로운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달리 할일도 없다.(9)

 

메리 로취는 이처럼 가벼운 듯 깊이 있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별 것 아니라는 듯 그러나 심각하게, 철저히 과학적이면서도 나와 마주앉아 얘기하듯 죽음 이후에 사체(死體)가 가는 길에 대해 가르쳐주었다.

그러한 관점에 대해 우선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뮈터박물관의 전시품이 되거나 의과대학 교실의 골격표본이 되는 것은, 세상을 떠난 다음 공원벤치 하나를 기증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좋은 일이기도 하고 약간의 불멸성도 얻는 것이다. 이 책은 사체들이 해온 일에 대한 것으로, 기괴하고(간혹) 충격적이며(종종) 흥미롭다(언제나).

바닥에 등을 붙이고 누워 있기만 하는 게 잘못됐다는 말은 아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그렇게 썩어가는 것도 나름대로 흥미롭다. 단지 사체가 된 다음 해볼 만한 일이 그것 말고도 많다는 말이다. 과학에 참여하거나 예술적인 전시품이 될 수 있다. 혹은 나무의 일부분이 될 수도 있다. 이외에도 몇 가지 가능성이 더 있다.

죽음, 꼭 지루해야할 필요는 없다.(11)

 

죽음에 이르러 만약 자신의 시체를 연구용으로 기증하면 어떻게 되나? 머리 부분에 대한 예로, 죽은 자를 상대로 하는 수술 연습 준비 장면이다.

 

인간의 머리는 통구이용 닭과 크기나 무게가 비슷하다. 물론 이제까지 나는 한 번도 이런 식으로 비교해본 적은 없었다. 전에는 머리가 오븐용 쟁반에 놓인 것을 존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 애완동물용 자그마한 밥그릇 같은 용기 하나에 하나씩, 모두 40개의 머리가 얼굴이 천장을 향하도록 놓여 있다. 이 머리들은 성형외과의들의 연습용이다. 머리 하나당 두 사람씩이다. 나는 안면해부학 및 안면성형 보습과정을 참관하고 있다. 남부의 어느 대학교 의료원이 후원하고, 미국에서 가장 인정받는 안면 성형외과 의사 6명의 지도에 따라 이루어지는 과정이다.(19)

 

'죽음 이후의 새로운 삶'이라니, 제목 『스티프 STIFF』는 어떤가? '시체에 대한 과학적인 이야기'라는 전제는?

걱정할 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무진장 쉽고, 어쨌든 참 재미있을 뿐이다.

가령, 서부영화에서 총소리만 나도 픽픽 쓰러져 죽는 수많은 조역들과 비 오듯 하는 총알을 맞아 놓고도 하고 싶은 짓 다하고 죽던 그 주인공 존 웨인을 내심으로는 좋아하면서도 "순 엉터리잖아!" 하던 우리의 그 평가가 바로 엉터리였다는 것도 다음과 같이 설명해주었다.

 

총격을 당했지만 맞지는 않았을 때, 혹은 맞아도 총알이 피부를 스쳐지나가 그냥 몹시 아프기만 할 때에도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지는 사람들도 있다. 맥퍼슨이 내게 말했다.

"내가 아는 어느 경찰이 어떤 사람에게 총을 쐈어요. 그랬더니 그 자가 그 자리에서 완전히 철퍼덕 얼굴을 땅에 박고 쓰러진 겁니다. 그래서 그 경찰은 이렇게 생각했죠. '아이쿠, 규정대로 몸통을 쏜다는 게 머리를 맞췄나 보다. 사격장에 가서 연습을 좀 더 해야겠어.' 그러고는 그 자에게 다가갔답니다. 그런데 총에 맞은 흔적이 없는 겁니다. 중앙 신경계에 맞지 않았을 때 무슨 반응이 재빠르게 나타난다면 그건 순전히 심리적인 거란 말이죠."

리가드 시대의 육군이 모로족과 싸울 때 겪은 어려움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소총이 어떤 효과를 내는지 잘 몰랐을 것이고, 그래서 계속 모로족다운 행동을 하다가 출혈로 인해 의식을 잃어 더 이상 그렇게 할 수 없게 됐을 것이다.

때로는 순간적으로 고통에 둔감해지는 이유가 단지 총알의 효과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악의나 굳은 결의 때문일 수도 있다. 맥퍼슨은 말했다.

"고통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자랑으로 여기는 친구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총알 구멍이 아주 많이 나야 쓰러지죠. 로스앤젤레스 경찰서에 아는 형사가 하나 있는데, 그는 357매그넘으로 심장을 관통당하고도 쓰러지기 전에 자기를 쏜 놈을 죽였지요."(155~156)

 

해마다 묘지로 잠식당하는 땅의 넓이가 여의도의 반이 넘는다거나 아직도 매장 문화를 고집하는 건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얘기는 실없는 것이다. 각자가 판단할 일이기 때문이다.

매장이 좋을까, 화장이 좋을까?

아직 생각해본 적이 없다면, 아직 심각하지 않은 연령이라면 어쨌든 행복한 경우일 것이다.

나는 막연하게 매장을 생각해오다가 몇 년 전에 화장을 선택했고, 천안 목천의 공동묘지에 여러 명의 유골을 넣을 수 있는 묘지를 준비해 두었는데, 지금은 다시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생각이 자꾸 변한다.

어쨌든 아무래도 매장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신체의 부패(매장)에 대해 이보다 더 자세하고, 친절할 수는 없을 것 같은 메리 로취의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한번 읽어봐도 그 생각이 변함없을지 의심스럽다.

 

"이 과정이 진행되면 사체에서 피부가 커다란 덩어리로 떨어져 나오는 걸 볼 수 있죠."

아파드는 설명을 계속한다. 그러고는 남방자락을 들쳐 올려 실제로 커다란 피부 덩어리가 떨어져 나왔는지를 본다. 그런 부분은 보이지 않는다.

뭔가 다른 상황이 진행되고 있다. 남자의 배꼽에 꿈틀거리는 쌀알이 잔뜩 고여 있다. 거기는 쌀알들의 중앙 공연무대 같다. 그러나 이건 쌀알일 수가 없다. 파리 유충들이다. 곤충학자들이 파리 유충에게 따로 붙인 이름이 있지만, 추하기도 하고 모욕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구더기’라는 용어는 쓰지 않기로 하자. 대신 예쁜 이름을 쓰기로 하자. '하시엔다hacienda'라 하면 어떨까.

아파드는 파리가 신체의 입구 즉 눈이나 입 혹은 아물지 않은 상처, 성기 등에다 알을 낳는다고 설명한다. 좀더 자라 더 커진 하시엔다들과는 달리 작은 것들은 피부를 뚫고 먹어 들어가지 못한다. 나는 아파드에게 작은 하시엔다들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를 묻는 실수를 저지른다. 아파드는 시체의 왼발 쪽으로 돌아간다. 발은 창백하고 피부는 투명하다.

"피부 밑이─하시엔다들이─보이지요? 피하지방을 먹고 있는 겁니다. 지방을 좋아하거든요."(73)

 

동영상을 보는 것보다 더 실감 나는 설명이다.

그래도 매장에 대한 그 결심에 변함이 없거나 미련을 가질 수밖에 없다면 조금만 더 읽어보면 좋겠다.

 

우리는 분해되고 남은 커다란 유방의 피부가 유목민들의 텅 빈 물자루처럼 납작해져 가슴 위에 얹혀 있는 여자 곁을 지나친다. 론은 여전히 신발만 내려다보고 있다.

아파드는 박테리아가 가장 많은 복부의 팽창현상이 가장 두드러져 보인다고 설명한다. 그렇지만 박테리아가 많이 모이는 다른 부분에서도 팽창은 일어난다. 대표적인 곳은 입과 성기이다.

"남자일 경우 음경과 특히 고환이 대단히 커집니다."

"얼마나 큰데요?"(용서를 바란다)

"글쎄요. 아주요."

"멜론 크기요, 수박 크기요?"

"그렇다면 멜론 크기죠."

아파드 바스는 인내심의 끝이 없는 사람이지만 지금 우리가 그 바닥을 긁고 있다.

아파드는 설명을 계속한다. 박테리아가 만든 가스로 인해 입술과 혀가 팽창하는데, 종종 혀가 입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부풀기도 한다. 만화에서 보던 게 실제로도 있는 것이다. 눈은 팽창하지 않는다. 벌써 오래 전에 액체가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없어진 것이다. ×표가 된다. 만화에서 보던 게 실제로도 있는 것이다.

아파드는 발걸음을 멈추고 내려다본다.

"저게 팽창입니다."

우리 앞에는 몸통이 엄청나게 부푼 남자가 있다. 몸통의 둘레가 사람이라기보다는 가축 쪽에 더 가깝다. 사타구니 부분은 어떤 상황인지 알아보기가 어렵다. 벌레가 마치 옷처럼 모여 있기 때문이다. 그와 비슷하게 얼굴도 잘 알아볼 수가 없다. 이곳에 있는 유충들은 언덕 아래에 있는 동족들보다 나이가 2주 더 많고 훨씬 더 크다. 앞에서는 쌀알 같았지만 여기서는 밥알 같다. 사는 것도 밥알 같아서, 서로 꼭 들러붙어 축축한 덩어리를 이루고 있다.

유충들이 우글거리는 시체에 한두 뼘 거리 이내로 머리를 들이밀면(정말이지 이렇게 해보지 말기를 권한다) 유충들이 먹이를 먹는 소리가 들린다. 아파드는 정확히 어떤 소리인지 알려준다.

"뻥튀기 먹는 소리죠."(75~77)

 

메리 로취는 시체 처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제하고 매장이나 화장이 아닌 다른 방법을 제안(?)하기도 한다.

 

우리 인간의 죽음은 …(몇 자 생략)… 시체를 처리하는 과정이 수십 세기를 내려오면서 추모와 작별의 예식 속에 편입되어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하관식에 조문객들이 함께 했고, (비교적 최근에는) 리모컨으로 작동되는 운반장치에 얹힌 관이 조문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장로 안으로 천천히 밀려들어가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영결식이 시신 처리과정과 분리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화장은 조문객이 보지 않는 가운데 진행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자유로이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해볼 수 있게 된 걸까?(284)

 

먼저 결과적으로는 화장과 유사하게 한 무더기의 뼈만 남기는 '수분 환원'이란 방법이고, 그 다음은 퇴비로 이용되는 방법이다.

 

케이와 웨버가 개발한 장비는 시신 1구의 조직을 분해하여 원래 무게의 2~3퍼센트 정도로 만들 수 있다. 콜라겐이 빠져나간 뼈만 한 무더기 남는데, 이 뼈는 손가락으로도 쉽게 부스러진다. 그 나머지는 모두 WR²의 홍보책자에서 '커피색'이라고 표현한 무균질 액체로 바뀐다.

조직분해는 두 가지 핵심성분에 의존하는데, 바로 물과 또 흔히 잿물이라 부르는 알칼리이다. 잿물을 물에 풀면 물의 수소이온이 떨어져 나오고, 살아 있는 유기체를 구성하는 단백질과 지방을 분해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 바로 이 때문에 '수분환원'이라는 용어는 확실히 완곡한 표현이긴 해도 적절한 것이다.(285)

우리는 마음의 준비가 됐건 말건 오늘날의 인간퇴비 운동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스웨덴 예테보리의 서쪽에 있는 뤼뢴이라는 조그만 섬에 가보아야 한다. …(중략)… 그는 액화질소가 들어 있는 통에 담겨 냉동된 뒤 두 번째 방으로 들어간다. 여기서는 부서지기 쉬운 상태가 된 그의 신체를 초음파나 기계적인 진동을 이용하여 잘게 부순다. 갈아놓은 쇠고기만한 조각들로 부서진다. 아직 냉동상태인 이 조각들은 냉동건조 과정을 거쳐, 교회의 추모공원이나 자기 집 마당에 심은 기념수의 퇴비로 이용된다.(296~298)

 

메리 로취는 이러한 방법들의 일반화를 막는 장애요인은 거의 없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알고보면 죽은 사람(시체)으로서는 화장이나 '수분환원'은 결과적으로는 별로 다르지 않고, 유럽의 일부 지역에서는 환경보전주의가 그 자체로 종교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메리 로취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은 사실은 가치관 문제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녀는 삽으로 퍼올린 퇴비에 대해 이야기를 계속한다.

"퇴비를 지저분하게 생각해서는 안 되죠. 사랑스러워해야 해요. 낭만적이어야 하고요." 그녀는 시체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생각한다. "죽음은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죠. 신체가 뭔가 다른 걸로 바뀌죠. 나는 그 다른 걸 최대한 긍정적인 걸로 만들고 싶어요."

사람들은 그녀가 죽은 자들을 정원폐기물 수준으로 낮췄다고 비난해왔다고 한다. 그녀는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다.

"내 말은 정원폐기물을 인체 수준으로 높이자는 거죠."(299)

 

그녀는 '가족들이 심은 나무가 망자의 세포를 흡수하면 살아 있는 기념물이 된다는 구상'은, "과학적인 관점에서 부활에 가장 근접한 것"이라는 인간퇴비운동 학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최근 우리나라에서 시행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수목장'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또 70% 이상이 화장에 의존하던 스웨덴에서 최근에는 젊은이들이 공해를 유발한다는 이유로 화장을 멀리하기 시작했으며, 2002년의 어느 신문 여론조사에서는 40%의 응답자가 냉동건조되어 나무의 거름이 되고 싶다고 대답했다고 했다. "시신을 태우면 흙으로 돌려보내지 못하는 거죠.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만들어졌고, 그래서 자연에게 돌려줘야 합니다."(311)

 

결론이 될 만한 부분이다.

 

품위는 어느 정도 포장에 달려 있다. 근본으로 깊이 내려가면 품위 있게 마지막을 장식하는 방법이란 없다. 그게 부패든 소각이든 해부든 조직분해든 퇴비이든 마찬가지이다. 이들 모두 궁극적으로 조금씩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있다. 잘 포장된 완곡한 표현을 세심하게 적용시켜야만―매장, 화장, 해부학 기증, 수분환원, 생태학적 장례식 등과 같이―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으로 올라온다.

 

그렇겠다. 죽었고 시체인데 품위가 있으면 얼마나 있겠는가. 더구나 살아 있는 사람이 부여해주지 않는다면 하등의 품위를 스스로 찾을 길은 없지 않은가?

 

"죽어 있다는 건 배에 타고 있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은 듯하다.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 지내고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또 살이 물러지고 새로운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달리 할 일도 없다."(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