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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세계화시대의 한국어

by 답설재 2010. 1. 4.

신문을 보면 대학에서는 영어로 강의하라는 요청이 강한 것으로 들립니다. 국제화시대여서 그 요청이 그럴듯하지만, 가령 국문학과 같으면 난처할 것입니다.

 

대학과는 별 관계가 없어서 깊이 생각한 적은 없지만, 지난해의『현대문학』에는「세계화시대의 한국어와 한국문학」이란 주제로 연간 여러 가지 글이 연재되었고, 12월호에는「언어, 욕망, 그리고 아름다움에의 의지」라는 글이 실렸습니다.

웬만한 책은 보관하지 않기로 했고, 그 글을 다 옮길 수도 없으므로 언제 봐도 그 글의 내용을 기억할 만큼, 충분히 옮겨두기로 했습니다.

 

 

언어, 욕망, 그리고 아름다움에의 의지1

 

실질가치 제로를 지향해야 할 교환도구는 반전의 마술을 연출한다. 일단 화폐가 그러하다. 잘 알려져 있듯 오래전에는 쌀, 소금, 옷감 등 사용가치를 지닌 것들이 교환도구로 사용되었다. 아주 많은 것들이 교환도구의 역할을 할 수 있었으나, 어떤 것도 그러한 도구성이 유일한 존재이유는 아니었다. 이후 교환의 범위가 확대되고 과정이 복잡해짐에 따라, 금속이나 종이가 교환용 도구로써 따로 ‘독립’하게 된다. 먹을 수도 입을 수도 없고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아서, 교환을 위해서밖에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텅 비어 있음으로 인해 화폐는 전지전능해진다. 실질을 완벽하게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실질을 무제한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 앞에 펼쳐주고, 그럼으로써 역설적으로 욕망의 대상이 된다. 페티시가 될 수 없다는 조건이 거꾸로 강력한 페티시즘을 불러일으킨다.2 게오르그 짐멜은 이를 “화폐가 정신화되는 과정”이라 규정했다. 마르크스는 화폐 페티시즘에 사로잡힌 수전노를 “금이라는 물신을 위해 자신의 육체적 쾌락을 희생”하는 신앙인에 비유했다.

 

언어를 생각의 교환도구로 인식할 때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는 듯하다. 시인 조지훈은 “시에서 언어란 결국 매매에서 화폐의 가치에 불과한 것”이라는 말로 언어와 화폐의 도구성을 같은 층위에 둔 바 있다. 그러나 둘 사이의 유사성은 실제로 좀 더 깊은 데까지 파고든다. 오래전의 물품화폐가 그러했던 것처럼, 언어에 도구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점이 곧바로 언어를 도구로 ‘규정’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교환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특별히 강조되는 자리에서 비로소 ‘언어는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다.’라는 정의가 가능해진다. 이와 함께 화폐의 마술은 언어에서도 나타난다. 화폐의 도구성이 나에게 무제약적인 구매 가능성을 제공해주길 바라는 것처럼, 언어의 도구성이 나에게 무제약적인 권리와 기회를 부여해주기를 바란다. 화폐가 미국 대통령과 나를 차별하지 않는 것처럼, 언어도 미국 대통령과 나를 차별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렇게 우리의 욕망은 ‘지리와 민족과 계급을 초월하여 두루 통용 가능할 것 같은’ 언어, 도구적 가치가 유달리 높다고 생각되는 특정언어를 향해 집중된다.

 

순수형식으로서의 교환도구라는 것을 머릿속에 떠올리거나 창안해내는 일은, 표면적으로는 자유와 평등을 향한 꿈에 맞물려 있다. 그러나 평등하고 자유로운 교환에 대한 꿈은 실제로 ‘상승’이라는 방향성이 전제될 때에만 유효해진다. ‘자유, 평등, 우애’라는 프랑스 부르주아지의 혁명 모토가 귀족을 향해서만 역설되었을 뿐 노동자를 향해서는 적용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평등한 교환을 향한 언어적 꿈의 이면에서는 특정언어를 향한 페티시즘이 나타난다. 생각의 교환도구는 상징자본이 된다. 뒤집어서 말하자면, 언어 페티시즘이 자라는 것을 허용할 수 있는 한에서만 자유와 평등을 향한 언어적 꿈은 지속될 수 있다. 이는 페티시즘에 접속되지 못한 에스페란토3가 끝내 ‘세계어’로서 실현되지 못한 이치이기도 할 것이다.(232~233, ‘언어와 화폐, 혹은 교환도구의 마술’ 중에서)

 

세상의 언어들은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교환’이 중요할 때마다 현격히 그래왔고, 더구나 지금은 세상 자체가 ‘교환’에 의해 움직인다. 이대로의 속도라면 21세기가 지나기 전에 언어의 절반 정도가 사라진다고 한다.(235, 3. ‘언어의 자연사自然史’ 중에서)

 

‘놀고 즐기는 공간’의 언어들이 놀랍도록 현란하고 강한 파토스를 생산해내고 있는 반면, 과학기술과 비즈니스 영역을 비롯한 사회 피라미드의 정점에서는 ‘이미’ 영어로의 소통이 요구되고 있으며, 그 요구는 점점 피라미드의 아래쪽을 향해 내려오고 있는 중이다. 아카데미에서 중등교육으로, 중등교육에서 초등교육으로, 크고 강한 언어에 대한 욕망은 점점 더 제도적으로 승인되어간다. 영어라는 자본을 축적하여 나의 미래와 아이들의 미래를 사고 싶어하는 바람은 그에 맞물려 더욱 강해지고 있다.(235, 3. ‘언어의 자연사自然史’ 중에서)

 

욕망에 대한 질문과 추궁은 좀 더 지속되어야 할 것 같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그대로 신뢰해도 괜찮은 것인가. 아니면 욕망의 제어를 통해 인간다움이라는 것을 좀 더 유지할 수 있는 것인가.(236, 3. ‘언어의 자연사自然史’ 중에서)

 

‘하나의 한국어’라는 열망에 대해서도 비슷한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영어라는 큰 언어에 대한 선망의 다른 편에, 한국인을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고 그 묶음의 소통 가능성을 최대치로 높여줄 ‘하나의 언어’가 지향된다. 그러한 자장 속에서 한국어가 비교적 ‘안전한 언어’의 위치에 올랐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덕에 나 역시 안락한 언어적 환경의 수혜를 받아왔다. 오롯이 한국표준어로 말을 하고 글을 쓰는 환경 속에서 자라나 충분한 교육을 받고 충분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안정적인 표준어에 대한 지향이 불온하거나 경박한 에너지를 차단해버릴 만큼 강해질 때, 그래서 정말로 우리에게 ‘하나의 한국어’ 같은 것만이 남게 될 때, 말해지고 쓰이는 모든 것들이 모두에 의해 이해받을 수 있다고 상상될 때, 그 안락함이란 죽음의 다른 이름인 것이 아닐까. 그때 바야흐로 한국어의 괴사壞死가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238, 4. 스노우크래쉬4 중에서)

 

언어가 인간에 기생함으로써만 살 수 있는 것과 같은 정도로, 인간 역시 언어의 기생을 허용함으로써만 인간일 수 있다. 프로이트적 죽음 충동에 연루된 언어의 종적種的 단순화가 언어의 괴사로 이어진다면, 안으로부터 썩어가는 그 과정의 ‘추함’에서 인간도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239, 5. ‘아름다움에의 의지’ 중에서)

 

희귀언어-바이러스가 계속 지구상에 존재하기를 진심으로 원한다면, 원하는 자 스스로 그 희귀 바이러스의 숙주를 자처하거나, 자신의 언어를 자발적으로 변종 바이러스로 만들어내는 용기를 갖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욕망은 대체로 의지보다 강하다. 욕망의 흐름은 언어들의 생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어쩌면 욕망의 역사가 결국 인간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욕망이 우리를 아름답게 하지는 않는 듯하다. 욕망은 쾌적함을 지향하고, 쾌적함에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무뎌지고, 둔해지고, 모르는 사이에 탐욕스러워진다. 그렇기에 벽이 없다는 안락함 속에서 평화로운 이들보다는 벽의 단단함을 절감하며 힘겨움을 견디는 이들이 좀 더 아름답다. 크고 강한 언어 속에서 당당하고 자신만만한 이들보다 작은 언어의 박복함을 짊어진 이들이 좀 더 아름답다. 한 언어의 안온함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보다 몇 개의 언어 사이를 오가야 하는 강제적인 운명을 떠안은 사람들이 좀 더 아름답다. 언어의 소통가능성을 맹신하는 이들보다 그 맹신이 초래하는 소외와 배제를 민감하게 지각하는 이들이 좀 더 아름답다. 이런 아름다움들로써 언어의 괴사는 얼마간 유예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아름다움으로써 인간의 언어는 결핍을 해소하고 죽음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대신, 결핍을 끌어안고 삶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이다.

남의 언어를 보존하려는 대신, 내 언어의 경쟁력을 높이려는 대신, 안락함으로 투항하려는 내 언어의 타나토스적 욕망을 거스르는 것. 더불어 내 언어의 세계에 포획될 수 없는 외부성을, 나에게 부재하는 방식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어떤 것을, 그 자체로 힘겹게 존중하는 것. 나는 그것을 ‘아름다움에의 의지’라고 명명하고 싶다. 그리고 그것이 문학에 맡겨진 언어적 소명일 거라 믿는다. 문학으로 세계의 중심에 들어서려는 것이 아니라면, 문학으로 민족적 결속력을 다지려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239~240, 5. ‘아름다움에의 의지’ 중에서)

 

 

원고(原稿)의 약 1/2을 옮겼지만, 이 글의 결론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판단은 다른 글도 충분히 읽어봐야 가능할 일이기도 하지만, 이 글의 논지만으로도 동의를 나타내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가령 이러한 의문들이 있습니다.

“벽의 단단함을 절감하며 힘겨움을 견디는 이들이 좀 더 아름답다”는 것은, 누가 어떤 관점에서 아름답다고 하는 것일까.

“작은 언어의 박복함을 짊어진 이들이 좀 더 아름답다”는 것은, 누가 어떤 관점에서 아름답다고 하는 것일까.

“몇 개의 언어 사이를 오가야 하는 강제적인 운명을 떠안은 사람들이 좀 더 아름답다”는 것은, 누가 어떤 관점에서 아름답다고 하는 것일까.

언어의 소통가능성에 대한 “맹신이 초래하는 소외와 배제를 민감하게 지각하는 이들이 좀 더 아름답다”는 것은, 누가 어떤 관점에서 아름답다고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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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아프리카의 오지 마을을 다녀온 사람? 오지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그 쪽이 지니는 가치인가, 아름다움을 느끼는 쪽이 지니는 가치인가. 어느 쪽에서 느끼는 아름다움을 말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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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해욱,「언어, 욕망, 그리고 아름다움에의 의지」『現代文學』2009년 12월호, 230~240쪽(연중기획 특집-세계화시대의 한국어와 한국문학). 신해욱은 1974년 춘천 출생, 고려대 국문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1998년에『세계일보』 등단으로 시집『간결한 배치』『생물성』이 있음.


2. 페티시즘 (심리학) [fetishism] 배물애(拜物愛), 여성물건애(女性物件愛)라고도 함. 심리학에서 생명이 없는 물건 또는 성적 부위가 아닌 인체 부위에 접촉함으로써 성적 감정을 느끼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성적 도착증의 일종. 페티시즘이라는 용어는 원래 인류학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페티시'(fetish:또는 fetich)라는 말은 마술적이고 영적인 힘을 지닌 것으로 생각하여 목걸이나 팔찌에 달고 다녔던 장식품인 참(charm)을 가리키는 말이다. 프로이트는 그의 저서 〈성 이론에 대한 3가지 의견 Three Contributions to the Theory of Sex〉에서, 페티시즘 환자가 성적 만족을 얻는 대상은 '미개인들이 그런 물건에서 그들의 신을 형상화하는 것'과 견줄 만하다면서 페티시즘을 정신의학적 개념으로 설명했다. 페티시즘은 성적 만족을 얻기 위해 비성적인 물건을 필요로 하는 정신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물건의 대상은 성적 경향이 없는 인체 부위, 의류 또는 드물게 사람과 관계없는 물건일 수 있다. 이런 증상은 거의 남성에서만 나타나며, 대부분 대상은 여체 또는 여성 의류에 관련된 것이다. 긴 머리카락이나 발은 우선적으로 성적 주의를 끄는 대상이 될 수 있는데, 이 경우 특정한 머리색 또는 신체상의 결점이 성적 자극을 일으킨다면 페티시즘으로 분류된다. 의류 중에서 가장 많이 대상이 되는 것은 신발과 여성 내의류이다(출처: DAUM에서 브리태니커관련태그)


3. 자멘호프L. L. Zamenhof에 의해 에스페란토가 처음 발표된 것은 1887년이었다. 이후 20세기 전반에 걸쳐 에스페란토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꿈과 희망에 부풀게 하는 언어가 된다. 특정민족에 귀속되지 않는 절대중립어로 기능하며, 지구상에 존재하는 언어적 세력의 불균형을 넘어 인류의 국제적 연대를 가능하게 해줄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다. 식민지 조선에서도 그랬다. 전국 곳곳에 강습회가 개설되었고, 독학용 서적이 출간되었으며,『동아일보』에는 에스페란토로 작성된 기사가 일주일에 한 꼭지씩 고정적으로 게재되기도 했다. / 그러나 지금 에스페란토는 그다지 널리 쓰이지 않는다. 다른 모국어를 쓰는 이들과의 평등한 만남을 위해 에스페란토를 준비하는 이는 별로 없다. ‘인류’의 언어적 불평등을 해소시킬 목적으로 고안된 이 인공어−도구에는 불행히도 인간의 욕망이 스며들지 못했다. 에스페란토Esperanto는 ‘희망하는 사람espero+−anto’을 뜻한다. 이를 그대로, 에스페란토에 간직된 꿈과 희망은 현실화되지 못한 채 지금도 희망의 영역으로만 남아 있다(이 글 중 1. ‘언어적 평등이라는 꿈’ 全文).


4.『스노우크래쉬Snow Crash』 : 기괴하고도 장대한 해석학으로 인간의 언어적 상황을 그려낸, 닐 스티븐슨의 사이버펑크 미스테리 소설. 주인공은 가상공간과 현실공간을 오가며 바이러스 스노우크래쉬의 유포 출처 및 그와 관련된 음모를 파헤쳐나가는데, 밝혀진 내막은 다음과 같다. 바벨탑 이전에 ‘단 하나의 언어’가 있었다. 이것은 고대 수메르의 아세라 여신이 인간의 두뇌를 숙주로 삼아 퍼트린 정보 바이러스다. 신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이 공통언어-바이러스는 아무 장애 없이 급속도로 퍼져나간다. 이에 대해 엔키라는 신이 개입한다. 그는 인간이 아세라의 정보 바이러스를 퍼트리는 숙주로 이용되는 일을 막으려고 백신을 만든다. 다양하게 분화된 인간의 언어가 바로 그것이다. 이 언어-백신에 의해 아세라 바이러스의 감염은 차단되고, 인간은 ‘이성’을 갖게 된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아세라 바이러스, 그러니까 ‘단 하나의 언어’가 잠재되어 있지만, 엔키 백신인 다양한 언어가 그에 대한 면역력을 지니게 해준다. 제목으로 쓰인 ‘스노우크래쉬’란 다시 엔키 백신을 무력화시키는 바이러스다. 주인공은 대항 백신으로 스노우크래쉬의 유포를 막는 데 성공하고, 우리의 근 미래는 결국 ‘다양한 언어’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헤피엔딩인 셈이다(이 글의 4. ‘스노우크래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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