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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Ⅳ - 만남, 그리움

by 답설재 2009. 12. 23.

『현대문학』에 연재되고 있는 이 소설의 한 부분입니다.

 

 

질베르트의 출현과 산사꽃

 

 

…(전략)…

생울타리 틈으로 정원 안의 오솔길이 하나 보였는데 그 길가에 피어난 재스민, 팬지, 마편초 사이로 꽃무들이 열어 보이고 있는 신선한 주머니는 옛 코르도바산 가죽으로 지은 향긋하고 빛바랜 장밋빛인데, 한편 자갈 위에는 초록색의 물 호스가 풀어져서 길게 뻗어 있고 그 뚫어진 구멍들에서 꽃잎들 머리 위에 다채로운 작은 물방울들이 뿜어나와 프리즘 같은 수직의 부채를 만들어 세우며 꽃향기를 촉촉이 적시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그만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 마치 어떤 환영이 나타나서 단지 우리의 시선만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보다 깊은 지각을 요구하고 우리의 존재를 송두리째 다 손아귀에 넣어버렸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붉은색이 깃든 금발의 소녀 하나가 막 산책에서 돌아오는 듯한 모습으로 손에 원예용의 삽을 들고서 장밋빛의 주근깨가 뿌려진 얼굴을 쳐들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의 검은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당시 나는 어떤 강력한 인상을 그 객관적인 요소들로 환원하여 인식할 줄 몰랐고 그 이후 지금까지도 그런 걸 익힌 바 없었으며, 또 그녀의 눈 빛깔의 개념을 추출해내기에 충분한, 이른바 '관찰력'이라는 것도 갖추지 못했기에, 내가 그녀를 다시 떠올릴 때마다 오랫동안 그 눈빛의 기억은, 그녀의 머리가 금발이었기 때문에, 이내 선명한 하늘빛의 기억으로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만약 그 소녀가 그토록 검은 두 눈-처음 보는 이에게 그토록 강한 인상을 주는-을 가지고 있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그녀 가운데서 유독 그 푸른 눈에 그렇게까지 홀리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소녀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는데, 처음에 나의 그 눈길은 단순히 두 눈을 대변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창 가에서, 초조해진 나머지 모든 감각들이 화석처럼 굳어진 상태로, 몸을 밖으로 내밀면서 내다보는 눈길, 바라보이는 상대의 육체와 영혼을 한꺼번에 만지고 사로잡아 어디론가 데리고 가려 드는 눈길이었고, 그다음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금방이라도 이 소녀를 알아보고 나에게 좀 앞장서 달려가라고 명하며 나를 멀찍이 떨어뜨려놓으면 어쩌나 싶은 마음에 너무도 걱정이 되어, 억지로라도 소녀의 주의를 끌어 나의 존재를 알리고자 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애원하는 것이 되어버린 또 하나의 눈길, 바로 그것이었다! 소녀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누군지 살펴보려고 앞쪽과 옆쪽으로 눈동자를 움직였다. 그 결과 아마도 그녀는 우리의 인상이 우스꽝스럽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그녀가 관심 없다는 듯 얼굴을 홱 돌리고 무시하는 표정으로 자기의 모습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시야에 들지 않도록 옆으로 비켜섰으니 말이다. 그리고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고 발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나를 지나쳐 가는 동안에, 그녀는 내가 가는 방향을 따라 멀리 눈길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별다른 표정도 없고 나를 바라보는 것 같지도 않아 보였지만 눈길을 고정시킨 채 미소를 감추고 있는 그 태도는 내가 교육받은 이른바 예절바른 행동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아무래도 극심한 멸시의 표시로밖에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한 손으로 외설스런 신호 비슷한 것을 해보였는데, 만일 남들이 보는 앞에서 알지 못하는 이에게 그런 손짓을 했다면, 내가 마음에 지니고 있는 예절 소사전에 따르건대 그것은 오직 한 가지 뜻, 즉 무례한 의도의 뜻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질베르트라는 이름

 

 

"얘, 질베르트, 어서 이리 와, 뭘 하고 있어?" 하고 날카롭고도 명령하는 투의 목소리로 내가 여태껏 보지 못한 하얀 옷차림의 어떤 부인이 소리쳤다. 그리고 그 부인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굵은 무명옷을 입은 낯선 신사가 금방이라도 얼굴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소녀는 갑자기 미소를 거두고 삽을 주워 들더니 온순하지만 속마음을 알 수 없는 앙큼한 표정을 지으며 내 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멀어져 갔다.

이렇게 바로 내 곁은 질베르트라는 이름이 지나갔다. 어쩌면 언젠가 나로 하여금 그녀를 다시 만나게 해줄는지도 모를, 무슨 부적처럼 주어진 이름, 한순간 전까지만 해도 소녀는 한갓 불확실한 이미지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 이름이 이제 막 그 이미지를 하나의 인격으로 바꾸어놓은 것이었다. 이렇게 그 이름은 재스민과 꽃무들 위로 발음되어 초록색 물뿌리개의 물방울들처럼 날카롭고 서늘하게 지나갔다. 그렇게, 그 이름이 건너질어왔던-그리하여 외따로 분리해놓은-맑은 공기지대에, 그녀와 같이 생활하고 그녀와 같이 여행하는 행복한 사람들에게 그 이름이 호명하여 가리켜 보이는 소녀의 삶의 신비가 스며들게 하고 그 공간을 무지갯빛으로 빛나게 하면서 그렇게. 소녀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내가 끼어들 수 없는 그녀의 미지의 삶에 대하여 그들이 누릴 수 있는, 그러나 내게는 너무나 아프게만 느껴지는, 친밀성의 에센스를 내 어깨 정도의 높이만큼 장밋빛 산사꽃 아래에다 펼쳐놓으면서.

…(후략)…

 

 

산사꽃과의 작별

 

 

…(전략)… 메제글리즈 쪽으로의 산책에서는 일단 들판으로 들어서면 산책이 끝날 때까지 다시는 들판을 떠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들판에는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무슨 방랑자같이 끊임없는 바람이 훑고 지나가는 것이었는데 그 바람이 나에게는 콩브레에만 있는 정령처럼 여겨졌다. 해마다 우리가 그곳에 도착한 날이면 내가 확실하게 콩브레에 와 있다는 것을 실감하기 위하여 그 바람을 찾아 언덕길로 올라가곤 했는데 바람은 밭고랑을 달려가며 나로 하여금 제 뒤를 따라 달리게 했다. 메제글리즈 쪽의 이 불쑥 솟아 있는 들판은 몇 십 리에 걸쳐 그 어떤 땅의 기복과도 마주치지 않는 평지여서 언제나 바람이 옆에서 길동무를 해주는 것이었다. 나는 스완 양이 자주 랑에 가서 며칠씩 지내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곳까지는 몇십 리나 되었지만 그 중간에 아무런 장애물이 없어서 그 거리가 어느 만큼 벌충되는 셈이었다. 그리하여 뜨거운 오후에 아득한 지평선 끝에서 불어온 바람이 가장 먼 밀밭을 쓸어 눕히고나서 드넓은 들판 전체로 물살같이 퍼지다가 뭐라고 뭐라고 속삭이며 미지근하게 데워져 잠두와 크로버들 자욱이 돋아난 내 밀밭에 와서 엎드리는 것을 볼 때면 우리 두 사람에게 공통된 이 들판이 우리들을 접근시켜 서로를 하나로 맺어주는 것만 같아, 나는 이 바람이 그녀의 곁을 지나왔으니, 내가 그 뜻을 알아들을 수는 없어도 그 바람이 내게 속삭이는 것은 그녀가 내게 보내는 어떤 메시지일 것이다, 라고 생각하며 지나가는 그 바람에 입을 맞추는 것이었다. 왼쪽에는 샹피외(주임사제의 설명에 의하면 어원이 캄푸스 파가니Campus pagani인)라고 불리는 마을이 있었다. 오른쪽에는 밀밭 저 너머로 생탕들레 데 샹 성당의 조각이 새겨진 두 개의 시골풍 종탑이 보이는데 그 종탑들 자체도 호리호리하고 표면에 비늘이 있으며 누렇게 바랜 채 얼룩으로 꺼칠꺼칠해져 있어서 마치 두 대궁의 밀 이삭 같아 보였다.…(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