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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놀라운 백남준

by 답설재 2009. 12. 16.

 

놀라운 백남준

 

 

‘복합매체’에 대한 백남준의 글이 있어 옮깁니다.1 그는 박식해서 특유의 논리를 전개했지만, 저로서는 앞으로 나아갈수록 그 내용을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머리말만 옮기게 되었습니다.

 

노버트 위너2와 마샬 맥루한3

 

1.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것이 취미인 노버트 위너는 이미 20년 전에 다음과 같이 복합매체에 대해 예견했다. "수년간 로젠 블르트 박사와 나는 과학 발전의 초대 수혜영역은 여러 기성이론들 사이에서 불분명한 성격 때문에 간과되어온 틈새 분야가 될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 라이프니츠 이래로 자기 시대의 모든 지식활동을 온전히 조망할 만한 인물은 없었다. 한 세기 전에는 비록 라이프니츠는 아니었어도 가우스나 패러데이, 다윈이 있었지만 말이다. 오늘날 자기 스스로를 아무 거리낌 없이 수학자나 생리학자, 또는 생물학자라고 부를 수 있는 학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는 아마도 위상학자이거나 음향학자, 질膣학자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자격 있는 연구자들에게 무한한 기회를 제공하는 과학의 영역 구분이다……" 즉 "생리학자는 어떤 수학적 이론을 증명해야 할 필요가 없으며, 단지 생리학적 특성을 간파하고 수학자에게 그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말할 수 있으면 된다."(노버트 위너,『사이버네틱스』, 2쪽)

복합매체에 대한 개념은 사이버네틱스(인공두뇌학)라 불리는 복합과학을 발전시켰는데, 사이버네틱스는 고전류 기술을 이용한 엔지니어링의 전자시대를 저전류 기술을 이용한 통제와 커뮤니케이션의 전자시대로 이끌었다. 이는 마샬 맥루한이 말한 '지구촌'에서 "혼합매체" 개념으로 확충되어 나타난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바로 다음부터 시작되며, 그 난해함이 그의 작품으로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2. 마샬 맥루한의 저 유명한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명제는 이미 1940년대 이래로 커뮤니케이션 과학 내에서 암시적으로 존재해 왔다. 노버트 위너는 메시지가 있는 정보는 메시지가 없는 정보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썼다. 이 말은 거의 케이지의 말투를 연상시킨다…… 케이지는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악보는 음악을 연주할 수 없는 악보와 같은 역할을 한닫."고 말했음 직하다. 나는 몇몇 내 작품에 '연주할 수 있는 음악'이란 표제를 붙였는데, 이는 나의 대다수 작곡이 연주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종이 없는 사회를 위한 확장교육'4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제가 읽기에 편했던 부분만 조금 옮깁니다. '종이 없는 사회는 영원이 오지 않을 것이다' 그쯤의 논평은 그리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도도한 흐름도 있으니까요. 그보다 이미 1968년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그는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걸 자꾸 생각하게 됩니다.

 

종이 없는 사회를 위한 확장교육5

 

1968년 2월 백남준

(이 보고서는 록펠러기금 수혜자로서 뉴욕 스토니브룩대학에 적을 둔 첫 3개월 동안의 연구성과물이다. 두 번째 보고서는 1968년 5월에 제출 예정.)

 

1. 즉석 "세계대학"

켄터키에 사는 소녀가 일본 전통악기 고토를 배우고 싶거나 UCLA 대학원생이 페르시아나 아프가니스탄 악기로 음악실험을 하고자 하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우편으로 발송할 수 있는 TV(비데오테이프)가 수많은 과목의 개인수업을 어느 곳에서나 가능하게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미국 대학의 스무 명의 음악도가 일본 황실에서나 존재하는 궁중 아악 오케스트라의 스무 개 악기를 비디오테이프를 이용해 배운 뒤, 전통의상을 차려입고 일본으로 연주 여행을 떠나는 상황을 상상해보라. 아마도 이것은 페리 제독보다 훨씬 더 큰 문화적 충격을 일본인들에게 가져다줄 것이다. 이 기술은 시각적으로 덜 화려할지라도 보다 더 본질적인 분야에 적용될 수 있다.

옥스포드와 스토니브룩 간의 강의 교류는 물론, 예일과 모스크바 스타니슬라브 드라마스쿨 간의 연기수업 교류, 튜레인과 나이로비 간의 댄스수업 교류, 예쉬바와 텔아비브 간의 전례의식 수업 교류, 버클리와 스토니브룩 간의 강의 링크, 86개 뉴욕주립대학들의 인기 강좌 협동조합 등을 생각해볼 수 있다. 복잡한 외환거래의 문제점을 피하기 위해 서비스의 물물교환시스템을 구축한다.

 

3. …(전략)…6

미국에 있는 5천 개의 대학은 2만 명의 철학강사를 필요로 한다. 실력 있는 철학강사의 부족 현상은 특히 지역 전문대학의 경우 더욱 심각하다. 이런 교육은 자동화된 교안이나 컴퓨터 퀴즈기계로는 시행될 수 없다. '철학 하기'라는 인간 최고의 행위는 전 인격의 완전한 투신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정보기술, 예를 들어 비디오테이프, 필름, 오디오 장비, 루프 테크닉, 비선형적 인화기술, 라이트 아트, 순간포착 촬영장치, 의료 전자공학, 뇌파 전송기 등이 위대한 철학자들의 메시지를 포괄적으로 전달하는 데 사용된다면, 학생들 스스로 '철학 하기'를 자극하여 비선형적이고 아마도 더욱 도상적이며 완벽히 22세기형 철학에 부합한 포스트-맥루한을 탄생시키는 데 유용하게 활용될 것이다. 만약 철학이 과거 수 세기 동안 지녔던 헤게모니를 다시 되찾고자 한다면 철학 전공 학생들은 양피지에 쓴 문헌학 대신 오늘날의 전자적 환경에 노출되어야만 한다.

앞서 말한 대로 야스퍼스와 하이데거가 자신들에 대해 스스로 얘기한다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는 철학교육을 질적, 양적으로 개선하는 데 강력한 수단이 될 것이다. 이 기술은 인성과 학문이 본질적으로 겸비되어야만 하는 여타 인문, 사회과학에도 적용될 수 있다.

비디오테이프 보조기술이 원어와 영어로 된 주요 철학고전을 읽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 현재 IBM이 회화와 음악을 접목시킨 컴퓨터 색인을 개발 중에 있는데, 이미 실행 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철학에 시각적 요소를 부가하는 데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철학에 비디오테이프 가이드를 보완하겠다는 나의 아이디어는 단순히 초상화나 출생지 등등의 이미지를 덧붙이는 것 이상을 의미하지만 말이다. …(후략)…

 

5. 7대부분의 성악 전공생들은 힘들여 공부한 오페라에 단 한 번도 출연할 기회가 없이 대학을 졸업하곤 한다. 이런 식의 어중간한 공부가 그들을 어중간한 선생들로 만든다. 오페라 공연이 재능 있는 자들만의 것은 아니다. 비디오 대용품으로 성악과 학생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오페라 무대를 경험할 수 있으며 리허설 시간도 10분의 1로 줄일 수 있다. 그 결과 실제 공연의 빈도수도 많아질 것이다. 

「라 트라비아타」의 경우

첫 번째 영상은 소프라노 파트만 빠진 전체 장면으로서 소프라노 파트 연습에 사용한다.

두 번째 영상은 테너 파트만 빠진 전체 장면으로서 테너 파트 연습에 사용

세 번째는 바리톤 파트, 그리고 네 번째는 베이스 파트를 위한 영상이다.

영상을 네 벽면에 동시에 투사하여 연기훈련을 용이하게 통합할 수 있다.

이미 대중음악영역에서 실용성이 검증된 이 방법론은 연극에도 활용할 수 있다.

맥베스 부인이 없는「맥베스」와 햄릿이 없는「햄릿」, 줄리엣 없는 로미오를 상상해보라.

네바다주의 십대 소녀 오필리아가 스크린을 통해 로렌스 올리비아에 분한 햄릿과 공동 주연을 맡을 수 있다.

이 모든 기획은 무대 위에서 3차원 입체영상이 가능해질 때 더욱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단순히 한 파트가 빠진 합창곡이 현장에서의 노래연습에 도움이 되고, 한 악기가 빠진 현악사중주가 연습시간을 줄이는 것은 물론 교통체증 해소에도 일말의 도움이 될 것이다.

 

6. 혁명이 1920년대 러시아에 전기화를 의미했다면, 1960년대의 혁명은 전자화를 의미한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행성에서 행성으로.

 

…(이후 모두 생략)…

 

백남준이 생각한 것들은, 이곳 남양주양지초등학교에서도 모두 실현 가능한 것들입니다. 다만, 실현 가능한 것들에 머물러 있을 뿐입니다. 그는 그것을 이미 40년 전에 이야기한 것입니다.

 

 

  1. 백남준 지음·안소연 편집·번역,「백남준의 비데아-비데올로기」『현대문학』(연재 제9회), 265~266쪽. (1967년 런던 현대미술관기관ICA 회보에 수록된 것을 안소연이 편집 번역한 자료) [본문으로]
  2. 노버트 위너Norbert Wiener(1894~1964) : 미국의 폴란드계 유태인 가정에서 신동으로 태어난 위너는 18세에 하버드대학에서 수학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버트란트 러셀에게 수학하기도 한 위너는 하버드로 돌아와 잠시 철학을 가르쳤고 이후 MIT에서 수학 교수로 여생을 보냈다. 2차 셰계대전 중에 자동화 무기와 미사일 분야에서 일하면서 커뮤니케이션이론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궁극적으로 사이버네틱스와 로보틱스, 컴퓨터 컨트롤, 자동화이론을 개쳑했다.「과학자의 반란」(1947)이란 글을 통해 과학자의 윤리를 천명하고 과학연구에 대한 정치적 간섭을 비판한 그는 정부로부터 연구기금을 받거나 군사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일을 거부했다.(편집, 번역자 안소연의 주) [본문으로]
  3. 마샬 맥루한Marshall Mcluhan(1911~1980) : 캐나다 출신의 영문학자로 케임브리지대학에서「토머스 내시의 수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50년대 초반부터 전자시대의 문명과 커뮤니케이션이론에 대한 탁월한 통찰과 소위 '모자이크 어프로치'라 불리는 그의 독특한 문체로 주목받았다. '지구촌'이란 유명한 용어를 낳은「구텐베르크의 은하계」(1962)와 미디어를 인간의 확장된 감각기관으로 상정한「미디어의 이해」(1964), 촉각만을 편향적으로 발달시키는 하이테크시대의 미디어를 '마사지'라고 역설한「미디어는 마사지다」(1967) 등은 뉴미디어시대를 한 세대 앞서 예견한 문제작으로 평가된다. 백남준의「글로벌 그루버」(1973)「굿모닝 미스터 오웰」(1984)「바이 바이 키플링」(1986) 등은 맥루한의 이론에 시청각적으로 공명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위와 같은 주) [본문으로]
  4. 백남준 지음·안소연 편집·번역,「백남준의 비데아-비데올로기」『현대문학』(연재 제10회). [본문으로]
  5. 위의 책, 291쪽. [본문으로]
  6. 위의 책, 293~294쪽. [본문으로]
  7. 위의 책, 297~298쪽.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