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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운다』 (2)

by 답설재 2009. 12. 10.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김종철․김태언 역

『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운다』

녹색평론사, 1996

 

 

 

 

옮겨쓴 부분들에서 이미 이 책의 메시지 전체를 짐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육에 대한 그의 관점들에서 다음과 내용들은 특별히 눈길을 끄는 부분들이었습니다.

 

 

서구의 교육은 1970년대에 라다크의 마을들에 들어왔다. 오늘날 약 200개의 학교가 있다. 기본적인 교과과정은 인도의 다른 지역에서 가르치는 것을 어설프게 흉내낸 것이고, 그것은 또 영국 교육의 어설픈 모방이다. 거기에는 라다크의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다. 한번은 레에서 어느 교실에 가보았을 때 교과서에 런던이나 뉴욕의 것임직한 아이의 침실 그림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림에는 깔끔하게 접혀진 손수건 무더기가 기둥 달린 침대 위에 놓여 있고 그것을 화려한 옷장의 어느 서랍에 넣을 것인가 하는 데 대한 지시가 있었다. 소남의 여동생의 교과서도 마찬가지로 불합리하고 부적절했다. 한번은 숙제로, 기울어진 피사탑과 땅이 이루는 투사각을 계산하는 문제가 있었다. 또 한번은 <일리아드>의 영어번역을 가지고 고생을 하고 있었다.(118)


1986년에 학생들에게 2000년의 라다크를 상상해보라고 했더니 한 소녀는 이렇게 썼다. "1974년 이전에는 라다크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개화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누구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들은 돈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그들에게 충분했다." 또 다른 글에서는 한 아이가 "사람들은 자기들의 노래는 부끄러운 듯이 부르지만 영어와 힌두어 노래는 아주 신이 나서 부른다. …요즈음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 고유의 옷을 입지 않는 것을 본다. 아마 창피하게 생각하는 듯하다"라고 썼다. 교육이 사람들을 농업에서 끌어내어 도시로 부르고, 그곳에서 사람들은 현금경제에 의존하게 된다. 전통적인 라다크에서는 실업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현대적 부문에서 지금, 주로 정부에 있는 아주 제한된 일자리를 위해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 결과로 실업은 이미 심각한 문제이다. 현대적 교육은 글을 읽고 수를 깨친 사람의 비율을 높인 것 같은 명백한 이점을 가져왔다. 그것은 또 라다크 사람들에게 바깥세상에 대한 좀 더 많은 지식을 갖게 해주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 교육은 라다크 사람들을 서로서로에게서, 그리고 땅으로부터 유리시켰고, 그들을 세계경제라는 사다리의 제일 아래 칸에 자리잡게 하였다.(120~121)


전통문화에서, 아이들은 양친과 계속적인 접촉을 하는 데서 뿐만 아니라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늘 상호작용을 하는 생활방식에서도 혜택을 받았다. 나이든 아이들이 더 어린 아이들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또 어린 아이들은 존경과 찬양의 마음을 가지고 큰 아이들을 바라보며 그들을 따라하려고 했다. 성장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비경쟁적인 학습과정이었다. 지금은 아이들이 학교에서 나이별 집단으로 나누어진다. 이런 식의 평준화는 몹시 파괴적인 효과를 낳는다. 같은 나이의 구성원들로만 이루어진 사회집단을 만들어냄으로써 서로 돕고 서로에게서 배우는 능력은 크게 줄어든다. 그 대신 자동적으로 경쟁의 조건이 생겨난다. 아이들 각자가 다른 사람만큼 훌륭해야 된다는 압력을 받기 때문이다. 열 살짜리 열 명이 있을 때보다 나이가 다른 열 명이 있을 때 더 많은 협력이 생겨난다.(133~134)

 

좀 주제넘지만, 저는 현장학습을 강조합니다. 교과서를 무시하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교과서에 실린 자료를 참고로 그와 똑같은 목표를 설정할 수 있다면 실제적인 사례로써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진정한 교육이라는 뜻입니다.

 

가령, 4월 1일 '과학의 날'에 전교생을 대상으로 하루 종일 과학에 관한 특별교육을 진행하면서, 그 시간을 '과학' 시간으로 계산해 넣지 않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오히려 '실제'가 무시되는 사례입니다.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냇가의 생물을 '오남천'에서 배운다면 그 오남천이 '교과서'입니다. 그보다 현실적인 교과서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냇가의 생물에 대한 '모든 것(교육, 학습)'은 오남천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우리 교사들 중에는 그런 시간은 '진도'를 나가는 데 장애가 되는 '행사'에 지나지 않으므로 가능하면 그런 시간을 줄이고 얼른 진도를 나가게 해주어야 한다는 조급함과 불안함과 무지에 휩싸여 있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 선생님은 오남천에서 오래 머물지 말고 얼른 교실로 들어가고 싶을 것입니다.

 

저의 그런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을 두 군데만 옮겨봅니다. 제가 저 편한 대로 인용하는 것일까요? 그렇겠지요. 원래의 뜻은 그보다 더 큰 것이긴 합니다.

 

오늘날 세계의 구석구석에서 '교육'이라고 불리는 과정은 똑같은 가정(假定)과 똑같은 유럽 중심의 모델에 기초를 두고 있다. 보편적인 지식이라는 동떨어진 사실과 수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책들은 지구 전체에 적합한 것으로 의도된 정보를 전파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생태계와 문화와는 동떨어진 종류의 지식만이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이므로 아이들이 배우는 것은 본질적으로 합성된 것이고 살아있는 맥락에서 유리된 것이다. …(중략)… 서구의 교육체계는 온 세계의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의 환경에서 나오는 자원을 무시하고 똑같은 자원을 사용하도록 가르침으로서 우리 모두를 더 빈곤하게 만들고 있다. 이런 식으로 교육은 인공적인 결핍을 만들어내고 경쟁을 유발한다.(118~119)


만일 개발이 지역의 자원에 기초해서 이루어지도록 한다면 그런 자원에 대한 지식을 키우고 북돋워야 한다. 표준화된 일반적이 지식을 외우게 하는 대신에 아이들에게 자기들의 환경을 이해할 수 있는 도구가 주어져야 한다. 그 과정에서 좁은 전문화와 도시지향의 서구식 교육은 보다 넓은 생태학적 관점에 자리를 내어줄 것이다. 이런 종류의 지역적 구체성에 기초한 지식은 전일적이면서 동시에 개별적일 것이다. 그러한 접근방식은 전통적인 지식을 영속시키거나 재발견해내려고 할 것이다. 그것은 특정한 장소에서 몇백년간 계속되어온 생명의 그물과의 상호작용과 경험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질 것이다.(169)

 

라다크는 전통적으로 불교문화 지역입니다. 참고로, 불교에 관한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생각이 드러난 부분입니다.

 

"모든 것이 연기(緣起)의 법칙하에 있습니다. 나가르쥬나가 말했듯이 '관계를 통한 근원은 부처의 풍요롭고 심오한 보배입니다.' 이 수준에서 우리의 범주와 구분, 이름 - '너'와 '나', '정신'과 '물질' - 은 하나가 되고 사라져버립니다. 우리가 견고하고 실체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순간순간 변하고 있습니다. 나무가 공(空)인 것과 똑같이 '자아'도 공(空)입니다. 그것을 깊이 생각해보면 당신 자신도 주위의 다른 모든 것의 한 부분으로 녹아버립니다. '자아'는 궁극적으로 우주속의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망상이 아마도 깨달음으로 가는 길에서 가장 큰 장애물일 것이다. 절대적이고 항구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은 끝없는 욕망의 순환으로 인도하고, 욕망은 고통을 가져온다. 분리된 자아와 하나하나의 사물의 개념에 집착함으로써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어떤 것을 찾고 구하려 애쓰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추구하던 것을 얻자마자 그것이 지닌 빛은 사라지고 우리는 다른 것에로 눈을 돌린다. 만족은 드물고 순간적이다. 우리는 영원한 좌절속에 있다.
감각을 가진 모든 것을 기쁘게 하는 것 외에 부처를 기쁘게 하는 방법은 없다.
타시는 자주 지식과 이해는 그것 자체로 충분치 않음을 내게 상기시키곤 했다. 사실 그것들은 자비심과 함께가 아니면 위험할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달라이 라마는 그의 진정한 종교는 친절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보십시오. 항상 다른 이들에 대한 염려를 강조하고 있습니다."(81)

 

 

책 표지의 저, 농기구인 듯한 것을 짚고 서 있는,편안하고, 마음씨 좋을 것 같고, 아름다운 이 여성이 바로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일까요?설명은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