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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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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눈」 눈 『거대한 뿌리』(김수영 시선, 민음사, 1997, 개정판 4쇄)를 꺼내어 「눈」을 찾았습니다. 눈은 살아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마흔일곱에 버스에 치여 죽은 詩人 김수영(1921~1968)은, 웬 일일까요, 자꾸 가슴을 앓다가 죽은 시인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인지 시인은 새벽에 본 하얀 눈 위에 기침을 하다가 나온 가래를 뱉을 수도 있겠다 싶어집니다. ‘마음놓고’. 쿨룩쿨룩 하다가 .. 2009. 10. 24.
강우식 「종이학」 종이학 강우식 오대산 월정사에서 상원사 사이 전나무들은 부처님의 허리처럼 곧추 서 있고 월정사 석탑과 상원사 동종 사이 하늘을 찌르다 비스듬히 휘어진 탑 끝과 천 년 묵은 놋쇠자궁의 동종 사이 방한암 선사의 결과부좌 비슷한 한길과 경 읽다 다 닳은 팔꿈치의 굽이 길 사이 한순간 개명(開明)하듯 눈 내려 환하다. 사이사이 산들은 모조지로 접은 종이학이다. 그대가 곁에 있어 옛날에는 마음을 모아 밤새도록 정갈히 접고 만들었던 종이학. 지금은 종이학 접어 빌어줄 그리운 사람도, 사람도 아주, 아주 소식줄 끊겨 만드는 법도 까마득히 잊은 무명(無明)같이 칠흑의 흰 바탕뿐인 마음눈이 내린다. 오대산 월정사에서 상원사 사이 유리병 안에 천마리 학이 갇혔구나. 그저 하얗게 저무는 경전의 말씀. 하실 말씀 더 없으신 .. 2009. 6.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