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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노년일기304

김지연(단편) 「내가 울기 시작할 때」(단편) 김지연(단편) 「내가 울기 시작할 때」 『現代文學』 2018년 12월호 34~54. 사후세계에 관한 여러 가설을 세워본 적이 있다. 고등학생이었을 때, 야자를 땡땡이치고 바로 옆 중학교 운동장 한쪽, 가로등 불빛도 없는 계단 구석에서 몇몇과 어울렸던 때였다. 누가 대한민국에서 고등학생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신세 한탄을 했고, 모든 게 다 허무하다는 말이 오갔고, 이야기는 흘러 흘러 어차피 죽으면 다 끝이라는 지점에까지 이르렀다. 우리 중에는 기독교 신자도 있었고 불교 신자도 있었고 무신론자도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신을 믿지도 안 믿지도 않는 채로 살고 있었다. 별 생산성 없는 말들, 누구도 자신의 의견을 굽힐 마음이 없는 말들이 여러 차례 오간 다음에 어둠 속에서 누가 말했다. "죽는다는 건 어쩌면 .. 2018. 12. 26.
엄연한 '노후' 1 날씨가 좀 풀렸다고 말합니다. 하나마나입니다. 정작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고, 이제 집에 들어가도 좋은 시간인지 모르겠다고 얘기하고 싶은 걸 감추고 있다는 걸 잘 압니다. 그렇긴 하지만 할아버지도 굳이 그걸 얘기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마나일 것입니다. 2 몰라서 그렇지 세상은 무저갱입니까? 정신을 바짝 차리려고 해도 금방금방 까무루해집니다. 그렇게 까무룩해져서 아래로, 그 아래로, 어디가 바닥인지도 모를 구렁텅이로 자꾸자꾸 내려갑니다. 많이 내려가면 정신을 차려봤자 다 올라오지도 못한 채 또 까무룩해집니다. 누가 먼저 떠나면 어떻게 하나, 그 생각을 자주 합니다. 남은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는 그 문제는, 생각은 자주 하지만 결론이 있을 것 같지가 않습니다. 얘.. 2018. 12. 23.
"나는 너와 어째서 이렇게 친밀한가(與汝定何親)" "나는 너와 어째서 이렇게 친밀한가(與汝定何親)" 도연명의 시에 화답한 시를 '화도시(和陶詩)'라고 한다는데 소동파는 120여 수에 달하는 화도시를 남겼다고 한다. 『소동파 평전(왕수이자오)』에는 「도연명의 '잡시' 11수에 화운하여」(和陶雜詩十一首)가 소개되어 있었다. 비낀 햇살이 .. 2018. 12. 9.
전화번호 정리 1 텔레비전에서, 자신의 전화기에는 수백 명의 전화번호가 들어 있고 그 번호들은 '리얼타임'으로 쓰이고 있는 것들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대단한 사람들 얘기이긴 하지만 대단하지 않은가 싶었다. 내 전화기에는 몇 명의 전화번호가 들어 있을까? 많지 않다. 대부분 지금 쓰이고 있는 번호도 아니다. 정리해버려야 한다. 내가 덜컥 죽게 되면 적어도 이 사람들에게는 나의 죽음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할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게 무슨 꼴이겠는가! 2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죽은 사람이 문자 메시지로 내게 부고를 보내는 것이다. "내가 죽었으니 내일까지(모레 아침에는 장지로 떠나니까) ○○ 병원 장례식장 ○ 호실로 찾아오라!" 유족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혹은 편리하고 유용한 방법을 이용한 것이지만,.. 2018. 12. 2.
그대와 나 ⑹ 그대와 나 ⑹ 그대는 나를 조금도 바꾸지 못했지만, 나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그대를 바꾸어버리려고 한다. 2018. 11. 20.
집으로 가는 길 광야를 헤매고 있었습니다. 이미 몇 번째인지, 그렇게 정해진 것처럼, 매번 그 길을 찾지 못했습니다. 낯익은 곳이라도 있나 싶었지만 번번이 엉뚱한 곳이었습니다.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지하 1, 2, 3층…… 파헤쳐 놓은 공사장 같은 커다란 웅덩이가 된 곳에 있게 되었습니다. 몇 번의 지각변동을 겪고 그 모습을 드러낸 것처럼 얼기설기 튀어나온 부분을 따라 안간힘을 써서 올라갈 수 있었고 온몸을 휘감은 덩굴도 걷어냈습니다. 그곳은 지평선도 보이지 않는 광활한 초원이었습니다. 핸드폰을 열어서 '길찾기'에 '출발' '도착' 지점을 입력하자, 이런! 그 화면에 내가 걸어오는 모습이 나타났고 걸어오는 사람은 곧 서너 명으로 늘어났는데 서로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모두 바로 나의 모습이었고 이내 군대 행렬처럼.. 2018. 11. 17.
그대와 나 ⑸ 가지고 온 걸 다 받아냈다. 할 수 있는 일 다 하게 했고 마침내 할 수 없었던 일들도 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중이다. 2018. 10. 29.
영화 "신과 함께―인과 연" 1 '염라국 입국 안내서'를 보면1 죽은 지 7일째 되는 날까지 진광대왕전(염라국 첫 번째 건물)에 가면, 생전에 생명을 어떻게 대했는지 따지게 되고, 죽은 지 14일째 되는 날까지 초강대왕전(삼도천 너머)에 가서 저울로 죄의 무게를 달아보게 되고, 죽은 지 21일째 되는 날까지 송제대왕전(업관 너머)에 가서 거짓된 말과 행동에 대해 무서운 형벌을 받게 되고, 죽은 지 28일째 되는 날까지 오관대왕전(송제대왕전 맞은편 뜨겁고 큰 강 너머)에 가서 죄의 무게에서 착한 일의 무게를 덜게 되고, 죽은 지 35일째 되는 날까지 염라대왕전(염라국 한가운데)에 가서 죄를 변명할 기회를 갖게 되고(단, 사정이 있었을 경우에만), 죽은 지 42일째 되는 날까지 변성대왕전(염라국에서 걸어서 이레가 걸리는 바윗길 끝)에 .. 2018. 10. 25.
「추운 아침」 추운 아침 내 입에서 하얀 꽃이 피네요. 친구들의 입에서도 꽃이 피네요. 포옥 포옥 꽃이 피네요. 지금도 옛 교사 시절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거나 꿈을 꾸거나 합니다. 그런 일들이 다시 일어날 수도 있다는 막연한 느낌은 사라졌습니다. 그건 다행입니다. 일전에는 꿈 속에서 처음 교사 발령을 받아 아이들을 가르치며 지어본 동시 한 편이 생각났습니다. 50년 전의 일입니다. 그 3연의 정체는 거의 정확할 것이라는 확신까지 주었는데 아침에 잠에서 깨어났는데도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동시'라고 하기에는 쑥스럽지만, 눈에 보이는 것에 이어지는 심상(心想)에 조금만 가까이 간 상태를 보여주어 아이들도 한 편의 시를 써보게 하고 싶었을 것이었습니다. 가브리엘 루아의 소설 『내 생애의 아이들』에서 본 문장이 생각나서 .. 2018. 10. 23.
수컷 기질 암컷 기질(데즈먼드 모리스 흉내내기) 1 저기쯤 아직 조금밖에 삭지 않은1 남녀 한 쌍이 보입니다. 암컷은 수컷의 팔짱을 끼었고 둘은 보조를 맞추어 걸어오고 있습니다. 암컷은 계속 뭔가를 이야기하고 수컷은 분명 가장(假裝)한 과묵으로 듣기만 합니다. 나를 보고도 비켜 걸을 마음이 전혀 없는 것 같고, 그 상황을 조금도 바꾸고 싶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2 그것들이 마침내 두어 걸음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수컷은 줄곧 내 눈길을 살폈습니다. 내가 제 암컷을 훔쳐보지나 않는지, 제 암컷이 예쁘고 몸매도 죽여준다는 걸 확인하지나 않는지 감시하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 눈길은 결코 순하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나란히 걷는 상황에서 그 수컷이 제 암컷의 눈길까지 살필 수는 없으므로 마주보는 내 눈길을 확인하는 것만이 가능한 방어가 될 것이었습니다.. 2018. 10. 13.
아파트 마당의 소음 초저녁에나 늦은 밤에나 아파트 마당에서 도란거리는 소리는 한적한 어느 호텔, 아니면 펜션에서 들었던 그 소음처럼 들려옵니다. 새벽까지 술을 마시던 사람들로부터 들려오던 그 대화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끝나지 않은 느낌입니다. 그러면 나는 제시간에 먼저 잠자리에 들 때처럼 혹은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처럼 슬며시 잠 속으로 빠져듭니다. 그렇지만 그건 지난여름이었습니다. 해마다 여름이면 떠오르고 또 떠오르는, 그러나 점점 스러져가는 느낌입니다. 이 저녁에는 바람소리가 낙엽이 휩쓸려가는 소리로 들리고 사람들이 도란거리는 소리는 들리지도 않습니다. 누구와 함께든 속절없이 떠나야 할 여름의 서글픈 저녁입니다. 2018. 9. 6.
달력 몰래 넘기기 1 달력을 넘기려고 하면 섬찟한 느낌일 때가 있습니다. '뭐가 이렇게 빠르지?' 붙잡고 있는 걸 포기해버리고 싶고, 아니 포기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어서, 이내 평정심을 되찾습니다. '어쩔 수 없지.' 2 '또 한 달이 갔어? …… 우린 뭘 했지? …… 그냥 이렇게 살아가는 거야?' 털어내야 할 것들, 정리하고 준비해야 할 것들, 해결해야 할 것들…… 온갖 것들이 현실적인 과제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아내가 그렇게 따지고 들 것 같은 초조감도 없지 않습니다. 사실은 그런 질문들이 점점 현실적인 것으로 다가옵니다. 3 그런 '숙제'가 싫습니다. 해결되거나 말거나 정리할 게 있거나 말거나 그냥 지내면 좋겠습니다. 덥거나 말거나 언제까지나 8월이고, 언제까지나 이렇게 앉아 있을 수 있으면 그만이겠습니다. 이 .. 2018. 9.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