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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글쓰기12

뭘 알아야 글을 쓸 것 아닌가 글을(도) 쓰며 살아가는 사람은 많다. 나는 그걸 전업으로 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실감할 때가 있다. 유발 하라리의 경우도 좋은 사례다. 그의 책 《사피엔스》는 그 전체가 그런 사례들이어서 밑줄을 긋는다면 아예 다 그어버리면 속이 시원할 정도였다. 소비지상주의에 대한 그의 생각을 읽으면서도 그 생각을 했다(490~493). 현대 자본주의 경제는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생산량을 늘려야 한다. 상어가 계속 헤엄치지 않으면 질식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 역사를 통틀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핍 속에서 살았다. 그러므로 검약이 표어였다. 청교도와 스파르타인의 금욕 윤리는 가장 유명한 두 사례였다. 훌륭한 사람은 사치품을 멀리했고, 음식을 버리지 않았으며, 바지가 찢어지면 새로 사는 것이 아니라 꿰.. 2024. 2. 18.
글을 쓴다는 것 : 멋있는 유발 하라리 과학은 자연선택으로 빚어진 유기적 생명의 시대를 지적설계에 의해 빚어진 비유기적 생명의 시대로 대체하는 중이다. 특히 오늘날의 과학은 우리에게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재설계할 수단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역사 과정 동안 수많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혁명이 존재했지만 인간 그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우리는 신라시대나 고대 이집트 시대 선조들과 여전히 동일한 몸과 마음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 사회와 경제뿐 아니라, 우리의 몸과 마음도 유전공학, 나노 기술, 뇌기계 인터페이스에 의해 완전히 바뀔 것이다. 몸과 마음은 21세기 경제의 주요한 생산물이 될 것이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서문을 읽으며 아득한 느낌이었다. 독후감을 쓰기가 어려울 것 같은 절망 같은 것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흥분하지.. 2024. 1. 20.
글읽기의 맛 시간이란 개성의 유일성唯一性의 외면적인 징표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본질적으로 개성은 개성 그 자체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개성의 유일성은 그것이 독립된 존재로서 '다른 어떤 것이 출입해야 할 창을 가지고 있지 않고', 자족적自足的인 내면적 발전을 이룩하기 위해 성립한다. 개성은 자기 활동적인 것이기 때문에 자기 구별적인 것으로 자기의 유일성唯一性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어떤 시간에 태어나는가 하는 것은 마치 음악의 한 곡 안에서 어떤 순간에 어떤 음이 오는가 하는 것이 우연이 아닌 것처럼 나의 개성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나라고 하는 개성의 내면적인 의미의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시간의 형식에 의해 음악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음악 속에서 진정한 시간.. 2023. 9. 11.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은 예전에 교과서를 집필하고 만드는 일을 주관할 때는 함께 회의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나에게 이렇게 묻기도 했다. "어떻게 하면 원고를 그렇게 쓸 수 있을까요?" "제가 잘 쓰는 것 같아요?" "그럼요, 우리 중에서 늘 최고잖아요!"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전 이것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고스톱도 할 줄 모르고 바둑이나 붓글씨, 그림 등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시작하다가 말았거든요." 그러면서 내가 생각하는 답을 이야기해 주었다. "이 정도라도 쓸 줄 알게 된 건, 글쎄요, 책을 한 3천 권은 봤겠지요? 그 정도면 저 같은 바보라도 문장 구성에 대한 초보적인 안목은 갖게 될 것 같아요." 그럴 때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그냥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 '그럼 나도 3천 권을 읽고 .. 2023. 4. 17.
글을 쓰는 일 나는 심지어 내가 책을 읽을 수 있기도 전에 어떻게 책이 만들어지는지 알고 있었다. 나는 책상에 몸을 숙이고 있는 아버지 등 뒤로 살금살금 들어가 발끝으로 서곤 했는데, 아버지의 지친 머리는 책상 스탠드의 노란 불빛 웅덩이 속에 떠다니고, 그는 천천히 공을 들여, 책상 위에 놓인 두 더미로 나뉜 책들 사이에 만들어진 꾸불꾸불한 계곡 사이로 자기 길을 재촉하며, 앞에 펼쳐진 두터운 학술 서적들로부터 온갖 종류의 자세한 내용을 뽑아서 찢어내, 스탠드 불빛을 향해 붙들고 잘 살펴 분류한 다음, 작은 카드에 내용을 베껴 쓰고, 그다음엔 마치 목걸이를 꿰듯, 퍼즐의 제자리에 각각을 맞춰두고 있었다. 사실, 나도 어느 정도는 그처럼 일했다. 나는 시계 제조상이나 재래식 은세공인처럼 일했다. 왼쪽 눈을 바짝 찌푸린 .. 2022. 4. 13.
글쓰기의 어려움 글을 쓸 땐 미끄러져나가는 기분으로 써야 한다. 말들은 절뚝거리고 고르지 못할 수도 있지만, 미끄러져나가기만 한다면 문득 그 어떤 즐거움이 모든 걸 환히 비추게 된다. 조심조심 글을 쓰는 건 죽음과 같은 글쓰기이다. 셔우드 앤더슨은 말을 공깃돌이나 음식 조각처럼 갖고 노는 데 극히 능했다. 그는 말들은 종이 위에 칠했다. 그런데 그 말들이 너무도 단순해서 독자는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문들이 열리고 벽이 반짝이는 걸 느낄 수 있을 정도다. 양탄자며 신발, 손가락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앤더슨은 말들을 마음대로 다뤘다. 즐거운 말들을. 하지만 그것들은 또한 총탄과도 같다. 말들이 곧바로 독자를 죽일 수도 있다. 셔우드 앤더슨은 뭔가를 알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헤밍웨이는 지나치게 애를 썼다. 애쓴 흔적이 그.. 2022. 3. 8.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2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문학동네 2013 내 입장에서는 시론(時論)의 전범(典範)이라고 해야 할 글을 발견할 때가 있다. 이 글(이 책 43~45)은 바로 그런 경우여서 여기에 실어놓고 싶었다. 주제는 내가 설정하는 것이니까 다만 '눈'에 관한 것이다. 불문과에서는 무얼 하는가 우리 세대가 대학을 다닐 때 지방에서 상경한 학생들은 주로 두 사람이 방 하나를 사용하는 하숙집에서 기거했다. 내가 만난 '룸메이트' 가운데 법대생이 둘 있었다. 하나는 노무현 대통령 시절 노동부 장관을 지낸 이상수 변호사다. 이 변호사는 학창 시절 온갖 책을 가리지 않는 독서광이었고, 글을 잘 썼으며, 입을 열면 시정이 넘치는 말을 쏟아냈다.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또 한 사람은 오로지 고시 공부에만 전념하는 학생이었다. 새벽부.. 2019. 1. 16.
퇴고 2018.7.12. 블로그에 실어두면서도 그런 내용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이 있을 수밖에 없으면 읽는 사람이 적었으면 싶은 글이 있고, 일반적으로는 읽어도 그만 읽지 않아도 그만인 글들이다. 이에 비해 '왜 이렇게도 읽지 않을까?' 싶은 글도 있다. 대체로 쓰기는 어렵고(그만큼 애를 쓴다는 의미가 되기도 하지만) 일쑤 따분해서 읽기는 어려운 글이 그렇다. 오늘도 신문사에 논단 원고를 보냈다. 무더위 속에 원고를 쓰고 고치고 하면서 몇 번을 졸았는지 모른다. 그렇긴 하지만 윤문은 겨우 여남은 번밖에 하지 못했다. 이런 글 중에는 아마도 마흔 번, 쉰 번은 읽으며 수정하고 또 수정한 경우도 있다. 그러면 뭘 하나, 열 번 고치면 뭘 하고 쉰 번 고치면 뭘 하나……. 이렇게 읽고 고치고 또 읽고 고치고 해서 마.. 2018. 7. 18.
이태준 《문장강화》 이태준 《문장강화》 필맥, 2010 1 1963년쯤, 늦어도 1965년에 읽었어야 할 책입니다. 우리에게 국어를 가르치신 박용기 선생님은 참 좋은 분이었지만, 교육 체제가 그렇질 못했으니까―지금은? 글쎄요? 그걸 왜 나에게?―선생님인들 우리에게 이 책을 읽힐 도리가 있었겠습니까? 정겨운 이름들이 많이 나옵니다. 설명보다 예문(例文)의 양이 더 많지 않을까 싶을 만큼 일일이 사례를 들어주고 있습니다. 이상, 정지용, 나도향, 김소월, 이광수, 김기림, 홍명화, 정인보, 민태원, 이희승, 김기진, 염상섭, 주요섭, 현진건, 박종화, 박태원, 이병기, 김동인, 이효석, 김진섭…… 모교(母校) 교문을 들어선 느낌을 주는 분들을 이런 순서로 늘어놓아서는 안 되겠지요? 생각나는 대로 적었을 뿐입니다. 다 적지도 못.. 2017. 2. 8.
조지 오웰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 Why I Write』 조지 오웰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 Why I Write』 이한중 옮김, 한겨레출판, 2011 Ⅰ "써야 하겠습니다. 당신은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조지 오웰의 물음에 대한 나의 대답입니다. 이 에세이집 앞쪽의 「스파이크」 「교수형」 「코끼리를 쏘다」를 읽으며 생각한 것입니다. 유럽의 역사에 어두워서 '내가 공부를 하지 않은 게 다 드러나는구나……' 자책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번역서 같지 않게 읽을 수 있는 것도 좋았습니다. Ⅱ 스파이크the Spike 교수형A Hanging 코끼리를 쏘다 Shooting an Elephant 서점의 추억 Bookshop Memories 스페인의 비밀을 누설한다 Spilling the Spanish Beans 나는 왜 독립노동당에 가입했는가 Why I Joi.. 2015. 12. 18.
『발터 벤야민의 공부법―사소한 것들에 대한 사유』Ⅱ 『발터 벤야민의 공부법―사소한 것들에 대한 사유』 권용선, 역사비평사, 2014 Ⅰ. 도시, 배움의 장소들 Ⅱ.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 Ⅲ. 수집, 정리, 글쓰기 1. 쓸모없는 것들의 쓸모 2. 수집, 인용, 배치 3. 무기로서의 글쓰기 (발췌) 벤야민에게 글쓰기는 존재의 증명이자 직업이었고 오락이자 무기였다. (……) 그가 무엇인가를 '읽는다'고 했을 때, 그것은 독서의 영역을 넘어서 이미지·연극·영상·그래픽과 같이 문학이 상위 범주에 있는 예술의 영역으로까지 확장된 것이었고, 때로는 사물뿐만 아니라 길·지도·풍경 등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세계 그 자체를 '본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글쓰기 역시 벤야민 자신이 생각한 것을 문자로 고정시키는 행위 이상을 뜻했다. 그에게 글쓰기는 수집하기.. 2015. 4. 28.
글쓰기의 괴로움 - 가령 시론 쓰기 ○ 너무나 하기 싫은 일 : 초고 쓰기 - 이유 : 무엇을, 어떤 차례로, 어떤 자료들을 참고하며 쓴다는 메모도 해놓지 않고, 모든 것을 한꺼번에 생각하며 그 생각을 따라 쓰면서 겪게 되는 스트레스. 때로는 텔레비전도 켜져 있고 누군가(!)가 자꾸 얘기를 해서 대답까지 해주어야 한다. - 결과 : 짧은 글인데도 사람이 지치게 되고, 나중에 읽어보면 조리가 없어서 자꾸 고쳐야 한다. - 해결 방법 : 구상한 것을 메모해 두고, 그 메모에 따라 쓰게 되면 스트레스를 덜 받을 수 있을 것이다. - 실천 여부 : 거의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이유 : 사전에 메모를 하는 일이 다시 하나의 스트레스가 된다. - 결론 : 남이 보면 어쭙잖은 글이지만, 글쓰기는 괴로운 일이다. ○ 초고를 검토하기에 좋은 시간과 장소 .. 2011. 5.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