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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2

by 답설재 2019. 1. 16.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문학동네 2013

 

  

 

  입장에서는 시론(時論)의 전범(典範)이라고 해야 할 글을 발견할 때가 있다.

  이 글(이 책 43~45)은 바로 그런 경우여서 여기에 실어놓고 싶었다.

  주제는 내가 설정하는 것이니까 다만 '눈'에 관한 것이다.

 

 

 

불문과에서는 무얼 하는가

 

 

  우리 세대가 대학을 다닐 때 지방에서 상경한 학생들은 주로 두 사람이 방 하나를 사용하는 하숙집에서 기거했다. 내가 만난 '룸메이트' 가운데 법대생이 둘 있었다. 하나는 노무현 대통령 시절 노동부 장관을 지낸 이상수 변호사다. 이 변호사는 학창 시절 온갖 책을 가리지 않는 독서광이었고, 글을 잘 썼으며, 입을 열면 시정이 넘치는 말을 쏟아냈다.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또 한 사람은 오로지 고시 공부에만 전념하는 학생이었다. 새벽부터 밤까지 도서관에서 살았다. 나도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은 크게 뒤지지 않았지만 그에 비하면 내 공부는 늘 산만했다. 어느 날 그가 나한테 왜 고시 공부를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자기도 그 질문이 뜬금없다고 느꼈던지 어조를 갑자기 힐난조로 바꾸었다. 불문과에서는 도대체 뭘 하는 거지? 나는 고작 이렇게 대답했다. 불문학과니까 불문학을 하지. 대답이 아니라 대답의 회피였다. 그러나 저 고시생의 확실하고 단단한 신념 앞에서 내 공부의 내용과 목표를 차근차근 이야기한다는 것이 나로서는 너무나 아득한 일이었다. 문제는 내 생애에서 이렇게 질문해오는 사람이 그 사람으로 끝난 것이 아니란 것이다.

  언젠가는 교육부의 관리가 프랑스의 불문학 박사보다 한국의 불문학 박사가 더 많다는 얼토당토않은 낭성을 TV방송으로 퍼뜨렸으며, 가끔은 대학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이제는 영어 하나면 어디서나 통하니까 프랑스어 교육은 필요 없지 않느냐고 넌지시 묻는다. 교육부 관리의 말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프랑스어 교육 불필요론 앞에서 나는 프랑스어가 무역이나 여행을 하기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거나(실은 그런 일에도 여전히 필요하지만), 불어불문학과에서 프랑스어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먼저 해야 하는데, 상대방은 뒤이어질 말을 듣고 싶은 기색이 아니다. 프랑스의 역사가 현재 세계의 문화적·정치적 지형도의 형성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나, 프랑스어로 작성되었으며 지금도 작성되고 있는 많고도 중요한 문헌에 관해서는 말할 틈조차 없다. 그 질문은 처음부터 내 의견을 듣기 위한 것이 아니라 봉쇄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내가 사회의 발전에서 앞으로 오게 될 세계의 그림을 문학이 항상 먼저 그려왔으며, 우리 사회의 민주화 과정에서도 그 점은 마찬가지라고 말한다면, 그는 어쩌면 자신의 세계관에 적대할 사람들을 불어불문학과에서 기르고 있다고 아연 긴장하게 될지도 모른다.

  사실 불어불문학과를 비롯한 유럽 어문학과는 졸업 후 취직이 특별히 어려운 학과도 아니다. 대기업에 무더기로 취직하는 것은 아니지만, 언론계에서 연예계까지 각종 문화사업의 미묘한 자리에는 유럽 문학과 출신들이 어김없이 끼어 있다. 다양한 장르의 문필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유럽 문학으로 함양한 개성과 재능을 토대로 특별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영화감독, 작곡가, 디자이너도 적지 않다. 외국 문학을 포함한 인문학의 효과는 우리가 마시는 공기처럼 이 삶의 안팎에 퍼져 있으나 그것을 의식하는 사람은 적다. 그 효과가 어디서 오는지 아는 사람은 더욱 적다. 불어불문학과에서 무엇을 공부하는지 설명하기가 그만큼 어렵다.

  그러나 이 말은 해두자. 어느 젊은 출판인이 교수 신문에 칼럼을 기고하여, 근래 프랑스에서 발견된 인문학 서적들을 번역하는 일이 시급한데, 마땅한 번역자를 구할 수 없다고 한탄했다. 그 까다로운 문장을 읽어내고, 그 의미를 깊이 파악하고, 그것을 우리의 구체적인 삶과 연결지어, 이 서적들을 번역해낼 만한 소수의 사람들은 저 모욕적인 질문을 자주 받으며, 제 공부의 터전에 위기까지 느끼면서 노력해온 사람들이다.(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