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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이승우 『캉탕』

by 답설재 2019. 1. 7.

 

 

 

 

 

이승우 『캉탕』

현대문학 2018년 11월호

 

 

 

(…) 청춘의 날 같은 것은 그에게 없었다. 허덕이며 20대를 보내고 30대를 보냈다. 그는 미친 것처럼 살아왔다. 그에게 세상은 전쟁터와 같았다.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는 매일 싸워야 했다. 한순간도 마음을 내려놓고 살지 못했다. 세상이 그에게 전쟁을 건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세상을 전쟁터로 만들었다. 그는 평화를 믿지 못하는 자였다. 평화를 바라지 않은 것이 아니라 세상이 평화로울 수가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자였다. 평화를 바라지 않은 것이 아니라 세상이 평화로울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했다. 평화를 공급받은 적이 없는 그는 평화를 누릴 수 없었고 누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평화의 세상, 평화의 시간처럼 보이는 어떤 상태를 그는 가장 불안해했다. 평화는 기만이고 거짓이고 속임수이고 미끼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평화처럼 보일 뿐 평화가 아니었다. 선전포고는 항상 그가 했다. 세상이 그의 선전포고를 받아주지도 않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래서 혼자 치열하게 싸우는 그가 자주 낯설고 공허해지곤 했지만 그는 가진 것이 없으므로 언제나 먼저 싸움을 걸어야 했다. 가진 것이 없는 자가 가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싸움밖에 없었다. 가진 것이 없는 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가진 자는 그 상태를 평화라고 부른다는 것이 그이 인삭이었다. 가진 것이 없는 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가진 자가 자기 것의 일부를 내주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가진 것이 없는 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이 없는 채로 살게 된다는 것을 그의 경험이 가르쳤다. 그러니까 가진 것이 없는 자가 무언가를 가지기 위해서는 가진 자가 하지 않는, 할 필요가 없는, 치열한, 치사한, 때로 공허한 싸움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중수가 그 불리한 전쟁을 치르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따로 없었다. 그의 몸과 정신만이 그에 의해 소집되었다. 그의 몸과 정신은 잔혹하고 제정신이 아닌 상사에 의해 끊임없이 혹사당했다. 눈에 불을 켜고 살았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그에게 해당된다. 그는 세상과 사람을 쏘아보며 살았다. 그는 최전선에서 보초를 서는 초병과 같았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거리의 멀고 가까움을 따지지 않았고 일의 쉽고 어려움을 구별하지 않았다.(205~206)

 

세상과 자아간의 균형이 붕괴된 한중수는, 정신과 의사 J의 충고를 받아들여 J의 외삼촌 핍을 찾아 세상 반대편의 캉탕으로 '후퇴'하지만 핍은 과거에 '홀려' 과거를 살아가는 유령 같은 사람이었다.

한중수는 먼 곳에서 온 선교사 타나엘을 만나 서로 마음을 터놓고 싶어하지만 타나엘은 그의 연인이 살해된 유력한 용의자로서의 자신의 과거를 다 보여주지 않았고, 한중수 자신도 그 선교사에게 복마전 같았던 자신의 과거와 죄의식을 조금만 들려주고 만다.

캉탕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들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유령과 같은 삶을 이어가는 인간들일 뿐이었다.

 

과거는 입이 크다. 입이 큰 과거는 현재를 문다. 때로 어떤 사람에게 이 묾은 치명적이다. 입이 크기 때문이 아니라 이빨이 날카롭기 때문이다. 대개의 경우 이 이빨은 현재가 알지 못하고 추측하지 못하는 이빨이다. 현재는 과거가 제자리에 멈춰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멈춰 있는 것은 과거에 대한 현재의 기억, 혹은 짐작, 혹은 기대이다. 현재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과거는 움직이고 자라고 변하고 그래서 달라진다. 현재를 삼킬 만큼 커지고 현재를 물어 뜯을 만큼 날카로워진다. 현재가 알아보지 못할 만큼 달라진다. 현재를 무는 과거의 이빨은 현재가 기억하지 못하거나 짐작하지 못하는 이빨이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달아났기 때문이고 짐작하지 못하는 것은 인정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과거로부터 달아나는 것이 현재의 숙명이다. 과거로부터 달아나기를 원치 않는 현재는 없다. 과거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현재의 오만이다. 과거의 변신과 보복을 예감하고 대비할 만큼 겸손한 현재는 없다. 과거를 땅속에 묻었다고 안심하지 말라. 관 뚜껑을 열고 나오는 과거는 언제나 더 사납다.(226; 32장 중 24장)

 

그런데 어떻게 우리는 함께 어우러져 웃고 노래하고 춤추고 마시고 먹고 큰소리로 떠들기도 하는가?

 

아는 사람들끼리만 웃고 노래하고 춤추고 마시고 먹고 큰소리로 떠드는 것이 아니었다. 처음 본 사람들끼리는 더 잘 웃고 노래하고 춤추고 마시고 먹고 떠드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 본 사람들끼리 잘 어울리는 것은 그들이 처음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다시 보지 않을 것을 알거나 믿기 때문이다. 유령과 같은, 실체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 사실이 깨달아지자 한중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가 타나엘에게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안전하기 때문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였겠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이제는 꼭 그렇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가 숙여졌다.(228)

(…)

그런데도 한중수는 실은 자기의 모든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그 사실을 안다. 그가 말한 것은 그의 전부가 아니었다. 그는 어머니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빚만 남기고 죽은 노름쟁이 아버지에 대해서는 말했지만 그 아버지를 향한 자신의 증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사람 취급하지 않았던 자신의 스무 살 무렵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229)

 

캉탕축제는 바다의 신에게 바치는 전통 제사의식이다. 축제의 마지막 날에는 방파제에 가설된 아찔할 정도로 높은, 돛대 모양의 탑 위에서 사람들이 뛰어내린다. 바다의 신에게 바치는 이 지역 사람들의 인신 희생 제사의식의 순화된 형태다(152).

그 탑 위에서 뛰어내린 사람들은 헤엄을 치거나 안전요원들이 던지는 튜브를 타고 돌아오지만 타나엘은 나타나지 않았다. 과거에 홀렸기 때문이다.

과거에 묶여 있는 한중수는? 그 이야기는 나와 있지 않았다. 별 필요도 없는 이야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