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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정재승 《열두 발자국》

by 답설재 2018. 12. 21.

정재승 《열두 발자국》

어크로스 2018

 

 

 

 

 

 

 

1

 

'뇌를 연구하는 물리학자'

하는 일이 다양하고 많고 그걸 즐기며 신명나게 지내는 것 같았다.

 

정재승 교수는 매년 10월 마지막 주 토요일 저녁 전국 수십 개 도시에서 과학자들이 동시에 강연을 하는 '10월의 하늘'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고, 카이스트 과학자들과 대전시립미술관이 함께 진행하는 '뇌과학과 예술'이라는 프로젝트도 추진하고 있으며, '백인천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야구학회를 만들어 심포지엄을 여는가 하면, 아프리카에 IT 지원사업을 하고 '미래세대 행복위원회'를 조직하고 건축가들과 함께 스타트업을 만드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373)

 

칼 세이건과 같은 일을 하는 과학자이고 싶어하는 것 같다. 열두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 책에 대해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우리 호모 사피엔스가 지난 수만 년 동안 어떻게 세상에 반응하며 살아왔는지, 천천히 진화하는 부실한 뇌로 이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버텨내고 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현명하고 행복하며 늘 깨어 있는 존재로 살기 위해 어떤 안간힘을 쓰고 있는지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10)

 

 

2

 

그가 교육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은 아주 익숙한 내용이다. 절실하다.

"다들 좀 읽어봐! 이 사람도 이렇게 얘기했잖아! 정말 고마운 얘기로 들리지 않아?"

 

햄릿 증후군이 우리 사회에서 유난히 널리 퍼진 데에는 요즘 아이들이 정답이 있는 문제만 오랫동안 풀어왔기 때문이라는 추론도 가능합니다. 획일화된 교육 속에서 정답을 골라야 한다는 압박을 받으며 컸는데, 사회에 나와 보니 정답이 없는 문제에 직면했을 때 뭘 선택할지 잘 모르겠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이 고통스러울 수 있지요.(77)

 

여러분이 한국에서는 너무나 평범하게 주입받던 생각이 인도네시아에 가면, 혹은 스웨덴에 가면 "와,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생각하지? 매우 창의적이네."라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남들과 다른 경험을 하는 사람이 창의적인 사람이 되는데, 우리나라는 불행하게도 정반대죠. '어떻게 하면 남과 똑같은 경험을 먼저 하느냐'를 중요하게 여기죠. 남들이 다 한 걸 우리 애가 안 하면 불안해하죠. 똑같은 방식으로 교육받기를 원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창의적인 어른으로 성장하려면, 부모는 '어떻게 해야 우리 애가 남과는 다른 경험을 쌓고,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현상을 들여다보는 사람으로 성장할까?'를 고민해야 합니다.(209)

 

 

3

 

같은 얘기이긴 하지만 '교과서', '선행(善行 ×, 先行 ○)', '정답찾기 교육', '경쟁 일변도 교육'에 대한 얘기도 있었습니다.

 

제가 인공지능이 인간의 뇌를 닮아가면서 점점 발전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죠?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대한민국은 지난 70년 동안 인간으로 하여금 인공지능을 흉내 내도록 교육해왔고 평가해왔습니다. 선진국이 만들어낸 지식을 머릿속에 집어넣는 데 급급했고, 학습한 지식을 정확하게 실수 없이 뱉어내게 하는 방식으로 청소년들을 평가했습니다. 같은 교과서로 모두의 머릿속에 같은 내용을 채우는 데 대한민국 전체가 몰두했고, 심지어 '선행'이라는 이름으로 남들보다 먼저 입력하는 데 집집마다 많은 사교육비를 썼습니다.

좋은 질문을 하고 자신만의 답을 만들어내게 하기보다 정답 찾기에 급급했습니다. 이미 선진국들은 좋은 질문을 던지게 하고 자신만의 답을 찾도록 교육하고 있는데, 우리는 시도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교실은 토론이 없는 곳으로 바뀌어가고 있고, 글을 쓰지 않고 숫자를 맞추는데 몰두해왔습니다.

대한민국의 학교는 기계적인 공정함을 가장 중시하고 효율을 중시하는 경쟁 일변도 교육을 제공해왔습니다. 획일화된 정량 평가로 청소년들을 줄 세우고, 대학 입시도 학교와 학생을 한 줄로 세운 후 둘 사이에 짝짓기를 하는 방식으로 치러왔습니다. 학생들에게는 공식 암기와 문제 풀이 중심의 '낮은 수준의 수학 교육', 정해진 틀로 문학을 해석하고 단순하게 문법이나 단어 암기, 독해를 확인하는 '낮은 수준의 언어 교육'을 해온 것이 사실입니다.(241)

 

정재승 교수는 이어서 "나만의 관점에서 논리적으로 해답을 제시하는 능력이 더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 "높은 수준의 수학적 추론" "언어 교육이 곧 사고와 철학 교육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분야 중심이 아닌 문제 중심의 교육으로 옮겨가야 하며, 인간에 대한 다양성을 존중하고 평가하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4

 

이론적 바탕이 없는데도 내내 이런 주장을 하면서 '내가 정말 이 메아리 없는 얘기를 자꾸 해도 될까?' 싶다가 이런 글을 읽으면 위안을 느끼게 된다. 다시 확신을 가지게 되고 용기를 얻는다.

 

인간이 어떻게 의식과 감정, 욕구를 가졌는지는 너무나 고급한 기능이어서 인간조차 어떻게 그 기능을 수행하는지 모릅니다. 컴퓨터에 넣은 기능은 언어나 수학, 다시 말해 최근 1만 년간 발달한 뇌 기능인데요. 이것은 최신 기능이기 때문에 잘 이해되고 있는 걸 컴퓨터에 넣은 거예요. 그런데 의식과 감정은 진화적으로 몇십만 년 동안 서서히 뇌를 바꿔가며 만든 거라 너무 오래됐기 때문에 너무 고등한, 짐작조차 못 하는 것이거든요. 우리 살아생전에 그 기능이 이해돼서 컴퓨터에 들어가는 상황이 온다는 보장이 없어요. 강인공지능이 우리를 위협할 불안 때문에 인공지능 시대를 불안해하는 건 너무 과민 반응 같고요. 오히려 인공지능에게 시키면 웬만한 일은 다 하는 시대에 왜 학교는 우리를 자꾸 인공지능 수준으로 머릿속에 똑같은 것만 넣으려고 하는지, 인공지능에게 우리 뇌를 넣어도 시원찮을 판에 왜 인공지능 대하듯 우리 뇌를 인공지능화하는지, 이것이야말로 현실적으로 우리가 고민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371)

 

읽고 며칠이 지났다. 많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그가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