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보기의 즐거움752 책 고르기 1 "서점에는 책에 등수를 매겨놓은 것 같은 베스트셀러 코너가 있잖아요. 하지만 도서관에선 거의 모든 책이 평등하게 진열되어 있는 것이 마음에 들어요." 일러스트레이터 김한민이 정재승 교수와 대담 중에 한 말이다.1 2 도서관에서는 서점에 들어갔을 때와 뭔가 다른 느낌이 있긴 하다. 책을 고르는 건 서점에서나 도서관에서나 같은 것인데 '이 느낌은 뭐지?' 싶은 것이다. 하긴, 서점에는 보고 싶은 책이 아주 많은 건 사실이지만 내가 고르기 전에는 볼 만한 책일 가능성을 가졌을 뿐이고, 도서관의 책들은, 사서가 어떤 검정을 거쳐서 그렇게 비치했을 것이라는 신뢰 같은 걸 책마다 한껏 풍기고 있는 것이다. 그 막연한 느낌을 더 파고들진 않았었는데 저 말을 발견한 것이다. '정말 그래!' 평등! 3 평등? 대체로.. 2018. 12. 18. 루스 렌델(소설)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 The New Girlfriend 루스 렌델 소설(단편), 홍성영 옮김, 봄아필, 2015. 1 "지난번 우리가 했던 일 기억해?" 데이비드가 물었다. 크리스틴은 몇 주 동안 그 질문을 기다려 오던 참이었다. "응, 그런데?" "네가 다시 하고 싶어 하는지 궁금했거든." 그녀는 그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너무 민감해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안 될 것 없지." "그럼 금요일 오후 어때? 난 휴무이고 앤지는 금요일이면 여동생 집에 가거든." "매주 금요일마다 가는 건 아니야, 데이비드." 그녀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도 약간 따라 웃었다. "아무튼 이번 주는 갈 거야. 네 차로 올 수 있어? 앤지가 우리 차를 몰고 갈 거라서." "좋아. 2시쯤 갈까?" "차고 문을 열어 둘 테니.. 2018. 12. 11. 왕수이자오 《소동파 평전》 중국의 문호 소식蘇軾의 삶과 문학 《소동파 평전 蘇東坡評傳》 왕수이자오 지음 조규백 옮김, 돌베게 2013 1 '적벽부(赤壁賦)'를 보고 싶었습니다. 그 적벽부를 읽으면 나도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라고 오랫동안 생각해왔습니다. 그렇지만 마침내 읽게 된 적벽부는 나를 울리지는 않았습니다. 임술년1 가을 음력 7월 16일에 소자蘇子가 손님과 더불어 배 띄우고 적벽 아래에서 노닐었네.(169) 그렇게 시작되는 그 긴 부(賦)의 어느 곳에서, 선친은 눈물을 흘리셨을까? 그 얘기를 듣던 육십여 년 전 어느 겨울밤을 그려보았습니다. (……) 진실로 일세의 영웅인데 지금은 어디 가고 없는가? 하물며 나와 그대는 강가에서 고기 잡고 땔나무 하며 물고기 새우와 벗하고 고라니 사슴과 친구 삼아 일엽편주에 몸을 싣고 표주박.. 2018. 12. 5. 최인훈 《구운몽》 최인훈 《구운몽》 문학과지성사 1996(3판12쇄) 민. 얼마나 오랜만에 불러보는 이름입니까? 저를 너무 꾸짖지 마세요. 지금의 저는 민을 보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돌아오는 일요일 아세아극장 앞 '미궁' 다방에서 기다리겠어요. 1시에서 1시 30분까지. 모든 얘기 만나서 드리기로 하고 이만. 민, 꼭 오셔야 해요.(195) 사라졌던 연인이 남긴 편지를 읽으면서부터 민은 끝없는 '미궁'을 헤맨다. 그를 쫓는 사람들을 피하려고 갖은 애를 쓴다. 그 '여로'가 김만중의 『구운몽』을 연상하게 한다. 그러니까 이 '서사시'는 사랑이 주제다. 몽환적이다. 그게 참 좋아서 서사시를 읽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시작된다. 관(棺) 속에 누워 있다. 미이라. 관 속은 태(胎) 집보다 어둡다. 그리고 춥다. 그는 하릴없이 뻔.. 2018. 11. 28. 최인훈 《광장》 최인훈 《광장》 문학과지성사 1996 서 문 '메시아'가 왔다는 이천 년래의 풍문이 있습니다. 신이 죽었다는 풍문이 있습니다. 신이 부활했다는 풍문도 있습니다. 코뮤니즘이 세계를 구하리라는 풍문도 있습니다. 우리는 참 많은 풍문 속에 삽니다. 풍문의 지층은 두텁고 무겁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고 부르고 문화라고 부릅니다. 인생을 풍문 듣듯 산다는 건 슬픈 일입니다. 풍문에 만족지 않고 현장을 찾아갈 때 우리는 운명을 만납니다. 운명을 만나는 자리를 광장이라고 합시다. 광장에 대한 풍문도 구구합니다. 제가 여기 전하는 것은 풍문에 만족지 못하고 현장에 있으려고 한 우리 친구의 얘깁니다. (……) (『새벽』, 1960년 10월) 1961년판 서문 인간은 광장에 나서지 않고는 살지 못한다. 표범의 가죽으로.. 2018. 11. 26.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Ⅱ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Ⅱ 이창신 옮김, 김영사, 2010 1 2011년 1월엔가 EBS에서 마이클 샌델 교수의 강의를 방송했습니다. 12강을 다 들을 수가 없어서 CD를 구입했는데 그걸 교단(敎壇)에 선 아이에게 선물했습니다. 꼭 보게 하고 싶었습니다. 2 어느 날, 교육학자 두엇과 식사를 하며 학생들이 교수의 농담까지 다 받아쓴다는 대학 강의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하버드대학 마이클 샌델은 강당에 천여 명을 모아놓고도 토론을 전개하더라고 했더니 교육학 전공 교수가 당장 이의제기를 했습니다. 우리는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이클 샌델은 학생들에게 사전에 책을 여러 권 읽게 하고, 강의를 위한 과제(질문, 의문)를 내고, 몇 명의 조교가 그 과제를 점검해서 강의 시간에 발표를 할 학생을.. 2018. 11. 14.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JUSTICE》 《JUSTICE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Michael J. Sandel 이창신 옮김, 김영사, 2010 1 몇 년 전에 이미 200만 부가 팔렸다고 했다. 정의를 그리워하는, 정의를 구현해보고 싶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정의를 보고 싶은 열망의 지표였을까? 좀 읽어보고는 정의란 그리 편하게 읽을 수는 없는 것이구나 했을 사람, 나중에 다시 읽을까 생각한 사람도 있었을 것 같았다. 읽은 사람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래, 정의란 바로 이거야!'(?) 글쎄……. 붉은꼬리원숭이처럼, 침팬지처럼도 살았을 저 아득한 옛날부터 힘센 것들이 약한 것들을 꼼짝 못하게 억눌러온 것은 정의가 아닐까? 그쪽에서 보면 엄연한 정의겠지? 정의가 아니라면 그런 행태는 당연히 벌써 사라졌어야 하겠지? 힘이 약한 원시인이 꽥.. 2018. 11. 12. 김형철 《최고의 선택》 어느 철학자의 질문수업 김형철 《최고의 선택》 리더스북, 2018 1 함장은 취임하자마자 승무원 300명을 한 명씩 불러들여 세 가지 질문에 답을 쓰게 했답니다. · 자네가 만족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 불만족스러운 점은 무엇인가? · 자네에게 권한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 그렇게 해놓고, 300명 전원을 일대일로 면담한 다음, 누가 어떤 제안을 했는지 함장 자신과 그 승무원만 하는 비밀에 붙이고 멋진 소통을 했답니다.(210~211) 2 회의 중엔 묵묵부답 침묵을 지키고는 회의가 끝나면 아우성인 현상은, 꼭꼭 숨어 있는 소수의 목소리를 끄집어낼 수 있는 리더의 섬세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증거인데, 인텔의 앤디 그로브 회장은 중요한 결정을 일방적으로 통보하지 않고 반드시 전 직원에게 공지한 .. 2018. 11. 4. 책과 함께 있기 책과 함께 있기 라스코 동굴 벽화(부분) (…) 이렇게 많고 다양한 동물과 크고 작은 것이 섞여 있는 스케일의 그림을, 그것도 암흑 속에서 작은 등불 빛에만 의존하여 그렸다는 사실은 실로 믿기 어려운 위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혼자가 아니라 몇 명의 사람이 오랜 시간에 걸쳐서 그.. 2018. 10. 31. 커트 보니것 《나라 없는 사람 A Man without a Country》 커트 보니것 Kurt Vonnegut 《나라 없는 사람 A Man without a Country》 김한영 옮김. 문학동네 2007 1 가끔 나도 다시 책을 내볼까 생각하지만 이런 책을 보면 금방 절망감을 느낀다. 생각조차 집어치워야 한다는 걸 또 실감한다. 이 책 저 책 읽고 싶은 책을 마구잡이로 읽어대는 이 꼴이 그나마 다행이구나 생각하게 된다. 지금까지 이런 작가를 모르고 있었다는 것도 절망스럽다. 그의 농담이란 것이 놀랍다. 이렇게 쓰지 못하겠다면 무슨 얘기를 쓰겠나 싶은 것이다. 아주 간단한 농담이라도 그 근원에는 두려움의 가시가 감춰져 있다. 예를 들어 "새똥 속에 든 흰 것이 무엇일까요?"라고 질문을 던지면 방청객들은 그 순간 학교에서 시험이라도 보는 양 바보 같은 대답을 해선 안 된다는 두.. 2018. 10. 28. 파스칼 메르시어 《리스본행 야간열차》 《리스본행 야간열차》 파스칼 메르시어|전은경 옮김, 들녘 2014 1 라틴어, 헤브라이어, 그리스어에 능통한 교사 라이문트 그레고리우스(57)는 한때 제자였던 젊은 아내와 이혼하고 혼자 살고 있습니다. 책 읽기와 고전문헌학이 전부인 그는 해박한 지식으로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습니다. 그런 그가 비 내리는 날 아침 출근길에 키르헨펠트 다리 위에서 한 포르투갈 여인을 만납니다. 신비감을 품은 그 여인은 자살을 시도한 직후였습니다. "모국어가 뭐지요?" 그는 조금 전에 이렇게 물었다. "포르투게스(Portugués)." '오'는 '우'처럼 들렸고, 올리면서 기묘하게 누른 '에'는 밝은 소리를 냈다. 끝의 무성음 '스'는 실제보다 더 길게 올려 멜로디처럼 들렸다. 하루 종일이라도 이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 2018. 10. 17. 장 그르니에 《지중해의 영감》 장 그르니에 《지중해의 영감》 김화영 옮김, 이른비 2018 레탕의 산책길에서 나는 자주 뱃머리에 조가비가 박힌, 그 뒤집힌 나룻배의 빛나는 존재에서 위안을 얻곤 했다. 나는 무용한 작업의 시간들을, 생산적인 게으름의 시간들을, 배움에 바쳐야 했을 시간들을, 그리고 망각에 기울여야 했을 시간들을 생각했다.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알 수 없다면 행동하는 것과 아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하나씩 하나씩 쌓아올린 지식들이 오히려 우리 눈앞의 진정한 지식을 가린다.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무용한 것을 배우고 우리와 관계없는 '뉴스'들을 알게 된다. 자기 안에 오래 지속하는 어떤 존재를 품고 있으면서 우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에만 관심을 가진다니,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25~26) 1990년대 초에 번역되었던 『시지프.. 2018. 10. 5. 이전 1 ··· 28 29 30 31 32 33 34 ··· 6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