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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이야기

장 그르니에 《지중해의 영감》

by 답설재 2018. 10. 5.

장 그르니에 《지중해의 영감

김화영 옮김, 이른비 2018

 

 

 

 

 

 

 

레탕의 산책길에서 나는 자주 뱃머리에 조가비가 박힌, 그 뒤집힌 나룻배의 빛나는 존재에서 위안을 얻곤 했다. 나는 무용한 작업의 시간들을, 생산적인 게으름의 시간들을, 배움에 바쳐야 했을 시간들을, 그리고 망각에 기울여야 했을 시간들을 생각했다.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알 수 없다면 행동하는 것과 아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하나씩 하나씩 쌓아올린 지식들이 오히려 우리 눈앞의 진정한 지식을 가린다.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무용한 것을 배우고 우리와 관계없는 '뉴스'들을 알게 된다. 자기 안에 오래 지속하는 어떤 존재를 품고 있으면서 우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에만 관심을 가진다니,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25~26)

 

 

1990년대 초에 번역되었던 『시지프 신화』(알베르 카뮈, 육문사) 뒷편에 부록으로 실린 에세이를 읽는 느낌이었습니다. 장 그르니에는 카뮈에게 문체까지 고스란히 전달될 만큼 지대한 영향을 미친 스승이었다는 것이 부러웠습니다.

 

다만 내 독서력은 근 삼십 년 전 그 시절이나 오늘이나 다름 없어서 이 번역본을 힘들여 읽어야 한다는 게 한심했습니다. 굳이 따지면 부록으로 붙은 두어 편의 에세이를 서너 번 반복해 읽던 그때가 지금보다는 차라리 더 좋았습니다.

 

때로는 즐겁게, 때로는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런 부분도 보였습니다. '시대를 통틀어 그리스의 가장 큰 매력, 그 무궁무진한 매력은 단순소박함에 있다'는 글의 일부입니다.

 

 

시대를 통틀어 그리스의 가장 큰 매력, 그 무궁무진한 매력은 단순 소박함에 있다. 그리스는 오직 유혹의 부재를 통해서만 사람들의 마음에 들고자 한다. 유혹한다는 것은 정도正道에서 벗어난 쪽으로 끌어당기는 것인데 그리스는 오로지 우리를 정도 쪽으로 되돌리려고 애쓴다. 베데크 씨는 그리스 농부들의 삶에 대하여 예의 정곡을 찌르는 말솜씨로 이렇게 요약한 바 있다. "커피와 담배가 그들의 유일한 낙이다. 이혼은 극히 드물어서 간통의 경우에만 성립되는데 그 역시 거의 없는 일이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커피와 담배 같은 그 순수한 즐거움조차 모르고 살았다. 포도주를 마시는 즐거움이 있긴 했지만 그것도 보관상의 목적으로 소금을 치거나 송진을 첨가한(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결과 맛이 고약했다. 그들은 또한 오늘날의 사람들이 그렇듯 정치와 다른 도박에 열을 올렸다. 안락함이라곤 몰랐다.―그리고 사치라는 건 있다고 해도 오직 공적인 생활에 국한되었다. 바로 체육장, 아고라, 신전들에 사치를 부렸지만 그마저 외적의 침입으로 파괴되었다. 개인들의 생활은 예전 그대로 계속되어야 했다.

분명 한 세기 전의 사람들은 무너진 집들, 더러운 골목들, 그리고 아크로폴리스 위의 신전들 자리에 들어선 병영들을 보았을 때 과연 거기가 아테네가 맞는지 의심했을 것이다. 물론 틀림없는 아테네였다. 그곳 주민들은 변하긴 했어도 여전히 같은 풍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 삶의 소박함을 대하면 얼마나 마음이 편안해지는가! 우리는 얼마나 많은 불필요한 것들을 걸치고 다니는가! 그것들은 구겨진 외투자락처럼 스스로 지탱하지 못하고 자꾸만 힘없이 축 늘어진다.

라마르틴이 지적한 한 마디는 사실 그대로이기에 인상적이다. 그는 로도스 섬의 여자들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유럽 여자들의 피곤에 지친 얼굴과 애써 가다듬고 긴장한 모습에 익숙한 유럽 남자들로서는……드디어 채석장에서 막 캐낸 대리석처럼 단순하고 순수하고 고요한 얼굴들을 보게 되면 기분이 좋아진다. 얼굴에는 오직 하나의 표정만이 나타났으니, 곧 평온함과 정다움이다. 우리의 눈은 멋들어진 호화 장정의 책에 대분자로 찍힌 글자들만큼이나 빠르고 쉽게 그 얼굴 표정을 읽어낼 수 있다."(162~164)

 

 

다 이해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 에세이는 특히 그런 경우였습니다. 읽는 내내 자책감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찬사 일색은 아니라 해도 지중해 연안의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그리스 등을 소재로 한 이 지성적이고 서정적인 에세이에서 어떤 주제가 떠오를 때마다 옮겨놓고 싶은 부분들을 찾고 싶을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 저마다에게는 행복을 위하여 미리부터 정해진 장소들이, 활짝 피어날 수 있고 단순한 삶의 즐거움을 넘어 황홀에 가까운 어떤 기쁨을 맛볼 수 있는 풍경들이 존재한다. 플로베르는 그 기쁨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나는 가끔 삶을 초월하는 어떤 영혼의 상태를 맛본 적이 있다. 그 상태에서 보면 영광이란 아무 것도 아닐 것 같고, 행복 그 자체도 거기서는 부질없을 것 같다."

 

지중해는 그런 영혼의 상태를 영감 靈感처럼 불어넣어줄 수 있다. (……) (20,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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