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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그레구아르 들라쿠르 《행복만을 보았다》

by 답설재 2018. 8. 30.

《행복만을 보았다》 On ne voyait que le bonheur

그레구아르 들라쿠르 지음

이선민 옮김, 문학테라피 2015

 

 

 

 

 

 

 

1

 

되는 일이 없습니다. 아내는 함께 일하는 사내와 바람을 피고, 아버지는 병들었고 짐스럽고, 괜히 잘하는 척하다가 직장(보험회사)에서 쫓겨나고…… 총을 구해 딸부터 쏘았는데 얼굴 반쪽이 날아갔지만 다행히 죽지는 않았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그는 멀리 멕시코 해안에서 어느 외로운 모자(母子)를 만나 행복해지는데 아버지에 대한 미움을 극복한 딸이 그를 찾아옵니다.

 

 

2

 

제목만 보고는 무슨 생활철학 얘긴 줄 알았습니다.

첫 부분입니다. 인생이란 결국 별 수 없다는 건지…….

 

한 사람 목숨의 가치는 대개 3만에서 4만 유로 사이를 오간다. 나는 그 가치를 매기는 일을 했다.

 

한 사람 인생이란. 10센티미터 정도 되는 자궁 경부, 짧은 숨결, 탄생, 피, 눈물, 기쁨, 고통, 첫 목욕, 젖니, 첫걸음마. 그리고 처음으로 내뱉는 말, 자전거 추락, 교정기, 파상풍 걱정, 서투른 짓, 친구, 휴가, 고양이 털 알레르기, 투정, 단것, 충치, 첫 거짓말, 째려보기, 웃음, 감탄, 성홍열, 가냘프고 홀쭉한 몸, 지나치게 커다란 귀, 변성기, 발기, 단짝, 여자 친구, 여드름 짜기, 배신, 선행, 새상을 바꾸고 얼빠진 놈을 모조리 죽이고 싶다는 열망, 숙취, 면도 거품, 사랑의 슬픔, 사랑, 죽고 싶은 마음, 바칼로레아, 대학, 레몽 라디게, 롤링스톤스, 록, 트리클로로에틸렌, 호기심, 첫 직장, 첫 월급, 첫 월급 기념 술 파티, 약혼, 결혼, 배우자의 첫 바람, 새로운 사랑, 갈구하는 사랑, 인생의 낙, 소소한 애정에 대한 중독, 지난 시간에 대한 추억, 갑자기 쏜살같이 흐르는 시간, 우측 폐 염증, 아침에 소변 볼 때마다 느껴지는 통증, 피부, 피부 결, 점, 불안, 절약, 열정, (어른이 되었을 때나, 다시 둘이 되었을 때와 같은) 다음을 위한 계획, 여행, 푸른 바다, 멕시코 혹은 또 다른 어딘가에 있는 발음하기도 어려운 이름의 호텔 바에서 마시는 블러드앤드샌드 한 잔, 미소, 새로 깔아놓은 침대 시트, 고유의 향기, 재회, 삐걱거리는 섹스, 비석……. 대략 이 정도.

이미 나이가 든 목숨이라면 3만에서 4만 유로를 오가고, 만약 어린아이라면 2만에서 2만 5,000유로 사이.

만약 227명의 다른 목숨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추락한다면 10만 유로 추가.

 

그렇다면 우리 인생의 가치는 얼마일까?(8~9)

 

 

3

 

앙투안은 기본적으로 용기도 없고 비겁한 사람이라고 자책하고, 주변 사람들을 원망하고 원망하고 원망하고, 멋지게 살아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고 누누히 설명합니다.

이렇게 고백하기도 합니다.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는 건 쉽지가 않아요. 죽어가고 계시죠. 암이요. 결장암, 간암. 마지막으로 뵀을 땐 폐에도 전이된 것 같다고 했어요. 이젠 어쩔 수 없는 상황인데도 아버지는 모르는 척하세요. 새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거겠지만, 무엇보다 괜히 애쓰고 싶지 않으신 거겠죠. 전 아버지 일로 슬픈 것 같진 않아요. 어머니 일에는 슬퍼했죠.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땐 마음이 무너졌어요. 어머니의 죽음에 화가 치밀어 올랐죠. 레옹이 태어난 해였고, 나탈리가 또다시 바람을 피웠던 때이기도 했어요. 갑자기 고아가 된 기분이었죠. 환멸을 느꼈어요. 마음뿐 아니라 내 몸뚱이에도 말이에요. 내 몸에서 냄새가 나는 것 같았어요. 똥이 되고 말았죠.

사람들이 날 떠났어요. 세상 사람 모두가 날 떠났어요. 그리고 레옹은 날 필요로 하지 않았어요. (…)"(166)

 

어머니의 냄새가 나지 않는 곳에서, 어머니의 품이 아닌 곳에서, 결핍 속에서, 허전함에 마음의 상처를 입으면서 컸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는 혼자 있을 때 이따금 자신은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본 적이 없다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초록 눈만 가지고 되는 건 아냐. 빠져들기는커녕 오히려 약간 무섭기까지 하니 말이다."

그 와중에 쌍둥이 여동생 중 한 명이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는 떠나버렸던 것인데 젊은시절에는 묻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던 아버지마저 암에 걸렸고, 그 옆에는 한 시도 쉬지 않고 중간에 숨도 쉬지 않고 얘기를 해대는 새어머니가 있습니다.

 

이번에는 "열정적이고 사랑에 굶주린 여자"인 아내 나탈리가 가정에 관심이 없어집니다. 게다가 실수로 직장을 잃게 되어 더 이상 어마어마한 부양비를 댈 수도 없게 되자 나탈리는 마구 욕을 해대고 그 아트디렉터가 영웅 같은 존재가 됩니다. "(…) 이젠 끝났어. 고집부려도 안 될 때가 있는 거야."

 

더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사랑하는 딸 조세핀을 총으로 쏘았습니다.

 

 

4

 

앙투안은 40년을 침묵 속에서 지냈다고 생각합니다.

흰색과 차가움, 냉혹함, 쇠창살을 견뎌낸 그는 지금 프랑스를 떠나 멕시코 서안에 위치한 어느 호텔에서 청소를 합니다.

 

괴물이었던 난 친절하고 예의 바르고 인상 좋은 이웃이 되었다. 과거는 베일에 싸인 남자, 절대 악의적인 말을 하지 않고, 의심의 눈초리 한 번 보내지 않는 남자, 항상 쓰레기를 분리수거 하고, 단 한 번도 바닥에 담배꽁초를 버리는 일이 없는 남자, 그렇지만 아내에게 버림받고, 부정을 저질러 회사에서 해고된 남자, 남자의 아버지는 불구자 비슷한 사람이고, 어머니는 불쌍한 처지로 살다가 죽었다. 그 남자는 어머니를 버렸다.

나는 딸한테 몹쓸 짓을 하고 어린 아들한테까지도 몹쓸 짓을 하려고 했던 아빠였다. 하지만 내 손이 흔들렸다.(159)

 

그런 앙투안이 그곳에서 상처 입은 여인 마틸다와 그녀의 아들 아르히날도를 만나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마틸다는 온화하지만 우울하고 체념한 듯한 표정의 여인이었는데 드러내거나 내비치기를 기피하는 그녀도 앙투안을 만나 마음을 열었습니다.

 

 

5

 

이번에는 아빠의 총을 맞아 얼굴의 반이나 잃었던 조세핀의 이야기입니다.

그녀에게 총을 쏜 아빠를 당연히 "인간 말종" "더러운 개자식" "흉악한 암퇘지" "뱀파이어 개자식" "미친 놈" "인간쓰레기" "개자식" 등으로 부르면서 정신과 치료를 받습니다.

아빠가 자신에게 총을 쏜 이유에 대해 두고두고 생각합니다.

 

'단지 정면을 향해 쏘았다.'

→ '레옹을 먼저 쏘면 그 소리에 내가 깰까 봐 무서워서, 내가 그 모습을 목격하고 더 이상 자기를 사랑하지 않을까 두려워서.'

→ '여자들은 자기를 두렵게 하는 존재였기 때문에.'

→ '마지막 순간에 생각을 바꾼 거라면 아무래도 레옹을 자기 곁에 두는 게 더 좋아서.'

→ '내가 동생보다 좀 더 살았으니까, 동생이 좀 더 사는 게 맞는 것 같아서.'

→ '날 지나치게 사랑해서.'

→ '멋진 아빠라는 얘기를 하지 않아서.'

 

 

6

 

그렇다고 조세핀이 엄마쪽을 사랑한 건 아니었습니다. 프랑스 소설답게 흔히 이런 문장도 보였습니다.

 

엄마랑 아저씨는 집에 있을 때 시도 때도 없이 입을 맞췄어요. 아저씨가 엄마 엉덩이를 만지면 엄마는 까르르거리며 몸을 비비 꼬아댔고요. 서로 사랑하고 원하는 사이인 척했죠. 한번은 아저씨가 엄마를 오토바이에 태워서 데리고 나갔다가, 엄마가 포르노 영화에서 나올 법한 소리를 내며 잔뜩 흥분한 상태로 돌아온 적이 있었어요. 그 모습을 본 레옹은 눈물을 터뜨렸고, 아저씨는 레옹을 달래기 바빴죠. 걱정 마, 나한테 오토바이 단짝은 너뿐이야. 그러고는 둘이서 오토바이를 타고 드라이브를 나갔어요.(255~256)

 

엄마는 지금껏 자기 자신만 바라보았잖아요. 맨날 눈가의 주름만 들여다보고, 혹시 똥배가 나온 건 아닌지 걱정하기에 바빴잖아요. 날이 갈수록 엄마는 미쳐갔어요. 세월을 흘려보내며 낭비한 거죠.(287)

 

 

7

 

조세핀이 아빠를 이해할 준비가 시작될 즈음 고모가 할머니로부터 받은 사진을 보여줍니다.

 

조세핀, 이건 행복이 존재한다는 걸, 행복은 분명 어딘가에 존재했다는 걸 말해주는 선물이란다.

봉투 안에는 사진이 두 장 들어 있었다. (…) 두 번째 사진은 즉석 증명사진으로, 사진 속에는 여섯 살 난 어린 소년이 있었다. 단정히 머리를 빗고 흰 셔츠를 입은 모습이었다. 오빠가 유도 수업 등록 서류에 붙이려고 찍은 사진이었는데, 정작 유도 수업은 잠깐 듣고 말았지 아마, 고모가 사진을 보며 설명을 덧붙였다. 이 사진을 찍은 날이 자기 인생에서 가장 멋진 날이었다고 하더구나. 사진을 찍은 다음, 아빠는 할머니랑 영화관에 갔고, 콘아이스크림도 사먹었다고 했다.

그날은 아빠의 엄마가 영화 보는 내내 아빠한테 손을 내민 날이었다. 아빠 인생에서 가장 멋진 날.(283~284)

 

조세핀은 어느 봄날 이 사진을 보았고, 그해 크리스마스에 마침내 멕시코 해변에서 마틸다 모자와 함께 앉아 있는 아빠에게 다가갔습니다.

 

갑자기 눈물이 차올라요. 저 목, 저 등, 앉아 있는 저 실루엣, 왠지 익숙해요. 저녁마다 내 침대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헨젤과 그레텔〉을 읽어줄 때도 저 모습이었는데. 소리치고 싶어요. 달려가고 싶어요. 그런데 나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요.(…) 그들 곁으로 다가가 아빠 옆에 앉았어요. 아빠는 놀라지 않네요. 그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봐요. 멋져요. 내게 미소를 지어 보여요. 세월이 흘렀죠. 아빠가 손을 들어 내 어깨에 올려놓더니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어깨를 감싸요. 눈물을 흘리네요.(…)(293~294)

 

온갖 설명에도 불구하고, 삶에 자신감을 잃었다고 해서 자식부터 죽이려든 것도 그렇고, 감옥에서 나온 후 멕시코로 건너가 엉뚱한 모자에게서 느낀 정서로부터 행복을 찾는 것도 그렇고, 그런 아빠를 찾아 멕시코를 찾아가 그 모자와 함께하고 있는 아빠에게 다가가는 것도 그렇고…….

 

우리의 삶은 소설이 아니어서 상식으로는 얼른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지만, 워낙 섬세한 묘사 때문인지 소설을 읽을 때는 그럴 수도 있나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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