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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릴리아 《파랑오리》

by 답설재 2018. 8. 10.

릴리아《파랑오리》

킨더랜드 2018

 

 



 

 

1

 

우리 동네 도서관 유아실 옆에 전시되어 있는 그림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파랑 오리의 기억들이 조금씩 도망가기 시작했어요."

 

나도, 더러 내 기억이 도망가기 시작한 것 같고, 나는 일체 내색을 하지 않고 있긴 하지만 내 짝의 기억들도 도망가기 시작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의 기억은 수십 년 전부터의 모든 것들이 바로 어제 일들처럼 생생해서 들을 때마다 내 피부를 바늘로 콕 콕 찌르는 것 같았는데, 언제부터인지 '저 사람이 오늘은 왜 저러지?' 싶었고, 그게 한두 번이 아닌 것 같았고, 정신 차려 들어보니까 아무래도 두서가 좀 없어진 것 같았습니다.

 

나는 그가 그렇게 수십 년 전 일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언제나 못마땅했습니다.

피부를 바늘로 콕 콕 찌르듯 하는 걸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그렇지 않게 되니까 이번에는 안타깝고 아쉽고 섭섭했습니다.

그 얘기들을 어디에 적어놓긴 해서 다행이지만, 그래도 많이 미안하게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2

 

이게 무슨 그림인가 싶어 유아실 쪽으로 돌아가 보았더니 게시판이 보였습니다.

이런 얘기가 적혀 있었습니다.

 

연못에서 아기 우는 소리를 듣고 잠시 돌보다 돌아서려는 오리에게 아기 악어가 부르는 "엄마!"라는 말에 둘은 가족이 됩니다. 아기 악어는 파랑 오리가 가는 곳이라면 항상 졸졸 따라다닙니다. 파랑 오리는 늘 아기 악어를 지켜줍니다. 여느 엄마처럼 깨끗이 씻겨 주고, 물을 무서워하는 악어에게 수영하는 법도 가르쳐 주지요. 둘은 때때로 파란 연못에 누워 낮잠을 자기도 합니다. 아기 악어가 자라는 모습을 보며 엄마가 된 파랑 오리는 행복해합니다. 악어는 쑥쑥 자라, 이제 엄마를 위해 꽃을 따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엄마보다 훨씬 큰 악어로 성장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부터 파랑 오리의 기억들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파랑 오리가 악어를 기억하지 못하는 날이 늘었지만 악어는 서운하지 않았지요. 이제 악어는 자신이 어렸을 때처럼 파랑 오리를 돌봅니다. 파랑 오리의 기억은 사라지더라도 둘의 마음속에는 사라지지 않는 그 무엇이 남아있습니다.

 

 

 

 

 

 

 

 

 

 

3

 

물론 다 잊어버리고 살고 싶을 때가 없진 않지만, 악몽 같은 일들일 지언정 우리는 우리의 기억들을 잃기 싫습니다. 누구라도 그럴 것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저 악어만도 못한 것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내가 언제 당신의 신세를 졌지?"

"나는 신세는 조금만 지고 도와준 일은 더 많아! 난 내 힘만으로 어려운 고비를 다 넘겼어!"

…………

 

사람들도 최소한 저 악어처럼은 살아야 할 것입니다.

아니, 저 이야기는 악어들에게 한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들 들어라고 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릴리아는 우리에게,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서 유아들에게 이 이야기를 읽어주면서 좀 깨닫도록 해주려고 이 책을 지었구나 싶었습니다.

인간들이 악어처럼 살면 좋겠다고, 저 예쁜 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