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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커트 보니것 《나라 없는 사람 A Man without a Country》

by 답설재 2018. 10. 28.

 

커트 보니것 Kurt Vonnegut

《나라 없는 사람 A Man without a Country

김한영 옮김. 문학동네 2007

 

 

 

 

 

 

1

 

가끔 나도 다시 책을 내볼까 생각하지만 이런 책을 보면 금방 절망감을 느낀다. 생각조차 집어치워야 한다는 걸 또 실감한다. 이 책 저 책 읽고 싶은 책을 마구잡이로 읽어대는 이 꼴이 그나마 다행이구나 생각하게 된다.

지금까지 이런 작가를 모르고 있었다는 것도 절망스럽다.

 

그의 농담이란 것이 놀랍다. 이렇게 쓰지 못하겠다면 무슨 얘기를 쓰겠나 싶은 것이다.

 

아주 간단한 농담이라도 그 근원에는 두려움의 가시가 감춰져 있다. 예를 들어 "새똥 속에 든 흰 것이 무엇일까요?"라고 질문을 던지면 방청객들은 그 순간 학교에서 시험이라도 보는 양 바보 같은 대답을 해선 안 된다는 두려움에 빠진다. "그것도 새똥이죠"라는 답을 들으면 반사적인 두려움은 웃음으로 바뀐다. 그건 결국 시험이 아니었던 게다.(14)

 

나는 또한 프랑스 철학자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Democracy in America』를 읽지 않은 이를 얼간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의 정치체제에만 존재하는 장점과 단점을 다룬 책으로 이보다 훌륭한 작품이 또 있을까?

그 위대한 책을 한 구절만 음미해보자. 토크빌은 지금으로부터 백육십구 년 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구상의 모든 나라 중 우리 미국에서만 돈에 대한 애착이 인간에 대한 애정을 압도한다고. 지금이라도 달라진 게 있을까?(18)

 

 

2

 

'이게 누구지?'

작가 프로필을 꼼꼼히 읽어보았다.

 

미국 최고의 풍자가이자 휴머니스트이며,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 1922년 11월 11일 인디애나폴리스에서 독일계 이민자인 건축가 거트 보니것 시니어와 이디스 보니것 사이에서 태어났고, 2007년 4월 11일에 세상을 떠났다. 블랙유머의 대가 마크 트웨인의 계승자로, 리처드 브라우티건, 무라카미 하루키, 더글라스 애덤스 등 많은 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과학과 미술에 재능이 뛰어난 독특하고 자유로운 분위기의 대가족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독특한 유머감각을 키웠다. 청년기에는 코넬 대학, 테네시 대학 등을 오가며 공학자와 작가 중 어느 쪽을 선택할지 고민하다 1943년 2차대전 막바지에 징집된다. 전선에서 낙오하여 드레스덴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는 동안, 그곳에서는 히로시마 원폭에 버금가는 인류 최대의 학살극이 벌어진다. 연합군이 사흘 밤낮으로 소이탄을 퍼부어 도시를 용광로로 만들고, 십삼만 명의 시민들이 몰살당했던 이 체험을 통해 그는 미국을 대표하는 반전 작가로 거듭난다.

미국으로 돌아와 소방수, 영어교사, 사브 자동차 외판원 등의 직업을 전전하며 글쓰기를 계속했으며, 1952년 첫 장편소설 『자동 피아노』를 출간했다. 이후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 씨』 『태초의 밤』 『고양이 요람』 『제5도살장』 『타이탄의 미녀』 『챔피언들의 아침 식사』 『제일버드』 『갈라파고스』 등 장르의 경계를 허무는 포스트모던한 소설과 풍자적 산문집 『신의 축복이 있기를, 닥터 키보키언』 등을 발표하여 전세계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1997년 『타임퀘이크』 발표 이후 소설가로서 은퇴를 선언했으며, 회고록 『나라 없는 사람』은 그가 남긴 마지막 책이다.

작가에 관한 더 자세한 정보와 그가 남긴 삽화들은 공식사이트 www.vonnegut.com에서 만날 수 있다.

 

 

3

 

인류의 위대한 문학은 모두 인간이란 얼마나 허접한 존재인가를 다룬다(이런 얘기를 남의 입으로 듣다니 퍽 다행스럽지 않은가?)면서 예로 든 작품들이다.(18)

 

『백경』

『허클베리 핀』

『무기여 잘 있거라』

『주홍 글씨』

『붉은 무공 훈장』

『일리어드』와 『오디세이』

『죄와 벌』

『성서』

『라이트 연대의 공격』(크리미아 전쟁 때, 적군에게 무모하게 돌진하여 최후를 맞은 라이트 연대에 바친 알프레드 테니슨의 시)

 

나는 그런 줄도 모른 채 읽었고, 아직 읽지 않은 책은 또 그렇게 읽을 것이 분명하다.

 

 

4

 

화석 연료로 지구를 망치고 있는 인류에 대하여.

 

이와 같은 종말은 대체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어떤 사람들은 아담과 이브가 함정수사에 걸려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프로메테우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는 하늘과 땅의 아들인 티탄 중 하나였는데 어느 날 제우스의 불을 훔쳐 인간에게 갖다주었다. 노한 신들은 그를 발가벗긴 채 바위에 묶고 등을 드러내 독수리들로 하여금 간을 쪼아먹게 했다. 자식을 곱게 키우면 사고를 치는 법이다.

이제 신들의 결정이 옳았다는 게 명백해졌다. 우리의 사촌인 고릴라, 오랑우탄, 침팬지, 긴팔원숭이는 아주 먼 옛날부터 온갖 야채를 날로 먹고도 아무 탈 없이 잘 살고 있는데 우리 인간은 음식을 뜨겁게 데우는 것도 모자라 화석연료를 가지고 열역학 소란을 피우면서 불과 이백 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우주에서 유일하게 생명이 살 수 있는 푸른 행성을 무참히 파괴해왔다.(50~51)

 

"우리는 원자력과 화석연료를 가지고 온갖 열역학 소란을 피우면서 그로부터 뿜어져나오는 독성물질로 생명이 살 수 있는 하나뿐인 행성을 죽이고 있지.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거기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네. 우리가 미쳤다는 증거가 아닌가? 내 생각에, 지구의 면역 체계는 AIDS, 그리고 신종 독감과 결핵 등으로 우리를 제거하려고 애쓰고 있다네. 지구로서는 우리를 제거하는 편이 나을 걸세. 우린 정말로 무서운 동물이거든. (…)"(118~119)

 

 

    5

 

  많은 사람들이 이혼하는 이유에 대하여,

 

  남자들은 무엇을 바라는가? 많은 친구를 바란다. 남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게 화를 내며 덤비지 않기를 바란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이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더이상 대가족을 이루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면 신부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과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 있었다. 신랑 역시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친구로 두고 멍청한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지금은 극소수의 미국인만이 대가족을 이루고 산다. 나바호족과 케네디 가문 정도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혼을 하면 딱 한 사람과 가정을 이룬다. 신랑은 친구가 하나 생기는데 그나마 여자다. 신부는 이야기 상대가 하나 생기는데 그나마 남자다.

  부부싸움이 벌어지면 사람들은 대개 돈이나 권력이나 섹스나 자녀 양육 같은 것 때문에 싸운다고 생각한다. 사실 두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상대방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만으론 사람이 너무 모자라!"(55~56)

 

 

    6

 

  음악과 묘비명과 베트남 전쟁과 돈에 대하여

 

  우리의 정부, 회사, 대중매체, 종교 기관, 자선 단체들이 아무리 타락하고 탐욕스럽고 매정하게 변했을지라도 음악은 여전히 경이롭고 아름답다.

  내가 죽으면 묘비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지기를 바란다.

 

그가 신의 존재를 믿는 데 필요했던 유일한 증거는

음악이었다.

 

  우리가 베트남에서 어리석고 파괴적인 전쟁을 벌이는 동안에도 음악은 점점 더 좋아지고 있었다. 어쨌든 우리는 전쟁에서 패했다. 사람들이 우리를 몰아내기 전까지 인도차이나에는 질서가 찾아올 수 없었다.

  베트남 전쟁은 백만장자들을 억만장자로 만들었다. 오늘날의 전쟁은 억만장자들을 조만장자로 만들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도 진보라면 진보인 셈이다.

  그에 비해 미국에 침략당한 나라의 국민들은 왜 신사 숙녀처럼 제복을 입고 탱크와 헬리콥터를 동원해 싸우지 못하는 것일까?(70)

 

 

    7

 

  자신의 조국에 대하여

 

  마크 트웨인의 작품 중 가장 굴욕적이고 비참한 이야기는 스페인―미국 전쟁이 끝난 후, 미국 병사들이 필리핀 민중을 해방시킨다는 명목으로 육백 명의 모로 족 남자와 여자와 어린이를 살해한 이야기다. 우리의 용감한 지휘관은 레너드 우드였는데 그의 이름을 딴 요새가 지금도 남아 있다. 미주리 주의 레너드 우드 요새가 그것이다.

  에이브러햄 링컨이라면 미국의 이 제국주의 전쟁에 대해, 고상한 핑계를 대자면 가장 훌륭한 정치적 연줄을 가진 가장 부유한 미국인들에게 더 많은 천연자원과 온순한 노동력을 공급하기 위한 이 전쟁들에 대해 뭐라고 했을까?(77)

 

  조지 W. 부시는 주변에 C학점 상류계급 학생들을 끌어모았다. 그들은 하나 같이 (1) 역사와 지리를 전혀 모르고, (2) 백인 우월주의를 노골적으로 표출하고, (3) 이른바 기독교도이며, (4) 정말 놀랍게도 정신병자, 즉 영리하고 번듯하게 생겼지만 양심은 전혀 없는 자들이다.(99)

 

  민망하지만 여러 곳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그가 그렇게 썼다고 해서 미국이 더 시시해 보이진 않았다.

 

 

      8

 

  (옮겨놓고 싶은 건 더 많지만) 똑똑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이그나츠 제멜바이스 역시 세균이 각종 질병을 일으킨다고 믿었다. 오스트리아 빈의 산부인과 병원에 일하러 갔을 때였다. 제멜바이스는 산모들이 열 명 중 한 명 꼴로 산욕열을 앓다가 죽는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모두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부자들은 아직 집에서 출산하던 시절이었다. 제멜바이스는 병원 일과를 세심하게 관찰한 후 의사들이 환자들은 감염시키고 있다는 의혹을 품기 시작했다. 의사들은 종종 시체보관소에서 시체를 해부한 후에 곧바로 산과병동의 산모들을 검진하곤 했다. 제멜바이스는 시험 삼아 의사들에게 산모들을 만지기 전에 손을 씻으라고 제안했다.(91)

  (…)

  산모들이 더이상 죽지 않았다. 상상해보라! 그가 모든 생명을 구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제멜바이스는 수백만 명의 목숨을 구했다. 어쩌면 그중엔 여러분과 나도 포함될지 모른다. 제멜바이스는 빈 사회에서 의학을 이끌던 지도자들, 즉 의료계의 억척가들로부터 어떤 사례를 받았을까? 그는 병원에서 쫓겨났을 뿐만 아니라, 그 덕분에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구한 오스트리아라는 나라 자체에서 쫓겨났다. 제멜바이스는 헝가리의 한 시골 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는 그곳에서 인류―바로 우리, 그리고 우리의 지식―이기를, 그리고 그 자신이기를 그만두었다.

  어느 날 해부실에서 그는 시체를 절개하던 해부용 메스로 자기 손바닥을 찔렀다. 본인이 예상한 대로 제멜바이스는 머지않아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모든 권력은 억척가들의 손에 있었다. 이번에도 그들이 승리(92)한 것이다. 병균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렇게 해서 오늘날 우리도 똑바로 주시해야 할 억척가들에 관한 사실 하나가 드러났다. 우리도 정신 차려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들은 생명을 구하는 데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 그래서 아무리 무지하더라도 그들의 억척이 언제까지나 유지되는 것이다. 그들이 증오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현명한 사람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현명한 사람이 되어달라. 그래서 우리의 생명과 당신의 생명을 구하라.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달라.(93)

 

 

    9

 

  이러하므로 아무나 책을 쓸 수가 있겠나.

  더구나 이게 자서전이라니…….

  자서전이란 "나는 위대하다"거나 "나는 이런 좋은 일, 멋있는 일만을 끊임없이 해왔다"거나 "나는 그런 짓 하지 않았다"거나, 어쨌든 그런 책이 아닌가.

  이게 자서전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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