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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아내11

"다시 태어난다면?" 그럴 리 없다. 사양할 것이다. 이번만으로 됐다. 강제하는 경우에도 더 나은 생활을 하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건 구차할 것 같다. 함께하는 사람을 고생시키면서 그 과정을 반복하는 건 할 짓이 아니다. 굳이 물어볼 것도 없지만 다른 길을 선택해야 한다고 할 것이다. 이번만으로도 고맙고 미안하다. 갚을 길도 없다. 뻔뻔하지만 그 정도는 안다. 2023. 3. 15.
아내의 큰소리 나의 큰소리 평생 죽은 듯 지내던 아내도 오기가 발동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나는 저 사람에게 막 대해서는 안 된다' '저 사람은 내가 죽을 때까지 나에게 막 대하고도 남을 만한 일을 충분히 한 사람이다' 지금까지 백 번은 생각해 놓고는 아내의 그런 반응을 눈치채는 순간 '이것 봐라?' 하고 이번에는 나의 진짜 오기를 발동하게 됩니다. 그럴 때 나는 큰소리를 냅니다. 말하자면 일이 어떻게 되든 일단 나의 오기를 발동하게 됩니다. 그러면? 아내는 그만 입을 닫고 맙니다. 그리고 그게 또 나를 괴롭힙니다. '아, 내가 이러지 않겠다고 백 번을 다짐해놓고 또 이렇게 했구나……'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등대로』에는 "동정을 요구하며 사정없이 내리치는 메마른 아라비아의 신월도(新月刀) 같은 부친.. 2022. 11. 3.
"서투르고 어설픈 내 인생" 젊었던 시절에는 아내로부터 꾸중이나 원망, 잔소리 같은 걸 듣지 않고 살았습니다. 아내는 내 위세에 눌려서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속에 넣어놓고 지냈을 것입니다. ​ 살아간다는 건 내게는 하나씩 둘씩 어설픈 일들을 벌이고 쌓아온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아내가 그걸 때맞추어 지적했다면 나는 수없는 질책을 받았어야 마땅합니다. ​ 아내는 이젠 다른 도리가 없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마침내 입을 열기 시작했고, 이젠 내 허물을 보아 넘기지 않게 되었고, 그때마다 지난날들의 허물까지 다 들추어버립니다. 아무래도 헤어지자고 하겠구나 싶은데 그런 말은 꺼내지 않는 걸 나는 신기하고 고맙게 여깁니다. 그러면서 '나는 언제부터 이런 질책을 듣지 않는 정상적인 인간이 될 수 있겠는가!' 한탄합니다. 공자님 말씀 "七十而從.. 2022. 9. 1.
아내의 잠꼬대 마음이 불편한 밤에는 여지없이 잠꼬대를 한다. 누구에겐가 외친다. 그 외침이 들려오는 순간 나는 후회한다. 후회는 종합적이다. 변명을 하거나 핑계를 대지 않고 싶은 후회다. 내가 먼저 죽으면 남은 밤들의 저 잠꼬대를 어떻게 하나……. 2019. 12. 17.
"생명력의 흡수" 버지니아 울프가 『등대로』에서 쓴 '남편과 아내' 이야기입니다. 한마디로 놀라웠습니다. 이런 걸 가지고 놀랍다고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찰스 탠슬리는 그를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형이상학자라고 찬양하고 있다며 그녀가 남편에게 말하였다. 그러나 남편은 그 이상의 것을 원했다. 그는 동정이 필요한 것이다. 자기가 세계의 한복판에 있는 영국에서 뿐 아니라 전세계가 그를 필요로 한다는 보장을 받고 싶은 것이다. 램지 부인은 편물 바늘을 분주하게 움직이며 꼿꼿이 앉아 있다가 응접실과 주방을 단정하게 정돈하였다. 그리고 남편에게 마음대로 그곳에 드나들며 마음껏 즐기라고 말하였다. 그녀는 웃으며 양말을 짰다. 그녀의 두 무릎 사이에 몸을 굳히고 서 있는 제임스는, 동정을 요구하며 사정없이 내리치는 메마른 아라비아.. 2018. 2. 13.
"다시 태어나거든……" 1 2014년 10월, 그러니까 꼭 2년 전 가을에 찍은 사진입니다. 뚜렷하게 아름다운 여성이 보이지 않습니까? 제 아내입니다!!! 2 저 사진이 다시 눈에 띈 순간 가슴이 써늘했습니다. '어제의 축제 같은데 어떻게 벌써 저렇게 초췌해졌지?' 그보다 먼저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아, 저때만 해도 젊은 티가 났었구나!' 꼭 2년 전의 저 시간이 그리워졌습니다. 다시 2년 후에는 또 어떤 변화가 있을지, 두렵기도 했습니다. 3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남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이런 질문을 나는 싫어합니다. 그런 대화를 주고받는 장면을 지켜보며 앉아 있는 것조차도 곤혹스럽니다. "앉아 있다"고 하는 건 늘 아내와 함께 텔레비전 앞에 있을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우, 대부분의 여성이 야릇한 미소를 짓거나 .. 2016. 11. 26.
서정주 「신부」 신부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사십 년인가 오십 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 2014. 5. 13.
박형준「홍시」, 그리고 죽음에 대하여 고상한 척해 봐도 별 수가 없는 게 인간입니다. 돈이 많아 봐야 별 수 없고, 친구가 많아 봐야 별 수 없고, 자녀가 많고 다 잘 되었다 해도 별 수 없는 게 인간, 죽음입니다. 그것이 생각나게 하는 시 한 편을 봤습니다. ♣ 아내는, 내가 병원에 드나들게 됐는데도 별 기색이 없었습니다. 저러다가 말겠지, 그렇게 생각했거나 뭐 별 일이야 있을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며칠간 병실에 들어앉아서 별별 검사를 다 하고 있는 걸 좀 못마땅해하기도 했는데, 큰 병원으로 옮겨 가슴을 열고 중환자실에 들어가자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일반병실에 있다가 수술을 하거나 하여 중환자실에 들어가게 되면 당연히 그 일반병실은 비워야 합니다. 아내는 그걸 모르고 '이제 드디어 죽는구나!' 했답니다. 그러니 그 병실을 .. 2012. 7. 11.
아내와 내가 가야할 길: 걸으며 생각하며(Ⅰ) 아내와 내가 가야할 길 - 걸으며 생각하며 (Ⅰ) - ♬ 이런 상태로라도, 심장이나 어디나 아무래도 말짱하지는 않아서 '헉헉'거리면서라도 오래오래 살아보자고 동네 이곳저곳 '핫둘! 핫둘!' 힘차게 걸어다닌다면 남 보기에 역겨울 것입니다. 더구나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아줌마'도 아닌 주제에…… 그.. 2011. 8. 19.
수술실 일기- 2010.1.17-1.22. 서울아산병원- 아직은 혼수상태였을 것입니다. 눈앞에 손이 보였습니다. '부드럽지는 않지만 언제나 따듯한' 그 손을 잡고 두 마디만 했습니다. 그게 차례로 가장 중요한 말이긴 하지만 수술실에서 생각해 두지는 않았는데도 저절로 그 말이 나왔습니다. "오래 걸려서 걱정하고 있을 줄 알았어." "나 대단히 아팠어." 아내는, 제 손목의 핏줄을 타고 들어간 카메라가 세 줄기밖에 되지 않는 관상동맥들 살펴보는 데는 10분이나 2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얘기를 몇 차례 들었기 때문에 한 시간도 더 걸린 그 시간에 거의 초죽음이 되었을 것입니다. 검사를 받아보러 들어가 수술을 하게 되고 게다가 지혈까지 어려워 고생을 하고 나오는 동안 예기치 않았던 상황에 어디론가 전화하는 자신의 손이 푸르죽죽하더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중.. 2010. 1. 23.
실존 Ⅱ ●●병원 ○○○실 출입구 맞은편 벽 아래 초라하고 삭막한 표정의 벤치에 앉아 이 삶을 가슴아파해준 사람이 그리운 밤. 2009. 12. 25. 늦은밤에. 2009. 12.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