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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가을45

가을엽서 Ⅸ - 가는 길 저 쪽 창문으로 은행나무가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깜짝 놀라 바라보았더니 그 노란빛이 초조합니다. 올해의 첫눈이 온다고, 벌써 기온이 영하로 내려갔다고, 마음보다는 이른 소식들이 들려와서 그런 느낌일 것입니다. 다른 출구가 없다는 것이 더 쓸쓸하게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이젠 정말 이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돌아보면 화려하고 과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정말이지 그걸 알 수가 없었습니다. 멍청하게 세월만 보낸 것입니다. 미안합니다. 이제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것조차 못마땅할 것입니다. 다른 출구가 없다는 것이 마음 편하기도 합니다. 순순히 내려가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정말로 미안합니다. 마음만이라도 따뜻하게 가지고 있겠습니다. 딴 마음이 들면 얼른 정신을 차리겠습니다. 그럼. 2012. 11. 16.
인연-영혼 가을이 가고 있습니다. 내년에도 다시 올 가을, 끊임없이 반복될 가을입니다. 2012년 가을, 혹은 마지막 가을일 수도 있습니다. 나로 말하면 그 어떤 가을도 다 괜찮고 고맙고 좋은 가을입니다. 아무리 찬란한 가을도, 바람에 휩쓸려가는 낙엽 소리가 들리면 쓸쓸해지고, 골목길 조용한 곳에 모여 있는 낙엽을 보면 더 쓸쓸해집니다. 이듬해 가을이 올 때까지는 설명이 필요없게 됩니다. 이 가을에 37년 전 어느 교실에서, 내가 그 학교를 예상보다 일찍 떠나는 섭섭한 일로 겨우 5, 6개월? 날마다 나를 바라보던 한 여학생, 그 여학생이 어른이 되어 낳은 아이가 나를 찾아왔습니다. 그 아이는 나를 만나는 순간에 할 인사를 애써서 연습했답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그랬는지, 인사는 나누었는데 생각이 나지 않습.. 2012. 11. 10.
오며가며 Ⅱ 2012.10.23. Ⅰ 우연히 무대 장치들이 무너지는 수가 있다. 기상·전차·사무실 혹은 공장에서 네 시간, 식사·전차·네 시간의 일·식사·잠, 그리고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그리고 토요일, 똑같은 리듬에 따라, 이 길을 거의 내내 무심코 따라간다. 그러나 어느 날 라는 의문이 솟고, 그리하여 모든 것이 당혹감 서린 지겨움 속에서 시작된다.(알베르 까뮈, 민희식 옮김,『시지프스의 신화』육문사, 1993, 27). 『시지프의 신화』에서 이 부분을 읽으며 '그래, 맞아! 삶은 지겨움의 연속이야' 하고 생각한 것은, 1990년대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이 책은, 참 어쭙잖아서 공개하기조차 곤란한 어떤 이유로 그럭저럭 대여섯 번은 읽었는데, 그렇게 감탄한 그 몇 년 후 어느날에는 '뭐가 그리 지겨워.. 2012. 10. 30.
가을엽서 Ⅻ 오늘 아침, 경춘선 철로변 푸나무들은 가을바람에 일렁이는 것 같아서 쓸쓸했습니다. 맹위를 떨치던 것들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 푸나무들 위로, 연일 숨막힐 것 같았던 햇볕도 덩달아 자신이 무슨 종일 설사하여 생기 잃은 소녀나 되는 양 아련해 보였습니다. 가볍게 하늘거리는 것 같았습니다. 다시는 오지 않을 2012년 여름. 가진 것 다하여 정열적으로 바쳤거나 미워하고 소홀히하고 냉대했거나 더는 만나고 싶지 않아서 돌아섰거나 2012. 8. 2.
허윤정 「노을에게」 노을에게 허윤정 바람은 꽃도 피워 주며 사랑의 애무도 아낌없이 하였다 잠시잠깐 떨어져 있어도 살 수 없다던 너 작은 일에도 토라져 버린다 이렇게 해지는 오후면 노을은 후회처럼 번지고 새들은 슬픈 노래로 자기 짝을 찾는다 이대로 영원일 수 없다면 우리 어떻게 이별할 수 있을까 사랑아 우리 기꺼이 이별 연습을 하자 나 또한 지워져 버릴 너의 연가 앞에서 저 물든 노을은 분홍 물감을 흩뿌리듯 강 건너 먼 대숲 산모롱이 누가 손을 흔든다 "잠시잠깐 떨어져 있어도 살 수 없다던 너/작은 일에도 토라져 버린다" 그러니까 -걸핏하면 토라져 버리니까- 모두들 그 사랑에 관하여 토로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그 덧없음이란…… 그러나 또한 그렇기 때문에 시인의 노래는 우리의 가슴 저 깊은 곳까지 울려오는 것이겠지요. .. 2011. 10. 31.
가을엽서 11 강원도 어느 곳에 얼음이 얼었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은 가을'이기 때문에 안심하고 있습니다. 올 가을에는 보고 싶은 것들이 참 많았습니다. 잠시라도 떠나는 시간에는 떠나는 그 곳을 눈여겨 봅니다. '꼭 이곳으로 돌아오고 싶다'는 마음 때문입니다. 젊은날에는, 아니 연전(年前)에도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언젠가는 돌아오지 못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 순간에는 세상의 얼마나 많은 것들이 보고 싶겠습니까. 2011. 10. 20.
삶, 이 미로… 삶, 이 미로… 모처럼 하늘이 저렇게 푸릅니다. 어릴 때 고향에서 보던 그 하늘이구나 싶었습니다. 둘째 딸이 전화로 그러더랍니다. "아빠에게 전해줘요. 하늘이 저렇게 맑은데 죽어서 되겠는지." 때때로 가슴이 울렁거리고 몸이 어지러워지는 그 증상 때문에 불안하고 초조해서 몸을 자.. 2010. 9. 27.
가을엽서 Ⅷ 지난 8월 28일 오후에 가을이 왔습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한 세미나에 토론자로 초청된 날입니다. 가고 오는 길의 승용차 안은 매우 더워서 에어컨을 썼는데, 그게 온몸을 흔들어서 며칠간 컨디션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날 저녁 동네 산책을 나갔더니 모든 게 변해 있었습니다. 전날 저녁까지는.. 2009. 9. 29.
이병률 「장도열차」 장도열차 이병률 (1967~ ) 이번 어느 가을날, 저는 열차를 타고 당신이 사는 델 지나친다고 편지를 띄웠습니다 5시 59분에 도착했다가 6시 14분에 발차합니다 하지만 플랫폼에 나오지 않았더군요 당신을 찾느라 차창 밖으로 목을 뺀 십오 분 사이 겨울이 왔고 가을은 저물 대로 저물어 지상의 바닥까지 어둑어둑했습니다 이 가을, 열차를 타고 갈 데가 있나? 어느 역의 플랫폼으로 잠깐 나와 줄 사람이 있나? 그 역에서 좀 만나자고 편지를 띄울 사람이 있나? 지난여름, KTX도 다니지 않고 공항도 없는, 겨우 무궁화호가 쉬고 또 쉬며 네 시간을 가서 도착하는, 그리웠던 그곳에 다녀왔다. 철로 주변 풍경도 옛날 같지 않았고 연락할 아무도 없었다. 그리웠던 사람들은 아직도 그곳 어디에서 가혹한 그리움으로 각각 이.. 2009. 9.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