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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749

이주혜(단편소설) 〈이소 중입니다〉 이주혜(단편소설) 〈이소 중입니다〉 《현대문학》 2023년 5월호 이렇게 시작되는 소설이다. 그 여름 그들은 육지 끝에 당도해 한낮에 배추씨를 심고 밤이 내리면 해변에 나가 큰 소리로 시집을 읽을 것이다. 그들이 고른 시집은 앤 카슨의 『빨강의 자서전』이나 김영미의 『맑고 높은 나의 이마』일 것이다. 앤 섹스턴이나 실비아 플라스의 시집은 고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살아 있는 시인들의 시부터 읽을 것이다. 같은 이유로 그들은 미즈노 루리코와 마리나 츠베타예바의 시집을 육지 끝까지 가져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이 이 여성 시인들의 시를 몹시 사랑하고, 특히 한 시인의 시집 제목은 무려 '끝의 시'이며 또 다른 시인의 시집에는 "그렇게 짧은 여름의 끝에 그이는 죽었다"*와 같은 아름다운 문장이 실려 있는데도.. 2023. 5. 19.
난감했던 낭독회(「엉망진창 학예회」) 지난해 가을, 세 명의 작가가 이 동네 앞 카페로 찾아왔다. 인사만 나누고 아직 차도 시키지 않았는데 그중 선임인 작가가 가방에서 설설 내 책 《가르쳐보고 알게 된 것들》을 꺼내더니 다짜고짜 맨 처음의 글 「엉망진창 학예회」를 읽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이걸 어떻게 하지?' "아, 시방 왜 그러세요? 그러지 마세요! 쑥스러워요!" 그런다고 그러냐면서(쑥스럽냐면서) 몰랐다면서 미안하다면서 그만둘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조금 읽다가 중단하고 좋은 책을 냈다면서 뭐라고 한 마디 덕담을 하겠지, 가볍게 생각하자 싶었다. 좌우간 그 순간이, 그 난처한 시간이 얼른 그리고 무사히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이렇게 난처한 경우가 있나 싶어도 참으며 생각했다. '잠시만 중단해 달라고 해서 이러지 말고 차나 시키자고.. 2023. 5. 15.
움베르토 에코(추리소설) 《장미의 이름》 (하)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하)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1994 '그' 수도원에서 있었던 이레간의 이야기 중 제4일부터 제7일까지의 이야기다. 다섯 차례에 걸쳐 일어난 살인사건은 권력을 둘러싼 암투의 과정이었고 40년간 그 수도원을 지배해 온 늙은 장님 수도사 호르헤가 세상에 유일본으로 남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에 맹독(猛毒)을 묻혀 놓은 결과였다. 윌리엄 수도사가 흉계를 밝히게 되자 호르헤는 그 책을 불태워버리려고 했고 이를 말리는 과정에서 장서관이 불타게 되고 그 화재가 번져 수도원이 전소되고 만다. 윌리엄 수도사와 수련사 아드소 간의 대화. 「우리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장서관이었다. 아, 그런데 이게 무엇이냐. 가짜 그리스도 올 날이 임박했다. 이제는 학문이 가짜 그리스도를 .. 2023. 5. 13.
움베르토 에코(추리소설) 《장미의 이름》(상)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상)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1994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이 소설을 읽으며 움베르토 에코에게는 박학다식이란 말이 무색하다는 걸 실감했다. 수련사 아드소가 사부 윌리엄 수도사를 따라 '그 수도원'에 도착한 이래 이레간 벌어진 일 중 사흘간 벌어진 일을 적은 것이 이 책 상권이다. 수도원장은 윌리엄 수도사에게 살인 사건의 전말을 수사해 달라고 부탁하면서도 장서관 출입만은 통제하는데, 살인 사건은 연이어 두 차례나 더 일어난다. 추리소설이니까 (하)권을 읽어야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겠지만, 살인사건을 파헤치는 건 독자가 눈을 떼지 못하게 하기 위한 방편이고, 사실은 움베르토 에코가 중세의 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종교적 갈등과 역사를 소재로 종횡무진 자신의 어마어마한 지식과 .. 2023. 5. 11.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소설) 《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소설) 《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 남수인 옮김, 세계사 1995 이 독후감을 어떻게 써야 할지 오랫동안 망설였다. 이 소설을 읽고 또 읽으면서도 표지에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장편소설'이라고 쓰여 있는 걸 보면서도 이내 그걸 잊고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직접 이 회상록을 썼다는 착각 속에 책장을 넘기곤 했다. 하드리아누스(76~138, 재위 117~138)는 뛰어난 정치가이면서 전술에 능한 장군이었고 고대 그리스의 학문과 예술을 연구한 학자였다. 로마제국의 오현재(五賢帝) 중 세 번째로, 트라야누스의 정복 정책에 종지부를 찍어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었다. 이 소설은 '방황하는 어린 영혼' '변화 변모 변신' '평정된 세상' '황금시대' '위대한 기강' '인내' 등 여섯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2023. 5. 4.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기쁨 소설《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74)은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작품이다. 그런 문호도 인간이니까 그를 싫어하거나 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겠지. 그중 프리드리히 니콜라이(계몽주의자)는 괴테의 작품을 패러디한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1775)을 썼고, 그걸 못마땅하게 여긴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그 작가를 '엉덩이 시령사(視靈師)'로 등장시켜 풍자했다. 엉덩이 시령사가 등장하는 장면은 이렇다. 노학자 파우스트가 마녀의 부엌에서 영약을 마시고 20대의 청년이 되어 순진무구한 처녀 그레트헨을 쾌락의 대상으로 삼은 데다가 그녀의 어머니와 오빠까지 죽게 한 죄책감에 빠지자,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는 그를 발푸르기스의 밤의 환락경으로 이끌어 파우스트는 또다시 도덕적 마비에 빠지게 되는데 그 과정에 엉덩이 시령사가 등장한.. 2023. 4. 24.
알랭 드 보통(철학)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알랭 드 보통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정명진 옮김, 생각의나무, 2010(2002) "인기 없는 사람을 위하여"(소크라테스) "돈이 없는 사람을 위하여"(에피쿠로스) "좌절한 사람을 위하여"(세네카) "부적절한 존재를 위하여"(몽테뉴) "상심한 사람을 위하여"(쇼펜하우어) "곤경에 처한 사람을 위하여"(니체) 알랭 드 보통이 "The Consolations of Philosophy"라는 제목으로 철학자 여섯을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이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었다. 잘 알려진 철학자(작가) 알랭 드 보통이 초등학생들도 알 만한 철학자들을 소개했으니 뭐라고 하는 게 주제넘고 해서 몇몇 문장을 발췌해 두기로 했다. #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이의 의견을 다 존중할 필요는 없고.. 2023. 4. 20.
메리 셸리(소설) 《프랑켄슈타인》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 김선형 옮김, 문학동네 2022(2012) 스위스 제네바 명문가의 로버트 월튼이 북극해 탐험에 나섰다가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을 구조하고 그의 기막힌 사연을 듣는다. 흔히 프랑켄슈타인을 '괴물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는 괴물이 아니고 괴물을 만든 사람이다. 괴물을 만듦으로써 폐인으로 전락했지만 본래는 고아하고 명석한 과학도였다. "젊었을 때는 나 스스로도 뭔가 위대한 업적을 이룩할 운명일 거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내 정서에는 깊이가 있었습니다. 찬란한 업적을 이룩하기에 적합한 판단력도 소유하고 있었고요. 나 자신의 가치에 대한 자부심이, 다른 사람들이라면 중압감을 느꼈을 상황에서도 나를 지탱해 준 힘이었습니다. (......)" 그런 그가 과학적 상상력 속에서 천국을 거.. 2023. 4. 12.
정보라(장르 소설) 《밤이 오면 우리는》 정보라 《밤이 오면 우리는》 「현대문학」 2023년 3월호 그 가족이 사라진 수영장에 빌리가 있었다. 빌리는 인간형 로봇이다. 마리카가 물속에서 발견했다. 몸집은 나와 비슷하고 스무 살 전후의 젊은 인간처럼 보였다. 빌리라고 부르는 이유는 처음에 발견했을 때 얇은 면바지에 'Billy'라고 크게 적힌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우리 둘 다 빌리가 정말로 인간인 줄 알았다. 그래서 우리는 서둘러 빌리를 물속에서 끌어냈다. 마리카가 심폐소생술을 했다. 나는 빌리가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다. 살아 있는 사람의 냄새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은 사람의 냄새도 나지 않았다. 빌리에게서는 생물체의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물에 젖은 옷과 머리카락에서 비린내가 났지만 그건 썩은 물 냄새였.. 2023. 4. 10.
안규철의 사물에 관한 이야기 《그 남자의 가방》 안규철의 사물에 관한 이야기 《그 남자의 가방》 현대문학 2012 아이가 숟가락질을 다 배우고 나면 학교로 보내진다. 학교가 가르치는 것도 숟가락질의 다른 방법들이다. 연필을 쥐고 남들과 같은 모양으로 글씨를 쓰는 방법과 손가락을 꼽아 셈을 하는 방법, 거기에 따르는 금기와 규범에 관한 것이다. 그러기까지 얼마나 집요한 훈련이 반복되는가? 숙제와 시험과 칭찬과 회유, 매질과 모욕, 성적표와 경쟁, 학교의 이 모든 프로그램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손을 미리 정해진 규격대로 길들이는 데 바쳐져 있다. 그리고 그렇게 혹사당하면서 손을 길들인 대가로, 우리는 비로소 손에서 입 사이에 그만큼의 여백을 얻을 수 있다. 쓸모있는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다.(34) 나는 지금 무엇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까? 조각가 안규.. 2023. 4. 6.
얀 마델(소설) 《파이 이야기》 얀 마델(소설) 《파이 이야기》 공경희 옮김, 작가정신 2015 49쇄(2004) 이 책이 재미있더라는 어느 작가의 글을 본 건 오래전이었고 알라딘 강남점에서 중고본을 구입해 놓았는데 '내가 차지할 수 있는 파이(pie)는 어느 정도인지 속상해하는 얘기일까?' 추정해 보면서 또 망설이다가 지난겨울 팔을 다쳐 숨 쉬고 먹고 책 읽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어 '마침내' 읽었는데, 아이고~ 이런 바보! 읽지 않았더라면 어쩔 뻔했나! 이렇게 재미있는 책은 드물지 싶다. 나는 언제 또 이만큼 재미있는 책을 만나게 될까. 인도 소년 피신 몰리토 파텔의 애칭이 '파이'(그러니까 애플파이라고 할 때의 그 pie가 아니라 pi)다. 호기심 충만하고 낙천적이고 긍정적이다. 나는 힌두교도다. 붉은 쿰쿰 가루가 담긴 조각한 .. 2023. 3. 26.
여성의 몸 보기 : 이서수(중편소설) 《몸과 우리들》 이서수 《몸과 우리들》 현대문학 2023년 3월호 ※ 일부 발췌 여자도 남자도 아닌 상태로 당신과 자는 기분. 잠시 그것에 대해 말해보려고 합니다. 제 몸을 구성하고 있는 신체 기관들 가운데 제가 이름 붙인 것은 한 가지도 없습니다. 저는 그럴 수 있는 권한을 박탈당한 채로 태어나 살아가고 있지요. 우리 모두 그렇습니다. 하지만 한 번쯤은 멋대로 이름 짓기 놀이를 해봐도 좋지 않을까요. 저의 입술은 캐러멜입니다. 제 가슴은 솜사탕입니다. 저의 질은 와플입니다. 어떻습니까. 디저트로 이름 붙인 신체 기관이 먹음직스럽게 느껴지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상당히 퇴행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일 것입니다. 먹다니요. 신체 기관은 먹고 먹히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 다시 이름을 붙여봅시다. 저의 입술은 지평.. 2023. 3.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