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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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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다양한 시기가 공존하는 듯한... '가끔 삶의 다양한 시기가 동시에 공존하는 듯한, 그래서 어렸을 때 살던 집에 돌아가기만 하면 아무도 죽지 않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로 모든 것이 옛날 그대로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하기 짝이 없는 느낌' 《일의 기쁨과 슬픔》(알랭 드 보통)에서 발견한 문장이야(230).다른 사람도 그렇구나 생각했어.넌 어때?그런 느낌 가질 때가 없니? 까마득하게 된 그 학교에 가면 그때 그 사람들이 좀 서먹하긴 해도 어디를 그렇게 돌아다녔는지 물을 것 같아.가고 온 사람들이 거의 다 모여 있을 것 같기도 해.교사(校舍) 앞 벚나무 아래 상을 차려 놓고 막걸리를 마셨어. 술잔에 꽃잎이 떨어지면 마시자고 했어. 봄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면 왁자지껄 웃고 떠들며 다들 잔을 들었어.아직 전기도 들어오지 않을 때였어... 2024. 11. 21.
알베르 카뮈 · 장 그르니에 《카뮈 ­­­- 그르니에 서한집》 알베르 카뮈·장 그르니에 《카뮈 ­­­- 그르니에 서한집》김화영 옮김, 책세상 2012­      2012년에 구입해 놓았던 책이다. 보관할 책과 버릴 책으로 구분해서 과감하게 버리기로 하니까 더러 섭섭하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한데, 버리는 데 재미가 붙으니까 덜 읽었어도 '버릴까?' 싶을 때가 있다. 카뮈와 그르니에가 주고받은 235편의 이 서한집도 이미 '절판'이어서 덩달아 시시한 느낌을 받았을까, 여남은 편 읽고 '그만 읽고 버릴까?' 했는데 큰일 날 뻔했다. 읽어나갈수록 재미가 있어서 거의 단숨에 읽었다. 그르니에와 카뮈는 '돈독한' 관계였다. '돈독한'보다는 '애절한'이 낫겠다. 스승과 제자로 만나서 카뮈가 노벨문학상을 받고 교통사고로 죽을 때까지 그 관계를 이어갔다. 그들의 관계는 점점 더 깊어.. 2024. 11. 20.
지금 세상이 추구하고 희망하는 것 하이네의 어떤 문장을 읽게 되었는데 그 말이 일깨우는 엄청난 예감에 몸서리가 쳐졌습니다. "지금 이 세계가 추구하고 희망하는 것이 내 마음과는 아무 상관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 말을 한 때는 1848년이었습니다!  알베르 카뮈가 장 그르니에에게 보낸 편지에 들어 있는 문장이다(《카뮈-그르니에 서한집》205). '세계'를 '세상'으로 바꿔서 읽어보았다.   "지금 이 세상이 추구하고 희망하는 것이 내 마음과는 아무 상관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2024. 11. 19.
시월과 십일월 시월엔 눈여겨보지 않은 새 가을이 되어버렸고 십일월에는 하루하루가 다르다.한 해 한 해 이 '골짜기'로 끌려들어 올수록 뭘 어떻게 할 수가 없다.적막하다.모든 것은 별 수가 없다. 2024. 11. 18.
"전에 알던 여자애들은..."(카뮈) 동기 모임에 나가지 못하면 누군가가 사연과 함께 사진을 보낸다. 면면을 살펴보며 누가 누군지 확인하고 어슴푸레한 경우에는 사진을 확대해 보기도 하지만 이미 알아보지 못한 경우에는 확대해 봤자 별 수 없다. 고소를 금치 못하는 것은 학교 다닐 때 잘 나가던 애들도 함께 폭삭 늙었다는 것이다. 혈기왕성해서 팔팔 뛰던 녀석들이 하나같이 헙수룩한데, 억지로 미소를 짓거나 의젓하게 보이려고 애쓴 표정이 역력하여 더욱 가련해 보인다. 검은 머리는 분명 염색을 한 거지. 별 수 있나!여자들도 별 수 없는 건 마찬가지여서 지금도 매력을 느끼게 하는 사람은 찾을 수 없다. 고약한 일이다.아, 이럴 수가...... 이렇게 안타까운 일이 있나! 이럴 수가?'사진보기'에서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건 결국 내 모습이다.그 사진에 .. 2024. 11. 17.
베르나르 베르베르 《여행의 책》 베르나르 베르베르 《여행의 책》이세욱 옮김, 열린책들 1998      그대 인생에서 단 한번만이라도,아무도 그대에게 그 무엇도 요구하지 않고,아무도 그 무엇으로 그대를 위협하지 않으며,아무도 그 어떤 걱정거리로 그대 마음을흔들지 않을시간을 가져야 한다.……좋건 싫건 일상에 익숙해져서당당히 맞설 엄두가 안 나거든,나를 다시 덮어도 상관없다.그대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책들은쌔고 쌨다.그러나 이제 그대의 마지막 속박에서벗어날 때가 되었다. …… 자, 갈까?                                (표지의 글)  '여행의 책'은 정신의 비상(飛上)을 위한 '비행(飛行) 안내자'가 된다. 책은 읽는 사람들에게만 용기와 위안을 줄 수 있으므로 독자가 부여하는 힘을 지닐 수 있고 그 힘이 무한.. 2024. 11. 16.
'세이노'의 독서에 관한 가르침 《세이노의 가르침》(데이원 2023)을 읽을 때 독서에 관한 '가르침'("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도 눈여겨보았다.내가 지금 늦게라도 제대로 읽고 있나? 아무래도 아니지? 그저 세월을 보내고 있는 거지?...... 이런저런 생각에 갈등을 느꼈다.    1. 최대한 쉽게 되어 있는 책부터 읽어라  2. 실전을 다룬 책들을 먼저 읽어라  3. 같은 부류의 비슷한 책을 여러 권 읽어라  4. 아는 내용은 넘어가라  5. 외우려고 하지 마라(이 가르침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이해하는 데만 신경을 써라. 시험을 치르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 어떤 박사라고 하여도 그가 외우고 있는 지식은 시디롬CD-ROM 한 장의 절반 분량도 훨씬 안 된다. 암기가 되지 않는다고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 실전에서 문제가 발.. 2024. 11. 14.
김훈 산문 《허송세월》 김훈 산문 《허송세월》나남 2024       핸드폰에 부고訃告가 찍히면 죽음은 배달상품처럼 눈앞에 와 있다. 액정화면 속에서 죽음은 몇 줄의 정보로 변해 있다. 무한공간을 날아온 이 정보는 발신과 수신 사이에 시차가 없다. 액정화면 속에서 죽음은 사물화되어 있고 사물화된 만큼 허구로 느껴지지만 죽음은 확실히 배달되어 있고, 조위금을 기다린다는 은행계좌도 찍혀 있다.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의 관성적 질감은 희미한데, 죽은 뒤의 시간의 낯섦은 경험되지 않았어도 뚜렷하다. 이 낯선 시간이 평안하기를 바라지만, 평안이나 불안 같은 심정적 세계를 일체 떠난 적막이라면 더욱 좋을 터이다.  '늙기의 즐거움'이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시작되는 '산문'이다. 액정화면 속의 정보로 배달된 죽음에 대한 표현에 대해서는 나이가.. 2024. 11. 12.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준비한다고 말끔하게 이루어지는 건 별로 없다. 삶이란 그런 것 같다. '상담실'은 암통합진료센터에 있었다.마음은 바쁘지만 상담사의 말머리를 따라 한담을 나누었다. 그러다가 '이분이 지금 날 데리고 뭘 하자는 걸까?' 싶은 걸 몇 가지 묻더니 미소를 지으며 "만점이네요!" 했다. 테스트에 통과해야 제정신이고 의향서는 제정신으로 작성해야 한다는 것이겠지.시험 같은 건 더 이상 볼 일이 없겠구나, 이십몇 년 전에 그 생각을 했었는데 엉겁결에 한 가지 시험을 치렀다.호스피스 이야기도 했다. 기회가 오기나 하면 좋겠다. '중단 항목'은, 그 시간이 되면 이 중 어느 항목이 나에게 그 '중단'의 행운(!)을 가져다줄까 생각하게 했다. 2024. 11. 10.
에른스트 H. 곰브리치 《곰브리치 세계사》 에른스트 H. 곰브리치 《곰브리치 세계사》박민수 옮김, 비룡소       '어떤 사건이 대다수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쳤으며, 오늘날 우리의 기억에 크게 남아 있는가?'라는 단순한 물음을 기준으로 선정한 40개 주제를 다루었다. 1. 옛날 옛적에(인간이 나타나기 전의 지구)2.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가들(선사시대, 석기시대, 청동기 시대)3. 나일 강변의 나라4. 월 화 수 목 금 토 일(메소포타미아)5. 신은 오직 하나뿐6. 알파벳의 탄생. .. 곰브리치?들어본 이름이고, 청소년 대상 도서다.1935년에 처음 출판되었고, 터키 어 번역본 머리말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단다. 이 책은 학교에서 사용되는 역사 교과서를 대신할 의도로 집필된 것이 아니다. 이 책은 학교에서 읽히는 교과서와는 전혀 다른 목적을 갖.. 2024. 11. 8.
쓰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고 바라보기만 한 물건 나는 이 전자계산기를 몇 번 쓰지 않았다. 앙증맞고 아까웠다. 여름옷 주머니에도 가볍게 들어가고, 키보드를 누를 때마다 오른쪽 위 16개 구멍으로부터 요염한 신호음이 울려 나와 실수를 예방해 주었다.세상은 빨리 흘러 이내 저렴하고 실용적인 계산기가 나와서 그걸 쓰게 되니까 저 '보물'은  보관만 하면 되었다.지금은? 스마트폰에 계산기 기능이 있어 '계산기 어디 있지?' 할 필요조차 없게 되었다.그럼 저 계산기를 사용한 적이 없었나?그건 아니다. 눈에 띌 때마다 '이게 잘 작동하고 있겠지?' 하고 키보드를 눌러 확인하곤 했다. 그러니까 저 요염한 계산기의 기능은 '작동 확인' 계산기였다. 1980년에 받은 선물이었다.44년째다!분실을 염려해서 덮개 안쪽에 사진까지 붙여 두었는데 저 파란색 사진은 내 사진이.. 2024. 11. 6.
알랭 드 보통 《일의 기쁨과 슬픔》 알랭 드 보통 《일의 기쁨과 슬픔》정영목 옮김, 이레 2009       현대 세계의 큰 도시 하나를 가로지르는 여행을 상상해보자. 가령 몹시 흐린 10월 말의 어느 월요일에 런던을 가로지른다고 해보자. 런던의 유통 센터, 저수지, 공원, 영안실 위를 날아간다. 런던의 범죄자들과 대한민국에서 온 관광객들도 보일지 모른다. 파크 로열의 샌드위치 만드는 공장, 하운슬로우의 항공사 기내식 공급 시설, 배터시의 DHL 배달 창고, 시티 공항의 걸프스트림 제트기, 스머글러즈 웨이에 자리 잡은 홀리데이 인 익스프레스 호텔의 청소 수레를 보라. 사우스 워크 파크 초등학교 식당의 시끌벅적함과 임페리얼 전쟁 박물관 대포의 소리 없는 포성에 귀를 기울여보자. 운전 학원 강사, 계량기 검침원, 머뭇거리며 불륜을 저지르는 사.. 2024. 11.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