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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거짓말을 알아채는 사람들
"입으로는 거짓말을 해도 표정에는 진실이 드러난다"고 니체도 말했지만 언어상실증 환자들은 표정, 몸짓, 태도에 나타나는 거짓과 부자연스러움을 민감하게 파악한다. 설령 상대가 보이지 않더라도(앞을 보지 못하는 언어상실증 환자가 아주 좋은 예이지만) 인간의 목소리에 담긴 모든 표정, 다시 말해서 말투, 리듬, 박자, 음악성, 미묘한 억양, 음조의 변화, 높낮이 등을 날카롭게 파악한다. 진실하게 들리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좌우하는 것이 목소리의 표정인 것이다.언어상실증 환자들은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진실인가 아닌가를 이해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언어는 상실했지만 감수성이 특히 뛰어난 그들은 찡그린 얼굴, 꾸민 표정, 지나친 몸짓, 특히 부자연스러운 말투와 박자를 보고 그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
2025. 3. 3.
박상수 「오래된 집의 영혼으로부터」
하나, 둘, 셋, 잘 아는 신발들이 모여 있어요 속초 바다의 모래가 묻어나는, 캔버스화 한 켤레는 젖어 있고요(곧 아궁이 옆에서 살살 말려볼 예정), 보라색 작은 단화는 뒤축이 접힌 채 가지런하네요 오는 동안에 스르륵 발이 자라고 있었을까요(그럴 리가요), 굽 높은 운동화 한쪽은 뒤집어진 채로 멀리 달아나 있어(제일 먼저 뛰어 들어간 사람의 것) 큭큭 제가 몰래 주워 왔어요, 보세요, 세 칸짜리 시골집 풍경입니다 방은 두 개, 문턱은 높고 고개를 숙인 채로 넘어 다녀야 해요 머리 조심! 앤티크한 뒤창을 열면 장독대와 돌담과 눈 덮인 겨울 나무들, 당겨놓은 듯 가까이 있어 다 같이 소리를 질렀지요 오른쪽 끝 방에는 흰색 타일로 장식한 입식 부엌을 들였고요 보일러 스위치는 냉장고 옆에, 방마다 어떤 이들이 ..
2025. 2. 26.
내 친구 오경아
소설 "별들의 고향"(최인호) 여주인공은 예쁘고 명랑한 여인 오경아다. 뭇 남자들 등쌀에 불우하게 살다가 자살한 오경아, 그녀에게는 전차표, 극장 관람권, 단추, 머리핀, 그림엽서, 우표, 홍보용 성냥갑, 녹슨 못, 포장끈, 전기세 영수증, 아파트 관리비 영수증, 부러진 우산대... 같은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보관하는 버릇이 있다. 1970년대에 상업주의 소설이라고 하던 그 소설에서 이야기한 것들은, 당시로는 거의 다 상식이었겠지만 이 버릇 얘기는 내게는 특별했다. 몇 달간 오경아와 동거한 적이 있는 대학 미술 강사 김문오는 이렇게 얘기했다(1권, 173~174). 처음에 나는 그녀에게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하느냐고 의아해하자, 그녀는 일단 못 쓰게 된 것일지라도 언젠가는 쓸모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2025. 2.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