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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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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고 바라보기만 한 물건 나는 이 전자계산기를 몇 번 쓰지 않았다. 앙증맞고 아까웠다. 여름옷 주머니에도 가볍게 들어가고, 키보드를 누를 때마다 오른쪽 위 16개 구멍으로부터 요염한 신호음이 울려 나와 실수를 예방해 주었다.세상은 빨리 흘러 이내 저렴하고 실용적인 계산기가 나와서 그걸 쓰게 되니까 저 '보물'은  보관만 하면 되었다.지금은? 스마트폰에 계산기 기능이 있어 '계산기 어디 있지?' 할 필요조차 없게 되었다.그럼 저 계산기를 사용한 적이 없었나?그건 아니다. 눈에 띌 때마다 '이게 잘 작동하고 있겠지?' 하고 키보드를 눌러 확인하곤 했다. 그러니까 저 요염한 계산기의 기능은 '작동 확인' 계산기였다. 1980년에 받은 선물이었다.44년째다!분실을 염려해서 덮개 안쪽에 사진까지 붙여 두었는데 저 파란색 사진은 내 사진이.. 2024. 11. 6.
알랭 드 보통 《일의 기쁨과 슬픔》 알랭 드 보통 《일의 기쁨과 슬픔》정영목 옮김, 이레 2009       현대 세계의 큰 도시 하나를 가로지르는 여행을 상상해보자. 가령 몹시 흐린 10월 말의 어느 월요일에 런던을 가로지른다고 해보자. 런던의 유통 센터, 저수지, 공원, 영안실 위를 날아간다. 런던의 범죄자들과 대한민국에서 온 관광객들도 보일지 모른다. 파크 로열의 샌드위치 만드는 공장, 하운슬로우의 항공사 기내식 공급 시설, 배터시의 DHL 배달 창고, 시티 공항의 걸프스트림 제트기, 스머글러즈 웨이에 자리 잡은 홀리데이 인 익스프레스 호텔의 청소 수레를 보라. 사우스 워크 파크 초등학교 식당의 시끌벅적함과 임페리얼 전쟁 박물관 대포의 소리 없는 포성에 귀를 기울여보자. 운전 학원 강사, 계량기 검침원, 머뭇거리며 불륜을 저지르는 사.. 2024. 11. 5.
코끼리에 대한 책 쓰기 핀란드 사람들은 스스로에 대해 농담하기를 즐긴다. 가령 독일 사람, 프랑스 사람, 미국 사람, 핀란드 사람에게 각각 코끼리에 관한 책을 써 보라고 하면 어떤 책이 나올까? 빈틈없는 성격을 가진 독일 사람은 『코끼리에 대해 알려진 모든 것』이라는 제목으로 주석이 빵빵하게 달린 두 권짜리 두툼한 학술서를 쓸 것이다. 철학적 명상과 존재론적 고민에 자주 빠지는 프랑스 사람은 『코끼리의 인생과 철학』이라는 책을, 사업적인 감각이 뛰어난 미국 사람은 『코끼리로 돈 버는 법』이라는 책을, 그리고 핀란드 사람은 『코끼리는 핀란드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책을 쓸 것이다.  장하준의 『나쁜 사마리아인들』(부키, 2007)이라는 책에서 옮겼다.하나마나한 말이지만 핀란드 사람들이라고 해서 다 그런 책을 쓰진 않을 것.. 2024. 11. 3.
세이노 《세이노의 가르침》 세이노 《세이노의 가르침》데이원 2023       일하고 돈 벌고 살아가는 얘기를 엮은 책이다.여느 경영·처세술에 관한 책과 다르다. 아직 몇 살 되지 않았으면서 다 살아본 양, 철학 같은 건 통달한 양 써놓은 책, 세상 사람들의 '당연한' 고민을 '고민할 거리도 아닌 걸 가지고 고민하느냐?' 혹은 '그런 고민 누구라도 다 하니까 고민할 필요 없다!'는 식이어서 애써 읽어봤자 뭘 읽었나 싶어 곧 재활용 폐지로 내다버리게 되는 책하고는 다르다. 책의 구성이나 편집, 장정은 허술한데도 내용은 그렇다.  1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느껴질 때2부 부자로 가는 길목에서3부 삶의 전반에 조언이 필요할 때  1부 첫 장 '앞길이 보이지 않을 때'의 이야기들은 이런 내용이다. 삶이 그대를 속이면 분노하라천재 앞에.. 2024. 11. 1.
The Mission 오고 가며 이 음반을 들을 때가 있었다. 나름 좋은 시절이었다. 예수회 선교사를 동경한 것은 아니고 사람은 나름대로 미션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예수회 선교사들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이 음악을 만든 모리꼬네는 내게 특별한 말은 하지 않고 측은한 표정으로 물끄러미 바라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 1"On Earth As It Is In Heaven"Musica e Oltre Srlhttps://youtu.be/Pb4e-GUv8nA?si=pQreU24Cckz6iK5t   다치바나 다카시가 쓴 "사색기행"에서 영화 "미션" 이야기를 긴장감을 가지고 읽었다.나중에 봐도 대충 파악할 만큼만 필사해 놓기로 했다.  꽤 묵직한 주제를 추구한다. 힘과 정의의 문제. 불의에 폭력으로  맞서는 것.. 2024. 10. 30.
장하준 《나쁜 사마리아인들》 BAD SAMARITANS 장하준 《나쁜 사마리아인들》 BAD SAMARITANSThe Myth of Free Trade and the Secret History of Capitalism이순희 옮김, 부키 2007       '나쁜 사마리아인'? (34~35)  1841년 독일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영국이 자신들은 높은 관세와 광범위한 보조금을 통해서 경제적인 패권을 장악해 놓고서 정작 다른 나라들에게는 자유 무역을 권장하고 있다고 질타했다 그는 영국이 세계 최고의 경제적 지위에 도달하기 위해 스스로 타고 올라간 '사다리를 걷어차 버렸다'고 비난하며 "정상의 자리에 도달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뒤따라 올 수 없도록 자신이 타고 올라간 사다리를 걷어차 버리는 것은 아주 흔히 쓰이는 영리한 방책"이라고 꼬집었다.오늘날 부자 .. 2024. 10. 28.
영등포 고가차도의 '선글라스' 서울시가 영등포 고가차도 철거를 시작으로 영등포 로터리 구조개선 사업에 착수한단다. 10월 25일, 어젯밤 11시부터 차량통행을 통제하고 내년 4월까지 약 6개월간 작업을 진행한단다. 하거나 말거나.그렇긴 하다. 나는 이제 저런 번화한 길로 내 차를 몰고 갈 일이 없다. 굳이 그럴 이유가 없다. 한물간 사람이어서 두렵기 때문이다. 부천 소사 살며 광화문 교육부 나갈 때는 저 길로 다녔다. 마포로 들어가고 서대문 쪽을 거쳐 광화문으로 진입하는 그 길을 겁도 없이 다녔다. 2004년 8월 말까지였다. 허구한 날 야간근무를 했지만(수십 명 직원 중 한두 명이 남아 있으면 나는 무조건 남았으니까), 재수 좋은 날은 일찍 퇴근할 수 있었다.그런 날 지금 저 차량들이 달리는 방향으로 귀가하다 보면 참 많이도 밀리고.. 2024. 10. 26.
교과서의 변화에 대한 걱정 (2024.10.25) 학창 시절에나 교사가 되어서나 교과서 핵심 암기에 진력이 난 터여서 “이젠 그렇게 가르쳐선 안 된다!”는 장학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감동의 전율을 느꼈다. 50여 년 전 지역교육청 연수회 때였다. 열심히 외워서 암기의 능력으로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을 구한 경우가 대부분이긴 했지만 때마침 좋은 책들이 번역되어 쏟아지던 시절이라 마음껏 호기심을 충족하며 지내다가 대학입학시험에서 낭패를 보고 결국 어쭙잖은 직장에서 고개 숙이고 지내는 경우도 적진 않았다. 장학사들은 교과서는 기본 자료일 뿐이므로 교사는 모름지기 교육과정(curriculum)의 취지에 따라 세상의 수많은 자료를 적절히 활용해서 학생들의 사고활동을 조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실마다 적어도 70명이었고 2부제, 3부제도 시행했다. 그럼에도.. 2024. 10. 25.
"얼른 안 와?" "얼른 안 와?"어느 사서가 창턱에 어마어마하게 큰 책 한 권을 얹어 놓았고, 다른 사서는 그 위에 자그마한 화분 두어 개를 올려놓았다.나는 저 창을 바라보면 볼일을 그만두고 도서관으로 직행하고 싶어진다.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사람이 책만으로는 살 수 없고 책에서 빵이 나오지도 않는다는 건 뻔한 일인데도 그렇다."그러니까 얼른 와." 방학이 다가오는 어느 날 행정실장을 불러 '받아쓰기'를 시키던 일이 떠오른다."실장님, 받아써 보십시오. '얘들아! 우리 학교 도서관에 좋은 책 많아. 그리고 참 시원해!' 다 썼습니까?""예, 교장선생님!""그걸로 현수막을 만들어 교문 위에 걸어주세요."순간, 그분의 눈에는 내가 들어 있는 것 같아서 자랑스러웠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 그런 현수막만.. 2024. 10. 24.
조이스 캐럴 오츠 《미스터리 주식회사》 조이스 캐럴 오츠 《미스터리 주식회사》배지은 옮김, 현대문학 2024년 10월호       맨해튼 4번 애비뉴의 서점들에서 좋은 책을 도둑질하는 데 스릴을 느끼며 책 도둑, 책 수집가, 책 애호가가 되어  그간 여섯 군데 서점을 연 찰스(가명, 본명은 미상)가 뉴 햄프셔 시브룩의 항구 위쪽 유서 깊은 하이 스트리트 구역에 자리 잡은 서점 '미스터리 주식회사'(신간 & 고서적·지도·지구의·예술품, 1912년 개업), 고색창연하고 아름다운, 보석과도 같은 전설적인 서점을 발견한다.그는 독을 넣은 린트 초콜릿을 휴대하고 다닌다. 찰스는 서점 주인 에런 노이하우스를 죽이려고 한다. 매력적인 여 종업원을 그대로 채용할 생각도 하고, 아름다운 부인과 찍은 가족사진을 보고 질투심을 느끼기도 한다. 그 부인까지 차지할.. 2024. 10. 22.
종일 음악방송을 들은 날 저녁 https://youtu.be/QqkkOoJ-28A?si=l6-pI-hG_YciY93L  라디오에서 이 음악이 들리면 나는 아득한 느낌이야. 넌 뭘 해, 그 시간에? 그 아득함은 실내로 들어와도 사라지지 않아서 뭘 해야 좋을지 몰라 서성거리곤 해. 여름엔 해가 지려면 한참 더 있어야 하니까 잡초를 뽑든 뭘 하든 하던 일을 좀 더 할 수 있는 여유가 있긴 하지만 그 순간 아득해지는 건 마찬가지야. 한겨울엔 이미 날이 저물어서 그 아득함을 따라 창밖을 내다보게 되고, 이맘때의 가을엔 어둑어둑해지는 시각이야. 바쁘게 뒷정리를 하지 않으면 흙 묻은 호미와 장갑, 장화를 씻기도 어려워져. 오늘은 이미 상현달이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었어. 그곳도 그렇지? 가을이 며칠이나 더 계속될는지 초조해지고 그러다가 이 음.. 2024. 10. 20.
다치바나 다카시 《사색기행》 다치바나 다카시 《사색기행》이규원 옮김, 청어람미디어 2005      2005년에 이 책을 사놓았다. 그러니까 20년을 함께했는데도 더러 등표지만 바라보며 지나쳤고, 마침내 돋보기를 쓰지 않으면 그 등표지의 작은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게 되어 '立花隆' 세 글자와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된 '사색기행'만 눈에 들어왔다.일전에는 읽지 않은 책들을 구분해 보며 생각했다. '立花隆? 중국인인가? 사색기행? 무슨 사색?'그러다가 선뜻 '이 책을 읽자!' 용기(?)를 내었다.돋보기를 쓰니까 눈에 들어왔다. '나는 이런 여행을 해 왔다' 아, 이런! 그렇다면 이건 다치바나 다카시잖아!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 사색기행? 사색하지 않은 기행문은 읽을 가치도 없겠지? 지금은 ".. 2024. 10.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