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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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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나에게 공부할 시간을 주었다 광주중앙초등학교의 올해 입학생은 단 한 명이었다고 한다. '광주', 그것도 '중앙초등학교', 한때 전교생 수가 4,000명에 육박했었다는 학교의 118번째 입학식이었더란다.교사 출신이어서 그런지, 나는 아이들이 왁자지껄하던 날들을 생각하면 참 허전하다. 우리가 남의 아이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이, 아이들이 소중하다는 것을 진실로 깨닫지 못해서 이 모양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  자그마한 아이가 지나가면 아무리 추워도 그 자리에 서서 저 멀리 갈 때까지 바라본다. 요즘은 보기 어려운 장면이기도 하고, 저 아이가 잘 자라서 멋진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자기 자식만 끔찍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밉다. 무책임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세상을 망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자신의 아이.. 2025. 3. 6.
멀쩡한 곳에서 엎어지기 이 얘기를 올려놓으면 나를 업신여길 인간이 드디어 이 꼴이 되었다며 코웃음을 칠 것 같아 없던 일로 하려다가 까짓 거  그런 인간은 이러나저러나 마찬가지일 것이어서 그냥 공개해 버리기로 했다. 온 시민이 잘만 다니는 멀쩡한 길에서 사정없이 엎어져 피를 좀 흘린 이야기다.  #지난해 7월 중순 어느 아침나절, 나는 2~3초간 이 동네에선 간선도로라고 할 만한 도로변 인도에 엎어져 있었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고, 잠시였다.동네 중심가를 향해 걸어 내려가는데 어느 순간, "퍽!" 소리와 함께 내가 시멘트 보도블록에 얼굴과 배를 대고 엎어진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어처구니없어하며 어기적어기적 일어나는데 가까이 앞서가던 녀석(나보다는 10년쯤 젊어 보이는 '70대 젊은이'로 아직 10년쯤은 안심하고 살아도.. 2025. 3. 5.
오스카 와일드 《옥중기》 오스카 와일드 《옥중기》임헌영 옮김, 범우사 1979   나는 나 스스로를 파멸시켰으며 또 어떠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손 이외의 것으로는 파멸될 수 없다는 것을 나 자신에게 말해두지 않으면 안 되겠다.(...)신은 나에게 거의 모든 것을 베풀어 주셨다. 나는 천재성과 드높은 명성 그리고 높은 사회적 지위와 광휘(光輝) 또 지적 용기까지 갖추고 있었다.(...)그러나 나는 육욕적인 향락 속에 파묻혀 있었고 지각없는 건달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다. 나는 동물같이 본능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족속들 속에 휩쓸려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나의 재능을 낭비하기 시작했으며, 어이없게도 유한한 나의 청춘을 탕진하는 데에서 묘한 기쁨을 맛보고 있었다.(27~29)  오스카 와일드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소설) "살로메"(희곡).. 2025. 3. 4.
거짓말을 알아채는 사람들 "입으로는 거짓말을 해도 표정에는 진실이 드러난다"고 니체도 말했지만 언어상실증 환자들은 표정, 몸짓, 태도에 나타나는 거짓과 부자연스러움을 민감하게 파악한다. 설령 상대가 보이지 않더라도(앞을 보지 못하는 언어상실증 환자가 아주 좋은 예이지만) 인간의 목소리에 담긴 모든 표정, 다시 말해서 말투, 리듬, 박자, 음악성, 미묘한 억양, 음조의 변화, 높낮이 등을 날카롭게 파악한다. 진실하게 들리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좌우하는 것이 목소리의 표정인 것이다.언어상실증 환자들은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진실인가 아닌가를 이해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언어는 상실했지만 감수성이 특히 뛰어난 그들은 찡그린 얼굴, 꾸민 표정, 지나친 몸짓, 특히 부자연스러운 말투와 박자를 보고 그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 2025. 3. 3.
주요한 「복사꽃이 피면」 복사꽃이 피면가슴 아프다속생각 너무나한없음으로    그러라고, 그러거나 말거나 복사꽃은 또 피겠지. 2025. 3. 2.
아름다운 것들도 싸우네 백로는 단정하게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이쪽 가장자리에선 비둘기들이 모여 뭔가를 찾고, 오리들은 신나게 물장난을 하며 노는구나 생각하며 지나가고 있었다. "얘들아! 그만! 그만!"저쪽 길을 가던 여자가 소리쳤다.'아, 저것들이 지금 싸운다는 거야?' 나는 놀라서 바라보았다. '세상에, 저것들이 지금 싸우는 중이구나...''아름다운 것들도 싸우네.''마치 인간들처럼 싸우네.''아름다운 것들이 더 많다고 생각했는데 다 싸우네, 다 싸워...''산다는 건 결국 싸운다는 건가?' '도무지 알 수 없는 세상이네...' 2025. 3. 1.
사방팔방으로 가고 싶은 아이들을 한 줄로 세워버리기 (2025.2.28) 변화를 실감한다. 신설학교가 그렇게 늘어나더니 옛 얘기가 되고, 올해 취학 예정자가 아예 단 한 명도 없는 초등학교가 전국적으로 160개교에 가깝다. 이제 입학생 수를 숫자로 다루지 않고 다행히 개별적 존재로서 환영한다. 60~70명씩 ‘수용’하고도 넘쳐나서 2부제 수업까지 해본 세대로서는 무상하다는 말 말고는 표현하기가 어렵다. 선생님이 직접 연주하는 풍금 소리가 사라졌는가 하면, AI 디지털 교과서가 등장하게 되었다. 언젠가부터 선생님들은 시험지에 100점, 90점, 80점… 점수를 매기지 않는다. 문항별로 ○ 또는 ×를 표시해 주고 왜 틀렸는지를 알려준다. 다른 변화도 많다. 일일이 열거하는 건 별 의미가 없을 것 같다. 다만 교육의 방법이나 환경은 몰라보게 달라졌지만, 사회가 학교와 교사를 존중하.. 2025. 2. 28.
박상수 「오래된 집의 영혼으로부터」 하나, 둘, 셋, 잘 아는 신발들이 모여 있어요 속초 바다의 모래가 묻어나는, 캔버스화 한 켤레는 젖어 있고요(곧 아궁이 옆에서 살살 말려볼 예정), 보라색 작은 단화는 뒤축이 접힌 채 가지런하네요 오는 동안에 스르륵 발이 자라고 있었을까요(그럴 리가요), 굽 높은 운동화 한쪽은 뒤집어진 채로 멀리 달아나 있어(제일 먼저 뛰어 들어간 사람의 것) 큭큭 제가 몰래 주워 왔어요, 보세요, 세 칸짜리 시골집 풍경입니다 방은 두 개, 문턱은 높고 고개를 숙인 채로 넘어 다녀야 해요 머리 조심! 앤티크한 뒤창을 열면 장독대와 돌담과 눈 덮인 겨울 나무들, 당겨놓은 듯 가까이 있어 다 같이 소리를 질렀지요 오른쪽 끝 방에는 흰색 타일로 장식한 입식 부엌을 들였고요 보일러 스위치는 냉장고 옆에, 방마다 어떤 이들이 .. 2025. 2. 26.
내 친구 오경아 소설 "별들의 고향"(최인호) 여주인공은 예쁘고 명랑한 여인 오경아다. 뭇 남자들 등쌀에 불우하게 살다가 자살한 오경아, 그녀에게는 전차표, 극장 관람권, 단추, 머리핀, 그림엽서, 우표, 홍보용 성냥갑, 녹슨 못, 포장끈, 전기세 영수증, 아파트 관리비 영수증, 부러진 우산대... 같은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보관하는 버릇이 있다. 1970년대에 상업주의 소설이라고 하던 그 소설에서 이야기한 것들은, 당시로는 거의 다 상식이었겠지만 이 버릇 얘기는 내게는 특별했다. 몇 달간 오경아와 동거한 적이 있는 대학 미술 강사 김문오는 이렇게 얘기했다(1권, 173~174).  처음에 나는 그녀에게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하느냐고 의아해하자, 그녀는 일단 못 쓰게 된 것일지라도 언젠가는 쓸모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2025. 2. 25.
할 수 있겠지? 언제든, 말없이, 미련 없이, 담담하게...알았지? 2025. 2. 24.
아침을 기다림 개울 아래쪽 인가의 보안등 불빛 하나, 그것뿐인 밤은 쓸쓸하다.이곳은 좁고 다른 세상은 아득하다. 잠이 깨면 블라인드 틈을 뚫고 들어온 그 보안등 빛이 비친 벽을 바라보고 반가움을 느낀다.새벽이 오기를 기다린다.눈을 감고 잘 못 살아온 것, 지금 살아가고 있는 생각을 좀 하다가 또 새벽을 기다린다.어렵게 새벽이 온다. 이제 그렇게 기다리지 않아도 곧 날이 밝고 이어서 해가 뜬다.경이롭다. 해 말고는 마땅히 바라볼 만한 것이 없는 시간이다.나무들도 다른 것들도 모두 해만 바라본다.종일 무슨 일을 마련할 수는 없다 해도 어김없이 해가 떴다는 사실은 경이롭다.생각지도 않은 일이 있을 수도 있다는 기대감을 갖는다.그 고마움, 기대감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2025. 2. 23.
2월의 마지막 주말 새벽달 저 달은 지난 12일 밤에는 정월대보름달이었었다.그날 저녁 좀 늦게 창 너머로 잠시 그 둥근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그 달이 저렇게 이지러졌고, 그날 밤 그 시각은 기억 속으로 들어가 조만간 사라질 것이다.오늘 첫새벽 달빛은, 하현과 그믐의 사이쯤으로 그래도 이곳에선 매우 밝았다.마지막 힘을 다해 환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한동안 머물러 주었는데, 다 자고 일어났더니 사라지기 전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나야! 잘 잤지? 다음 달에 또 만나."저 달이 내게도 찾아와 친구가 되어 주는 걸 나는 정말 고마워한다. 2025. 2.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