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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저 신비로운 봄 빛깔

by 답설재 2025. 4. 12.

 

 

 

이 사진으로는 우스운 수준이지만, 나는 오른쪽 뒤편 저 나무의 갈색이 참 좋다.

봄마다 이 아파트 주변의 나무와 풀들은 눈부셔서 '이걸 어떻게 하나' 싶은 느낌이다. 그렇지만 이 느낌을 무시하고 어쩔 수 없이 한 가지만 골라야 한다면 당연히 저 나무를 고를 것이다.

 

나무 아래 길을 내려가면서 '저 갈색이 조금만 더 짙어진 날 사진 한 장 찍어놔야지' 하면, 이내 하얀 꽃이 피면서 갈색은 옅어져 사라지게 된다. 그 갈색은 일주일? 그 정도여서 해마다 아쉽다.

갈색 잎이 다 어디로 가나? 그건 아니다. 흰 꽃이 지고 나면 어느새 자랐는지 잎은 커져 있고 갈색은 더 짙어진다. 다만 내가 좋아하는 어린잎의 잔잔한 그 갈색이 그리울 뿐이다. 

 

지난해까지 십여 년을 바라보면서 나는 저 나무를 내 정원에 심어볼까 싶었다.

살아오면서 그렇게 생각한 나무가 몇 가지 있다. 가령 어릴 때 논둑에서 본 자귀나무, 전에 살던 아파트 베란다의 자그마한 실내 정원에서 꽃을 피워주던 그 동백, 그리고 저 나무, 또 있지만 그 세 가지는 각각 오랫동안 생각한 것들이다.

 

모내기하던 날, 나는 자귀나무를 보고 그 나무를 달라고 부탁했었다. "나중에 저 나무 캐어 가고 싶어요." 아버지는 흔쾌히 그렇게 하라고 했었다. 나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이 논을 갖고 싶어요."

동백은 새로 지은 아파트에 입주할 때 나를 잘 아는 조경사 아저씨가 그 작은 아파트 베란다에 두어 평 실내정원을 만들어주면서 남천과 함께 심어준 것이었는데, 아파트를 구하러 온 아주머니가 보고 "여기서 차를 마시고 싶어요. 완전 제 스타일이에요." 하고 당장 계약해 버렸다.

 

이제 세 번째로 저 갈색 잎의 나무를 갖고 싶어 한 것인데 그 '생각'이 올봄에 바뀌었다.

'생각'이란 두 가지다.

우선 저 아름다운 갈색 나무는 혼자 있어도 좋긴 하겠지만 저렇게 노랑과 하양, 초록이 없는 곳에서도 저만큼 아름다울까 의문을 갖게 된 것이다. 아무래도 저렇게 함께 있어야 더 아름다울 것 같았다.

다음으로, 십여 년을 보았으면 그것만 해도 고마운 일이다. 이사를 가거나 떠나기 전에는 얼마 동안 더 볼 수 있을 텐데 그게 흡족하지 못해서 아예 내 소유로 한 그루 심어놓고 얼마나 더 봐야 직성이 풀리겠는가 싶은 것이다.

 

저 나무는 자엽자두나무다.

나는 좀 이상한 나무들만 좋아하나?

자귀나무가 볼 만한가? 봄 늦게 닭 볏 모양의 꽃이 아주 잠깐 피고 나면 내내 휘영청 자리만 차지하고 있지? 

동백꽃이 지는 꼴도 좀 봐. 멀쩡하게 피어 있다가 어느 날 아침 툭 떨어져 있는 건 실연한 사람 같지 않아?

이번엔 하필 자색자두나무라니......

 

그렇지만 그걸 어떻게 하나. 난들 어떻게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