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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지례예술촌 화재 전말기 / 김원길

by 답설재 2025. 4. 16.

지례예술촌 홈페이지에서 가져옴

 

 

 

예술촌 화재 전말기

 

 

김원길

 

 

 

집이 불탔다. 내 집 지촌종택이 불타서 없어졌다. 40년 전 임하댐 건설로 수몰을 피해 지례 뒷산 중턱에 옮겨 놓은 지례예술촌이 불타 없어졌다. 자고 일어나 가서 보니 타고 없어졌다. 꿈 이야길 하는 게 아니다. 내 눈으로 가서 보았다. 어제저녁에 있었던 종택과 서당, 별묘, 주사, 행랑채, 곳간, 방앗간이 이번 괴물산불에 밤새 불타서 잿더미가 된 것이다.

 

엊그제 3월 25일은 아버지 기일이었다. 제사 준비는 아들 내외가 하고, 병원 가까이 시내에 사는 나와 아내는 저녁 무렵에 지례로 가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아내 말이 오늘은 수형이가 제사 장 보러 시내에 나와 있고 정희 어미 혼자 제수장만을 하고 있을 테니 우리는 점심 먹고 바로 지례로 들어가서 며느리를 돕자고 했다.

바깥에 나오니 공기에 옅게 연기 냄새가 나고 황사가 심한 날처럼 하늘이 흐렸다. 어제부터 의성에 산불이 크게 났다더니 그 때문인 것 같았다.

나는 제사에 입을 도포와 유건이 든 보따리를 들고 아내와 함께 버스를 타고 임동엘 갔다. 거기서부터는 택시로 바꿔 타고 지례로 갔다. 가는 내내 차창 밖에 나무들이 바람에 휩쓸리는 게 보였다. 하늘에는 먹장 같은 검은 구름이 떠서 동쪽으로 빨리 이동하는 것이 보였다. 수년 전 임동 산불 때 보았던 그 시커먼 먹장구름 떼였다. 택시 기사는 지금 의성에서 난 불이 안동 풍천 쪽으로 옮겨 붙었다고 했다. 풍천이면 세계문화유산 하회마을이 있고 도청이 있는 곳이니, 중요한 만큼 소방작업을 신속히 펼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은 필경 거기서 꺼질 것이라고 짐작했다.

 

택시에서 내려 대문간에 이르자 절정을 이룬 매화가 나를 반기고 쬐그만 토종벌들이 붕붕거리며 꽃숭어리 속을 드나들고 있었다. 지난겨울 설 차사 때 오고 두 달 만에 와보는 집이다.

아내는 주방에서 나물을 다듬고 있는 며느리를 돕고, 나는 헌옷으로 갈아입고 집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걸어서 천천히 돌면 한 시간은 족히 걸린다. 집 둘레에 매화나무 수십여 그루는 옛날에 내 손으로 심은 것이지만 다른 화초들은 모두 화훼가 전공인 내 며느리가 심고 가꾼 것이다. 아직 꽃이 피진 않았지만 이번 주 안에 집 안팎은 꽃대궐로 변할 것이다. 보는 이는 기분이 좋겠지만 뙤약볕 아래 심고 가꾸느라 고생하는 며느리를 생각하면 장하면서도 슬퍼진다.

역대 선조님의 제단소 앞을 지나오는데 갑자기 엄청난 세기의 돌풍을 맞고 나는 길 복판에서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아, 큰일이구나. 이렇게 바람이 세게 불면 저 불을 어떻게 끈담? 헬기도 떨어뜨리겠는데? 제사는 제대로 지낼 수 있을까?

 

집에 돌아오다가 장독대 옆에 늙은 개 양순이가 누워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아, 이놈이 죽어가고 있구나. 지난 번 왔을 때 나를 보고도 일어나지 못했는데 그 사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졌나 보다. 앙상한 갈비뼈가 숨을 쉴 때마다 약간씩 오르내리는 걸 보니 아직 숨이 붙어 있나 보다. 2010년에 새끼 때 가져왔으니 15년을 내 집에서 살다 가는구나. 오늘 밤을 넘길까? 아이들이 오면 의논해서 잘 묻어 줘야지.

 

이제 5시, 이때면 학교를 마친 맏손자가 저희 아빠의 차를 타고 집으로 오고 있어야 한다. 와서 제사 차릴 준비를 해야 한다. 사당청소도 해야 하고 축문도 써야 하고 제상도 차려야 하고 옷도 제복으로 갈아입어야 한다.

초헌은 주사자인 내가 한다. 주부 아헌은 아내 대신 제수를 차리느라 골몰한 며느리에게 시킨다. 종헌은 도리 없이 아들이 하고 독축은 올해로 일흔여덟 살인 아우가 하고 좌우 집사는 아내와 중학생인 맏손자가 하고 사준은 초등학생 막내 손자에게 시키리라.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재난경보였다. 풍산, 풍천으로 향했던 불이 방향을 바꿔서 안동시내 정상, 정하동까지 넘어 왔다며 거기 주민들은 빨리 대피하라는 것이었다. 일몰까지는 아직 세 시간은 있어야 하고 제사 후에 음복하고 나면 8시, 시내까지 나가면 9시, 안 돼! 그전에라도 산불에 송전선이 불타면 전기가 끊길 텐데.. 산중턱에 세워진 기지국이 녹아 버리면 휴대전화도 먹통이 된다!

아내가 말했다.

“수형이가 빨리 나오라고 전화 왔어요. 걔는 길에 차가 막혀 못 들어온대요. 빨리 나오래요.”

그러면서 며느리에게 과일 만지던 것 얼른 싸서 차에 싣고 나가자고 했다.

“사당에 들러 절이라도 하고 가자”했더니 “아이, 그냥 가요. 길이 막혔데요”

며느리가 운전을 하고 초등학생 막내 손자가 그 옆에 타고 우리 내외는 뒷자리에 앉아서 갔다. 국도까지 반시간 걸려 나올 때까지는 도로에 차가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벌써 모두 대피해 버린 것 같았다. 시야는 매연으로 흐려져서 라이트를 켜야 했고 하늘은 시커먼 연기가 완전히 해를 가리고 있었다.

 

우리 내외는 뒷자리에 앉아서 며느리가 아들과 주고받는 전화소리로 상황의 긴박함을 알 수 있었다. 수형은 제 아내에게 만약 병목현상으로 차가 막히면 차를 돌려서 와룡방향으로 우회하라고 일러주고 있었다. 아직 여기는 안 막히는데? 어딘데? 내앞. 그럼 빨리 와. 응. 안동대 후문에 이르자 왼쪽 다리 건너 길안 쪽에서 나오는 차들로 길이 꽉 막혀 있었다. 차창 밖으로 남선 쪽에 산불이 보였다. 화산처럼 활활 타는 마을도 있고 깜깜한 산능선에 빨간 띠를 두르고 타올라가고 있는 불길도 보였다. 아직 해가 있을 시각인데 하늘을 뒤덮은 검은 구름과 시야를 가리는 연무로 밤중 같았다. 라이트를 켠 차들의 붉은 후미를 따라 천천히 송천을 지나 마뜰을 지나 법흥교를 건너 시내로 빨려 들어갔다.

 

가까스로 집에 도착하여 가족이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 쉴 때쯤 아들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마을 이장으로부터였다. 불길이 수곡을 지나 박곡리 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전갈이었다. 박곡에서 지례까지는 12킬로, 해발 590미터의 아기산을 넘어야 한다. 미친 듯 날아다니는 괴물 불길의 속도로 보면 슬쩍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우리는 무사히 대피한 안도감과 피곤과 배고픔으로 일단 한숨 돌려야 했다. 무엇보다 불가항력의 바람 속 산불 구덩이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이 모든 걸 체념하게 했다. “내일 아침 밝으면 가 보자. 설마 지례까지 탈까?” 지례가 불타리라는 건 상상도 되지 않았다.

 

새벽 일찍 아우 원철이 모는 차를 타고 지례로 갔다. 수곡교를 건너자 산 밑에 시커먼 나무 밑동과 까만 재가 온 산을 뒤덮은 게 보이고 웃박실에 이르자 20여 채 건물이 모두 불타고 길가에 자동차며 트랙터 등도 깡그리 탄 뒤였다. 그렇다면 지례는 어찌 되었을까? 불탄 흔적은 해발 500의 구불구불한 상모재 길 좌우 임야를 시커멓게 태우고 지례로 향해 있었다. 산을 다 내려와 마지막 산굽이를 돌아갔을 때 눈앞에 나타난 것은 아직도 연기가 나고 있는 폐허 그 자체였다. “다 타버렸네”하는 아우의 울컥 울음 섞인 외마디 비명이 들렸다. 있어야 할 집들이 모두 사라지고 없는 것이었다.

 

건물이 있던 자리는 발 디딜 틈이 없이 기왓장만 어지러이 쌓여 있었다. 4백년 된 종택, -입구 자 본채며 곳간, 행랑채, 별묘, 방앗간, 외양간까지. 그리고 조선 제일의 서당건물인 지산서당, -앞산의 적송을 베어 강물로 흘려보내 30리 하류 망천에서 치목하여 전면 5칸 측면 3칸으로 1926년 일제 한복판에 상량하여 서인들보다 나은 인재를 키워 독립계몽운동의 전초기지를 만들고자 내 증조부님이 세운, 전설이 된 경주 사람 고대목(高大木)이 지은 우람한 서당이 사라지고 없지 않은가! 남은 것은 무엇인가? 어제 장독대 옆 길바닥에 누워 가쁜 숨을 쉬고 있던 양순이가 그 자리에 숯덩이가 되어 있었다. 뒤쪽 멀리 매캐한 연기 속에 어렴풋이 제청과 사당이 보였다.

 

뒤따라 온 아들 내외가 잿더미 앞에 울먹이게 두고 사당으로 가 보았다. 건물 앞 잔디는 새까맣게 타고 검은 재가 축담을 덮었는데도 건물은 반듯하게 서 있었다. 제청으로 가 보았다. 조선시대 기사사화 때 남인의 리더였던 대사성 할아버지의 제사를 모시기 위한, 강당으로도 사용했던, 양쪽에 큰 방과, 가운데 우물마루의 6칸 대청이 널찍한 건물이 남아 있었다. 역시 마당엔 마른 잔디가 다 타서 새까만데도 반듯하게 위용을 자랑하듯 서 있는 것 아닌가!

놀라운 것은 미닫이를 바른 문종이가 불티를 맞고 작고 검은 구멍이 나 있었지만 불에 타지 않은 것이었다. 문살에 쥐눈이콩 만한 숯덩이가 아직 얹혀 있었다. 이 타지 않은 창호지는 전통한지가 아닌 플라스틱 합성인 개량한지로서 조금 도탑고 질겨서 수명이 긴 장점이 있었다. 이것은 문화재 당국이 못 쓰게 한 것이었다. 그러나 만약 전통한지로 문을 발랐더라면 한지에 붙은 불은 창호를 태우고 천장에 옮겨 붙어 이 건물은 남아있지 않을 것이었다.

 

어째서 종택과 서당과 주사 등 여덟 채는 불타고 사당과 제청은 타지 않았는가?

무엇이 인화물질이었나? 나는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 1986년 이곳에 집을 옮겨 지을 때 나의 아버지는 집 뒷산 둘레에 백 미터 가량의 긴 담장을 둘러쌓게 했다. 담장 밖으로도 소방차가 다닐 만큼의 인도도 만들었다. 바로 산불이 넘어오지 않게 막대한 자비를 들여 설치한 것이었다. 그런데 산불이 넘어 온 것이다. 바로 담장 안에 자생한 40년생 소나무 30여 그루 때문이었다. 담장 밖 소나무에 붙은 불이 담장 안 소나무에 옮겨 붙은 것이었다. 담장 안 소나무 가지는 지산서당 건물의 추녀와 닿아 있었다.

나는 이 나무들을 베어 내 달라고 안동시에, 경북도청에 여러 번 졸랐었다. 공무원이 와서 둘러보고 갔지만 산림과 소관이라고 해서 산림과에 물어보니 문화재과 소관이라며 서로 떠넘기기만 했다. 내가 직접 자르면 안 되냐고 하니 그건 또 안 된단다. 내가 나무에 몸을 묶고 벼랑에 매달려서라도 이들을 잘라냈어야 했다. 문화재 건물의 화재 예방을 위해서 꼭 해야 할 일은 건물 가까이 소나무를 절대로 살려 두어선 안 되는 것이다. 제청과 사당이 그나마 불타지 않은 것은 건물 가까이에 소나무가 없었기 때문이다.

 

1985년에 임하댐 건설 때문에 수몰될 위기에 있던 이 건물들은 모두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마을 뒷산 중턱에 옮겨지어 예술인들의 창작과 연수 및 교류의 공간으로 세계적 각광을 받아 왔다. 국내 최초의 문화재건물의 활용을 통한 생산적 보존의 본보기이자 한옥 관광자원화 사업을 주도한 곳이기도 했다. 미슐랭 가이드북에도 소개 되고 외국 여러 나라 신문에도 소개되었다. 한국을 찾아온 해외사절단, 외국인 학생들, 주한 외국대사들, 세계정상 무용가 대보라 조윗 일행, 벨기에의 미술가들, 각종 국제 학술회의 등이 다녀갔다. 그로 인해 나는 문화재청이 주는 문화훈장을 받기도 하고 한옥홍보공로로 대한민국한류대상을 받기도 했다.

 

40년 전 수몰지로부터 옮겨 지을 때는 4년이 걸린데 비해, 이번엔 집터가 있고 축대와 담장, 그리고 건물도 2동이 남아 있으니 8동만 재건하면 된다.

빠르면 2년, 늦어도 3년이면 건물은 완공 될 것이다. 부디 지난번처럼 원형보존 한답시고 쓸모없고 불편하게 지어줘서 소유자가 당국과 싸워가며 낱낱이 새로 개축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아까운 것은 조선 숙종 때 지촌할아버지가 기사환국 직후 이조와 병조의 중신들이 어전에서 술을 마시는 그림을 그린 계회도 병풍과 대사성, 대사간 교지, 대추나무 다탁, 백자항아리, 피아노, 제사 용구, 먹감나무 장롱, 용목 장롱, 원삼을 비롯한 옛 의상 등 앤티크 여러 점이 타버린 것이다. 무엇보다 40년 동안 다녀간 국내외 예술인과 저명인사들의 명부가 다 타버린 것이다.

 

의성에서 시작한 산불이 강풍을 타고 안동 청송 영양 영덕까지 삽시간에 번지면서 26명이 사망하고, 문화재 피해만 해도 의성 고운사, 길안의 금정암 등이 전소 되는 등 사상초유의 피해를 낳았다. 가까스로 대피한 덕에 몸은 무사하지만 거처와 살림살이가 없어져서 아이들은 이재민 캠프에서 지내야 하며 임시로 살 수 있는 모듈하우스 배정을 기다리고 있다.

 

반세기 전 1975년부터, 수몰을 앞두고, 옮겨놓을 마을을 머리에 그리며 하나씩 하나씩 이루어 나갔을 때처럼 다시 복원할 지례예술촌을 머리에 그리며 또 수년을 버티어 내야 한다.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던 그때 그 많은 사람들의 기대에 아직 충분히 보답하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불에 타버렸으니 면목 없고 송구스럽지만 부디 너그러이 다시 한번 기다려 주시기만 바랄 뿐, 할 말이 없다.

 

40년 전 고향마을이 물에 잠길 때도 좌절하지 않았다. 지금보다 훨씬 어려운 환경 속에서 꿋꿋이 일어선 경험이 있다. 그때 얻은 교훈은 사람은 죽거나 미치지만 않으면 언젠가 기적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넬슨 만델라의 말처럼 인생의 영광은 넘어지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일어서는 데 있는 것이다. 하늘이 불구덩이 속에서 무사히 대피하게 해 준 것은 이번에도 불타버린 지례를 새로 세워 보란 뜻이리라. 역경은 때로 호기심을 자극하고 도전과 극복의 대상이기도 한 것이다. 부지런히 복구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즐거움과 행복도 있을 것이다.

 

(’25년 3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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