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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그러니까 적어 놔야지!

by 답설재 2025. 4. 9.

 
 

 


가령 비닐봉지를 찾으러 가다가 어두워지기 시작하는구나 싶어서 전등부터 켜면 비닐봉지는 잊는다. 영영 잊기도 하지만 흔히 나중에 어처구니없어하게 된다.
이런 사실을 이야기하면 아내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까 적어 놔야지!"
적어 놓는다고? '비닐봉지 하나 가져오기' 이렇게?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 가정연락부처럼?

어이없는 충고지만 못 들은 척한다.


건망증이 심해지는 현상은 당사자인 나는  '그 참 재미있구나' 싶어도 아내는 싫어한다. 저러다가 치매가 오면 우린 이도저도 끝장이다 싶겠지? 끝장은 오고야 마는 건데... 그럴 때 나는 아내에게 그러겠지? "당신 누구야? 누군데 내게 이래라 저래라야? 정체를 밝혀!"


TV에서 치매 이야기 하는 걸 볼 때마다 나는 "저러다가 끝에 건강식품 선전한다! 틀림없다!"고 하면 아내는 그런 말도 듣기 싫어하고 "저 '약(!)' 좀 사 먹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나는 또 "달걀이나 치킨, 순대 사 먹을 돈도 없는데 저것까지 사 먹으면 고구마 살 돈도 없게 된다. 건강식품만 먹고 앉아 있어도 된다면 그리하자!"고 반론을 제기한다.

나는 왠지 치매에 걸릴 것 같진 않다. 근거를 댈 수는 없는 확신이다.
예전에 우리 고모네집 할아버지는 허구한 날 사랑방에 들어앉아서 담뱃대를 꽝꽝 두드리며 우리 고모에게 온갖 호령을 다 하고 심지어는 배변도 가리지 않고 그걸 벽에다 처바르기도 하며 온갖 행패를 부렸는데, 그런 장면을 목격할 때마다 우리 고모가 가련했지만 고모는 나를 눈곱 마치도 생각해주지 않았다.
그걸 생각하더라도 내가 그렇게 노망 든 늙은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젊은 사람들을 위한 치매 예방 수칙'


저건 퇴직자가 보는 월간지에서 오려둔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하니까 우습다. 이렇게 늙어가는 사람들에게 '젊은 사람들을 위한...'이라니, 약 올리려고 일부러 저런 걸 실었을까, 아니면 가족 중 젊은이가 있으면 보여주라는 것이었을까?

아무튼 100점 만점으로 내 상황을 채점해 보기로 했다.
문항이 4개니까 비중을 무시하면 한 문항당 25점, 정확한 측정이 어려우니까 각 문항에 대한 내 상태를 상·중·하 정도로 정하면 대충 점수가 나오겠지?
각 문항에서 상은 21점 이상, 중은 11~20점, 하는 10점 이하를 주기로 하자.
 
1번은 조심도 하기 전에 이미 살아 있으면 약을 먹어야 하는 신세이고, 술·담배는 47년간 실컷 하다가 끊긴 지 10여 년이지만 설탕, 밀가루 음식, 기름진 음식은 배가 불러도 더 먹어야 하니까 상·중·하 중 아무래도 하!
'하'라면 몇 점짜리 '하'일까?
어쩔 수 없어서 끊긴 했지만 술담배 끊긴 것에 점수를 주어서 9점!

2번은 취미활동으로 외국어 배우기, 독서, 보드게임, 만들기, 춤, 스포츠 등.
내가 하고 있는 건 독서밖에 없다. '등'이라고 했으니까 산책과 블로그 운영도 슬쩍 넣어버리자(이걸 포함시키면 비웃을 수도 있지만 내 맘대로 채점하는데 눈치 볼 것 있나? 없다!).
이 정도면 몇 점을 주면 될까?
좀 낮은 상태의 중으로 하고 13점!
 
3번은 3일 이상, 하루 30분 이상 운동하기.
아쉬운 건 잡초 뽑기 같은 노동은 아주 힘드는데도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눈길에서 팔을 부러뜨려 정형외과 드나들 때 이야기해 봤더니 노동은 운동은커녕 해롭단다. 나 원 참...
운동은 사절인데 다행히 걷기도 도움이 된다네? 그렇지만 내가 하는 게 걷기일까? 어슬렁어슬렁 세월없는 산책인데? 출퇴근 같은 것도 하지 않고 계단이라면 질색이니까 그거라도 넣어버리자.
이건 아무래도 '하 중 하'다. 0점은 너무하니까 3점!

4번,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인가?
나는 조그마한 일에도 스트레스를 받는다. 일이 있으면 그 일이 해결될 때까지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교직 41년, 그 후의 자문 활동 11년이 몽땅 스트레스받은 기간이다.
적당한 스트레스는 업무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고 하지만 나는 우울증에 걸릴 지경인 채 지냈으므로 결코 적당한 스트레스는 아니었다.
지금은? 지금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건 아니지만 딴에는 마음 다스리기를 이골 나게 하고 있다.
4번이 마지막이고 여기에서 점수가 나오지 않으면 낭패이니 중으로 하자. '중의 중'이면 15점! 내 마음대로 채점하니까 이럴 땐 유리하다. 오랫동안 아이들 성적 채점을 한 경험이 있으니까 내 채점에 대해 신뢰도가 전혀 없다고 하진 않겠지?

자, 그럼 합산, 39점이지? 9, 13, 3, 15점이니까 맞다.

39점!
이 점수에 관심을 가질 사람은 나 말고는 딱 한 명이다.
알게 되면 아무래도 내가 불리해진다.
TV에 자주 등장하는 그 건강식품을 사 먹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할 것이고, 좋은 말로 하지도 않을 것이니 내가 무슨 수로 설득하겠나.
 
그러니까 이 채점은 여기에만 기록해 놓고 아예 없었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