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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선물15

꽃다발을 한아름 선사합니다 어버이날, 스승의 날을 앞두고 많은 사람이 카네이션이나 꽃다발을 들고 가던 시절은 지나갔다. 전철역 입구에서는 으레 임시로 설치한 좌판에 갖가지 카네이션을 진열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가슴에 꽃을 달아주는 것보다 돈을 받는 게 좋다는 중론을 좇아 돈봉투를 주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꽃장사는 시들해졌고, 스승의 날이라도 일체의 선물을 금지한다는 엄중한 지시에 따라 아름다운 꽃다발을 안겨주는 예쁜 모습도 보기가 어려워졌다. 새로운 문화가 좋고 편하고 즐거운 사람이 많겠지만 옛일들이 그리워지는 사람도 없진 않을 것이다. '졸업식 노래'에는 재학생들이 부르는 1절에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재학생들이 1절을 부르면 졸업생들이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 2025. 5. 9.
쓰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고 바라보기만 한 물건 나는 이 전자계산기를 몇 번 쓰지 않았다. 앙증맞고 아까웠다. 여름옷 주머니에도 가볍게 들어가고, 키보드를 누를 때마다 오른쪽 위 16개 구멍으로부터 요염한 신호음이 울려 나와 실수를 예방해 주었다.세상은 빨리 흘러 이내 저렴하고 실용적인 계산기가 나와서 그걸 쓰게 되니까 저 '보물'은  보관만 하면 되었다.지금은? 스마트폰에 계산기 기능이 있어 '계산기 어디 있지?' 할 필요조차 없게 되었다.그럼 저 계산기를 사용한 적이 없었나?그건 아니다. 눈에 띌 때마다 '이게 잘 작동하고 있겠지?' 하고 키보드를 눌러 확인하곤 했다. 그러니까 저 요염한 계산기의 기능은 '작동 확인' 계산기였다. 1980년에 받은 선물이었다.44년째다!분실을 염려해서 덮개 안쪽에 사진까지 붙여 두었는데 저 파란색 사진은 내 사진이.. 2024. 11. 6.
조영수 동시집 《마술》 조영수 동시집 《마술》 그림 신문희, 청색종이 2018 책 중에서도 동시집을 읽는 저녁이 제일 좋았습니다. 그 시간이 선물 같았습니다. 그런 경험이 있으면 누구나 그렇다고, 선물 같다고 할 것 같았습니다. 세상이 복잡하지 않습니까? 이런 세상에 동시집을 읽고 있으면 그 시간 아이들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는데 이번에 조영수 동시집 《마술》을 읽으며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즐겁다 재미있다 밝다 맑다 가볍다 우울하지 않다 세상은 괜찮다 ..................... 이런 것들이 이 동시집을 읽는 동안의 느낌이었습니다. 아, 시라고 해서 굳이 무슨 운율 같은 걸 넣으려고 애쓰지 않은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억지가 보이지 않아서 마음이 더욱더 .. 2022. 9. 7.
선물, 저 엄청난 색의 세계 5학년 때였던가 6학년 때였던가, 모처럼 12색인 크레파스를 앞에 놓고 황홀했었다. '이런 색도 있단 말이지?' 온갖 색깔을 거쳐 무채색마저 흰색, 회색, 검은색 세 가지를 다 갖추어 이제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다. 바다를 그리면서 한 가지 색으로 칠하게 되므로 다른 책은 쓰지 않아서 좋았고 더구나 하늘도 파란색이어서 더 좋았다. 괜히 다른 색을 써야 한다면 그게 무슨 꼴인가 싶었다. 그렇지만 그 파란색이 한꺼번에 너무 많이 닳아서 곤혹스러웠다. 그래서 다음에는 초록과 검정 두 가지 색만 쓰면 되는 수박을 그렸고 그다음엔 노랑과 빨강 두 가지 색만 써서 태양을 그렸다. 크레파스가 퍽 퍽 닳은 걸 보면 색칠이 희미하긴 하지만 잘 닳지 않는 크레용이 더 실용적이긴 하다고 생각했다. 저렇게 화려한 존재의 .. 2022. 2. 14.
황순분 「코스모스」 코스모스 코스모스 아름답다. 길 옆에 가는 사람 아름답다. 코스모스는 길 가는 사람이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모른다. "코스모스는 길 가는 사람이 /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모른다." 이 구절에 깜짝 놀랐습니다. 저 코스모스가 반가워서 코스모스 꽃밭이 선물 같다고 썼던 자신이 한심하구나 싶었습니다. 저 한적한 길의 코스모스가 나를 보고 반가워했었다니 난 그것도 모르고...... 그러고 보니 "길 옆에 가는 사람 아름답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나는 저 코스모스가 순박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고 생각했지만 저 시인이 그 코스모스 옆으로 지나가는 나를 보고 아름답다고 할 줄은 꿈에도 몰랐고 그게 참 미안하고 쑥스러웠습니다. 이제 보니까 첫 문장 "코스모스 아름답다"는 평범함을 가장한 예사로움 같습니다. 그렇게 해놓고 그.. 2021. 11. 3.
내가 설˙추석 선물을 보내는 곳 교장선생님! 코로나로 전국이 혼란스러운데도 명절 한과는 길도 잃지 않고 잘 도착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염치를 무릅쓰고) 늘 건강하셔서 일 년에 한 번씩만 앞으로 이십 년간 더 받기를 원합니다. ㅋㅋ 그렇게 해 주실 거지요? 올해 한가위에는 긴 장마로 여름 감귤류가 너무 싱거워 따가운 가을 햇살을 담뿍 받은 것으로 기다렸다 보내드릴게요. 항상 건강 조심하시고 ○○엔 가지 마옵시길...^^ 좀 서글퍼서 밝히기가 싫기는 하지만 이제 나는 일 년에 두 차례의 명절 선물을 딱 두 군데만 보냅니다. 한 군데는 교육부에서 근무하며 만난 열한 명의 장관 중 한 분입니다. 그분은 내가 교장으로 나가게 되었을 때 "선비처럼 살라"고 부탁했고, 학교를 방문해서 아이들에게 한 시간 강의를 하고 선생님들과 두어 시간 대화를 .. 2020. 9. 22.
기억 혹은 추억 목록 2007.11.1. 실비 지라르데 글, 퓌그 로사도 그림, 이효숙 옮김 《교통안전 이야기, 앗, 조심해!》 비룡소, 2007. 2007.11.17. 디디에 레비 글, 조제 파롱도 그림 《맛있는 냄새가 나요》삼성당, 2006.(교장실) 2007.12.24. 아미 크루즈 로젠달 글, 레베카 도티 그림, 유경희 옮김 《왕짜증 나는 날》 김영사, 2007. 2008.1.23. 알랭 그루세 글, 크리스티앙 오브랭 그림, 이문영 옮김 《우주비행사 초록개미》 삼성당, 2006. 2008.4.1. 허은실 글, 홍기한 그림 《출렁출렁 기쁨과 슬픔》 아이세움, 2007. 2008.4.10. 강무홍 글, 박윤희 그림 《우당탕 꾸러기 삼남매》 시공주니어, 2007. 2008.5. 김리리 글, 한지예 그림 《나는 꿈이 너무 많.. 2019. 9. 19.
나의 호시절 70대 초반을 지나는 한 여성의 고운 일상을 날마다 찾아가 확인하며 지낸다.사시사철 '옥상 정원'의 꽃 이야기가 피어난다. 분명히 전문적인 그 일을 구체적으로 쉽게 써서 보여주고 있어 한 해 두 해 시간이 가면서 그 꽃들 속에서 나이들어 가는 여성의 일상을 바라보는 시간이 아깝지 않게 되었다. 일전에는 '나의 호시절'이라는 글을 보았다.전업주부로 생활한 젊은 시절은 바쁘고 힘들었지만―여자라면, 혹은 전업주부라면 당장 나도 그랬다고 하겠지? 심지어 남자인 나도 그러니까― 그때가 그들 부부에게는 '호시절'이었다고 했다.이후 손주를 데리고 살던 10여 년 전까지의 세월 또한 '호시절'이었고―그렇다! 손주 보는 일이 끝난 다음 갑자기 쇠잔한 모습을 보인 노인이 얼마나 많은가!― 꽃이나 가꾸면서 부부 둘이서 .. 2017. 5. 4.
「선물」 Ⅰ 누구를 만나러 갈 때는 꼭 '뭘 들고 가지?' 생각합니다. '빈손으로 어떻게?' 누가 찾아왔다가 돌아갈 때도 그렇습니다. 준비해 놓은 건 없고 빈손으로 돌아가게 할 수는 없고 해서 얘기를 나누는 중의 앉은자리에서라도 두리번거립니다. '내줄 만한 게 없을까?' 평생 그 생각을 가지고 지냈지만 그게 실천하기가 그렇게 쉽지는 않습니다. Ⅱ 지난해 추석에는 어느 고등학교 교문에서 이렇게 적힌 현수막을 봤습니다. "선물 안 받고 안 주기 운동" 그런 현수막을 달아 놓으라고 문구까지 정해주었을 것 같고, '오죽하면……' 싶기도 하지만 한심하고 기가 막혀서 한참동안 바라보고 서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어디로 가나…… 이 사회……'1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 있으면 교육적으로 바로잡는 것이 '교육'이고, 더구나 이.. 2016. 2. 26.
『다시, 봄』 장영희 쓰고 김점선 그림 『다시, 봄』 샘터, 2014 장영희 교수가 29편의 영미시(英美詩)를 열두 달로 나누어 싣고 해설했습니다. 백과사전의 소개는 이렇습니다. 장영희(張英姬, 1952~2009) 영문학자, 수필가, 번역가. 소아마비 장애와 세 차례의 암 투병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따뜻한 글로 희망을 전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내 생애 단 한번", "문학의 숲을 거닐다" 등이 있다. 봉급을 받게 되어 마음대로 책을 살 수 있게 되었을 때 구입한 책 중에는 흔히 영문학자 장왕록 교수가 번역한 책이 있었는데, 장영희 교수는 그분의 따님이라는 걸 나중에 알고 두 사람을 부러워했습니다. 소아마비가 심해서 어릴 때는 누워서 살았답니다. 어머니가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업고 다녔고, 화장실에 갈 때마다 .. 2016. 2. 14.
선물 혹은 그리움 청소기를 앞세우고 돌아다니다가 발견했습니다. ― 자칫하면 지울 뻔했구나. 고것들이 와서 남겨 놓았습니다. ― 어느 녀석일까? ― 뭘 하려고 이쪽으로 갔을까? 다 그만두고 앉아 있었습니다. 2015. 8. 11.
그 아이가 보낸 엽서와 음악 그 아이가 보낸 엽서와 음악 예전에 교장실 청소를 하러 오던 그 아이입니다. 지금은 쓰이지 않지만 '등대'라는 제 닉네임을 지어준 아이입니다. 그 아이는 교장실에 오면 청소를 하는 시간보다 저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더 많았습니다. 책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교장실 청소는 하면 더 좋고, 안 해도 별로 표가 나지 않아서 오고 싶은 날만 오는 아이도 있고, 그 아이처럼 매번 오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여러 사람이 사는 세상이니까 질서와 규칙도 지켜야 하고 누군가 청소도 해야 하지만, 그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가도 좋고 가지 않아도 좋고, 가서 청소하고 싶은 날은 가고, 바쁜 일이 있거나 약속이 있거나 하면 누구에게 말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시간을 낼 수 있고, 그게 얼마나 자유롭고 좋은지 그 아이들이 지.. 2010. 9.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