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전자계산기를 몇 번 쓰지 않았다. 앙증맞고 아까웠다.
여름옷 주머니에도 가볍게 들어가고, 키보드를 누를 때마다 오른쪽 위 16개 구멍으로부터 요염한 신호음이 울려 나와 실수를 예방해 주었다.
세상은 빨리 흘러 이내 저렴하고 실용적인 계산기가 나와서 그걸 쓰게 되니까 저 '보물'은 보관만 하면 되었다.
지금은? 스마트폰에 계산기 기능이 있어 '계산기 어디 있지?' 할 필요조차 없게 되었다.
그럼 저 계산기를 사용한 적이 없었나?
그건 아니다. 눈에 띌 때마다 '이게 잘 작동하고 있겠지?' 하고 키보드를 눌러 확인하곤 했다. 그러니까 저 요염한 계산기의 기능은 '작동 확인' 계산기였다.
1980년에 받은 선물이었다.
44년째다!
분실을 염려해서 덮개 안쪽에 사진까지 붙여 두었는데 저 파란색 사진은 내 사진이긴 하지만 저걸 어떻게 마련했는지 지금은 기억하지 못한다.
신기한 건 그동안 나 자신은 이곳저곳 고장이 나서 고물이 되었는데 저 계산기는 건전지조차 한 번도 교체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작동은 처음과 같아서 '신품' 취급을 하고 있다.
오래되어 값질 만한 것,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것, 그러니까 얇은 책(가령 "청록집"), 테이프(가령 교육에 관한 것이어서 꼭 기억하고 싶었던 어느 대통령 육성이 담긴 녹음용) 같은 것들은 내 집에 와서 1박 2일씩 머물고 간 도둑들이 다 훔쳐 갔는데 이 계산기는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모르겠다.
어제도 저 계산기 기능에 변함이 없는지 확인하고 사진도 두어 장 찍으며 생각했다.
이걸 왜 선물했을까?
무슨 대단한 일을 하는 양 아이들 성적을 계산하는 모습이 딱해서였을까?
이 사람 이러다가 언제고 계산 착오로 큰 실수 하지, 싶어서였을까?
그건 그렇고, 이제 이 계산기 기능은 뭐지?
추억용?
추억, 그따위는 진저리가 난다.
폐기처분해야 하나?
무슨 소리! 그건 아니다!
그럼 왜 갖고 있지?
모르겠다.
건전지는 언제 다 닳아서 작동을 멈추게 될까?
하루하루 줄어드는 내 몸의 에너지가 고갈되어 마침내 숨을 멈춘 뒤 누가 저 계산기를 발견하고 '뭐지?' 하다가 요염한 신호음이 울려 나오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그렇긴 하겠지. 나는 저 계산기보다 수십 년 먼저 태어났으니까 저게 나보다 더 늦게까지 오래오래 작동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지.
어쩌면 이 눈물겨움.
이젠 쓸모도 없게 된 물건, 그럼에도 간직하고 싶어 하는 어찌할 수 없는 이 허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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