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기 모임에 나가지 못하면 누군가가 사연과 함께 사진을 보낸다.
면면을 살펴보며 누가 누군지 확인하고 어슴푸레한 경우에는 사진을 확대해 보기도 하지만 이미 알아보지 못한 경우에는 확대해 봤자 별 수 없다.
고소를 금치 못하는 것은 학교 다닐 때 잘 나가던 애들도 함께 폭삭 늙었다는 것이다. 혈기왕성해서 팔팔 뛰던 녀석들이 하나같이 헙수룩한데, 억지로 미소를 짓거나 의젓하게 보이려고 애쓴 표정이 역력하여 더욱 가련해 보인다. 검은 머리는 분명 염색을 한 거지. 별 수 있나!
여자들도 별 수 없는 건 마찬가지여서 지금도 매력을 느끼게 하는 사람은 찾을 수 없다. 고약한 일이다.
아, 이럴 수가...... 이렇게 안타까운 일이 있나!
이럴 수가?
'사진보기'에서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건 결국 내 모습이다.
그 사진에 내 모습이 들어 있지 않은 건 다행한 일이지만 그럼 나는, 내 모습은, 그들과 다른가? 적어도 사진을 구경하는 시간에는 잠시 잊게 된다.
그리고 바로 논리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이들의 모습이 이렇다면, 이 사진 속에 내가 들어 있다면, 나 또한 어쩔 수 없는 꼴이 아니겠는가.'
알제의 거리를 돌아다니며 여러 날 저녁을 보냈습니다. 전에 알던 여자애들은 뚱뚱한 엄마들이 되어 있더군요.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서 제 나이를 읽게 되지요. 돌아올 때의 우울함 역시 떠날 때의 그것 못지않아요.
알베르 카뮈가 스승 장 그르니에에게 보낸 편지(1948년 3월 9일, 34세)의 한 부분이다. 34세의 팔팔한 나이에도 그렇다면 여든이 되어버린 사람들은 이미 사그라들대로 사그라든 것이 정상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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