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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찰스 부코스키10

글쓰기의 어려움 글을 쓸 땐 미끄러져나가는 기분으로 써야 한다. 말들은 절뚝거리고 고르지 못할 수도 있지만, 미끄러져나가기만 한다면 문득 그 어떤 즐거움이 모든 걸 환히 비추게 된다. 조심조심 글을 쓰는 건 죽음과 같은 글쓰기이다. 셔우드 앤더슨은 말을 공깃돌이나 음식 조각처럼 갖고 노는 데 극히 능했다. 그는 말들은 종이 위에 칠했다. 그런데 그 말들이 너무도 단순해서 독자는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문들이 열리고 벽이 반짝이는 걸 느낄 수 있을 정도다. 양탄자며 신발, 손가락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앤더슨은 말들을 마음대로 다뤘다. 즐거운 말들을. 하지만 그것들은 또한 총탄과도 같다. 말들이 곧바로 독자를 죽일 수도 있다. 셔우드 앤더슨은 뭔가를 알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헤밍웨이는 지나치게 애를 썼다. 애쓴 흔적이 그.. 2022. 3. 8.
일본 여자들과 미국 여자들 찰스 부코스키라는 괴짜 작가가 쓴 소설 『팩토텀』을 읽었습니다('팩토텀'을 사전에서 찾아봤더니 ① 잡역부 ② 막일꾼 ③ 막일을 하는 하인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3월에 읽었으니까 그때 우리는 이미 코로나에 휩싸이고 있었던 것인데 지금 생각하니까 마치 옛날 옛적에 읽은 느낌입니다. "같이 들어가서 한잔 하고 가요." "뭐라고? 술 먹고 감옥에 갔다 나오자마자 바로 또 술을 마시고 싶다는 얘기냐?" "바로 이럴 때가 술 생각이 가장 간절한 법이에요." "네 엄마한테는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술을 마시고 싶었다는 얘길랑은 절대로 하지 마라." 아버지가 경고했다. "여자도 먹고 싶네." "뭐라고? 소설은 아주 난감한 것이어서 이게 부자간에 나누는 대화이니 말해 뭣하겠습니까? 나는 독후감 끝에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2020. 10. 6.
찰스 부코스키 《창작 수업》 찰스 부코스키 《창작 수업》 THE LAST NIGHT OF THE EARTH POEMS 황소연 옮김, 민음사, 2019 나는 찰스 부코스키(등장인물 : 헨리 치나스키)가 폭로해버린 아버지 유형에 가까운 아버지라는 얘기를 써버렸으니까 그가 다른 시에서는 아버지를 또 어떻게 표현해 놓았는지 여기에 옮겨 놓고 싶었습니다. 이제 와서 나 자신에게 무슨 복수 같은 걸 하고 싶다기보다는 '폭로'쯤으로 해석하면 적당할 것입니다. 실제로 부코스키(치나스키)처럼 그렇게 하는 자식들이 없지도 않습니다. (…) "한심한 인간." 어머니는 말하고 나서 일어나 베란다 밖을 내다보았다. "여자도 하나 끼어 있네." 어머니가 말했다. "꼭 남자처럼 생겼어." "거트루드*예요." 나는 말했다. "근육 자랑하는 남자도 있구나." 어.. 2020. 3. 27.
아버지 아버지는 내게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털어놓았다. 「유엔, 이건 내 체질이 아니야. 그저 떠드는 것, 항상 떠드는 것뿐이라니까. 나란 사람은 행동하는 사람인데 말이야.」 이해심 깊은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네 하루는 어땠니?」 「항상 그게 그거.」 「학교에서는 1등, 발레에서는 별로 빛을 못보고?」 「응. 하지만 나는 무용가가 될 거야.」 「물론이지.」 아버지는 그냥 말뿐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친구들에게 내가 외교관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걔는 나를 닮았거든.」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 『배고픔의 자서전』의 한 장면입니다.* 이 산뜻한 대화를 읽고 한참 동안 '아버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부러웠고 부끄러웠습니다. 물론 악당들도 임자를 만날 때가 있다. 지금도 기억난다. 언젠.. 2020. 3. 23.
찰스 부코우스키 《팩토텀》 찰스 부코우스키(장편소설) 《팩토텀》Factotum1 석기용 옮김, 문학동네 2017 1 "같이 들어가서 한잔 하고 가요." "뭐라고? 술 먹고 감옥에 갔다 나오자마자 바로 또 술을 마시고 싶다는 얘기냐?" "바로 이럴 때가 술 생각이 가장 간절한 법이에요." "네 엄마한테는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술을 마시고 싶었다는 얘길랑은 절대로 하지 마라." 아버지가 경고했다. "여자도 먹고 싶네." "뭐라고?"(45) 아무래도 갈 데까지 간 인간인가 싶었습니다. 2 이런 것도 있습니다. "당신 얼굴은 아주 이상하게 생겼어요."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못 생긴 건 아니에요." "일에 찌든 4번 발송계원이죠." "사랑에 빠져본 적 있어요?" "사랑은 진짜 인간들이나 하는 겁니다." "당신도 진짜처럼 들리는데요.. 2020. 3. 19.
찰스 부코스키 《위대한 작가가 되는 법》 찰스 부코스키 Charles Bukowski 《위대한 작가가 되는 법》 HOW TO BE A GREAT WRITER 황소연 옮김, 민음사 2016 난 내가 죽을 때 누가 우는 거 별로야, 그냥 처분 절차나 밞아, 난 한세상 잘 살았어, 혹여한가락 하는 인간이 있었다고 해도, 나한텐못 당해, 난 예닐곱 명분의 인생을 살았거든, 누구에게도뒤지지 않아.우리는, 결국, 모두 똑같아, 그러니 추도사는 하지 마, 제발,정 하고 싶으면 그는 경마 도박을 했고대단한 꾼이었다고 해 줘. 속표지의 이 시(「잊어버려 forget it」) 원문을 찾아보았다. "자, 들어봐,"로 시작되고, "다음 차례는 당신이야, 당신이 모르는 걸 내가 알고 있거든, 그럴 수도 있단 얘기야."로 끝난다. 여러 작품에서 기회 있을 때마다 욕을 .. 2020. 3. 17.
찰스 부코스키 《사랑은 지옥에서 온 개》 찰스 부코스키《사랑은 지옥에서 온 개》 LOVE IS A DOG FROM HELL 황소연 옮김, 민음사 2016 탈출 검은 과부 거미*한테서 탈출하기란 예술에 버금가는 대단한 기적. 그녀는 거미줄로 당신을 천천히 끌어당겨 품에 안고는 기분 내킬 때 죽일 거야 당신을 품에 안고 피를 쪽쪽 빨아서. 내가 검은 과부한테서 탈출한 건 그녀의 거미줄 안에 수컷들이 많아서였어 그녀가 한 놈을 품다가 다른 놈을 품고 또 다른 놈을 품는 사이 나는 애써 속박을 풀고 빠져나와 전에 있던 데로 갔지. 그녀는 내가 그리울 거야 내 사랑이 아니라 내 피 맛이. 그래도 멋진 여자니까 다른 피를 찾아내겠지. 꽤 멋진 여자야, 죽음도 불사하고 싶을 만큼 하지만 그뿐이야. 나는 탈출했어. 다른 거미줄이 눈앞에 아른거리는군. 이야기가.. 2020. 2. 11.
찰스 부코스키 Charles Bukowski 《망할 놈의 예술을 한답시고》 찰스 부코스키 Charles Bukowski 《망할 놈의 예술을 한답시고》 THE LAST NIGHT OF THE EARTH POEMS: HELL IS A CLOSED DOOR 황소연 옮김, 민음사 2019 연말에 시인 雪木에게 큰 실례를 한 일이 있어서 그걸 드시고 입 좀 닫아주었으면 싶어서 꿀을 사 보냈는데 한동안 아무 말이 없어서 '통했구나!' 생각하는 사이 느닷없이 날아온 우편물을 펴보았더니 '엇?' 이 시집이 들어 있었습니다. 망할 놈의 예술을 한답시고 배를 곯을 때는 지옥은 닫힌 문이다 가끔 문 열쇠 구멍으로 그 너머가 얼핏 보이는. 젊든 늙었든, 선량하든 악하든 작가만큼 서서히 힘겹게 죽어 가는 것은 없다. 속표지에 적힌 이 시(「지옥은 닫힌 문이다」 부분)부터 읽어보고 나는 다시 雪木을 생.. 2020. 1. 7.
찰스 부코스키(소설) 《호밀빵 햄 샌드위치 Ham on Rye》 찰스 부코스키 Henry Charles Bukowski 《호밀빵 햄 샌드위치 Ham on Rye》 박현주 옮김, 열린책들 2016 1 '언더그라운드의 전설 찰스 부카우스키의 말년 일기'라는 부제가 붙은 『죽음을 주머니에 넣고(The Captain is Out to Lunch and Sailors Have Taken Over the Ship』(1998)를 보고 이 작가의 작품을 읽고 싶었는데 우리 동네 도서관에는 『우체국』(1971), 『팩토텀』(1975), 『여자들』(1978) 같은 건 없고 『호밀빵 햄 샌드위치』(1982)밖에 없어서 '어쩔 수 없지' 하고 빌렸고, 단숨에 읽었다. 2 가난과 폭력에 시달리며 어디에서도 위안을 찾을 길 없는 소년 헨리 치나스키의 이야기다. 유년의 희망과 기대, 고통과 좌.. 2019. 3. 25.
찰스 부코스키 《죽음을 주머니에 넣고》 언더그라운드의 전설 찰스 부코스키의 말년 일기 《죽음을 주머니에 넣고》 Henry Charles Bukowski The Captain is Out to Lunch and Sailors Have Taken Over the Ship(1998) 찰스 부코스키, 로버트 크럼 그림, 설준규 옮김 모멘토 2015 1 경마가 없는 날, 정상이라는 느낌이 드는 게 묘하다. 헤밍웨이1에게 투우가 필요했던 까닭을 난 안다. 그에게 투우는 삶이라는 그림을 끼울 액자 같은 것으로, 자기가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를 일깨워주었으리라. 때때로 그걸 우린 잊어버린다. 기름 값을 지불하고 엔진오일을 교환하는 등등에 정신이 팔려서, 대다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준비가 없다. 제 자신의 죽음이건 남의 죽음이건. 사람들에게 죽음은 충격이.. 2017. 2.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