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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이별15

이별하기 사무실에 나가고 있을 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람들을 만나면 마지막 만남이라고 생각하자. 마지막 만남일 수 있다고 생각하며 만나고 헤어지자. 뭐라도 갖고 가게 하자.' 꽤나 괜찮은 생각이라고 스스로 대견해했는데 사람이 별 수가 없어서 그렇게 생각해 놓고도 얻어먹기도 하고 빈손으로 돌아가게도 했다. 그리고는 곧 코로나가 번지고 점점 더 심각해졌고 이래저래 사무실에도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꽤 괜찮은 생각을 하긴 했지만 소득 없는 아이디어에 그치고 만 것이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나는 요즘도 별 수 없다. 만나는 사람도 거의 없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지만 누굴 만나든, 누가 찾아오든, 이번엔 누가 내야 할까를 계산하게 된다. 내게는 어렵기 짝이 없는《일방통행로》(발터 벤야민)를 읽다가 그때.. 2024. 3. 22.
정끝별 「세상 가장 작은 뼈에게」 귓속 고막에서 달팽이관 사이 이소골을 이루는 추골, 침골, 등골이라는 가장 작은 뼈들이 가장 나중에까지 듣는다기에 들을 때 속귀의 뼈들이 움직인다기에 임종을 선고한 의사가 나가자 아직 따뜻한 엄마 겨드랑이에 손을 묻고 작은 목소리로 가장 작은 엄마의 뼈들을 어루만지며 엄마 귀에 대고 말했다 엄마, 엄마가 돌아간 시간을 잘 기억할게 엄마도 잘 기억해서 그 시간에 꼭 찾아와야 해 슬픔이란 얼마나 신비로운지. 슬픔도 없다면 무엇을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을지. 보면 더 이야기할 수가 없는 경우가 있다. 들으면 더 이야기할 수가 없는 경우도 있다. 시를 읽고 그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읽으면 더 이야기할 수가 없는 경우가 있다. 『현대문학』 2024년 1월호에서 이 시를 보았다(나민애, 시 격월평 「상실의 시대, .. 2024. 1. 19.
나이듦 : 알고자 하던 지성, 행하려던 의지가 부질없어 보인다 사부님이 두 팔을 벌렸다. 우베르티노는 사부님은 껴안으며 떨리는 소리로 울먹였다. 「잘 있게, 윌리엄. 그대는 광기의 용광로를 고아 먹은 듯한, 건방지기 짝이 없는 영국인이었네만, 마음은 늘 바로 쓸 줄 아는 참 좋은 사람이었네. 다시 만나게 되기는 될까?」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하느님도 그걸 바라실 테고요.」 사부님이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걸 바라시지 않았던 모양이다. 앞에서도 썼다시피 우베르티노는 그로부터 2년 뒤에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성미가 불칼 같고 젊은이 뺨치게 혈기방장한 이 노인의 인생은 이렇듯이 험한 모험의 가시밭길이었다. 어쩌면 우베르티노는 성인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 굳센 믿음의 값을 한 자리 성위(聖位)로 갚아 주실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2023. 6. 27.
그새 또 입춘 마음대로 시간이 가서 그리 차갑진 않은 바람이 붑니다. 야단스레 또 한 해의 겨울이 오더니 맥없이 사라지려 합니다. 나는 마음뿐이어서 말도 꺼내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자꾸 멀어집니다. 2023. 2. 3.
최은영 단편 《답신》 그렇게 지내서는 안 될 사이에 담을 쌓고,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게 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사연이야 개별적인 것이어서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나는 그런 일에 대해 막막한 느낌입니다. 어찌할 수가 없다는 한계를 느낍니다. 젊었던 시절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못할 일은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습니다. 지금은?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일들뿐입니다. 이것이 늙음의 정체가 아닐까, 생각하기에 이르렸습니다. 이건 누가 고치라고 한다고 고쳐질 것은 아닙니다. 나에게는 이제 아무것도 넉넉지 않다는 현실적인 한계 때문이 아닐까 싶은, 어렴풋한, 아니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 얘기할 필요도 느끼지 않고 그럴 힘도 없습니다. 그런 얘기 한 편의 장면들 중 '현재' '과거' '관점'.. 2021. 8. 3.
베로니크 올미 《비는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베로니크 올미 《비는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LA PLUIE NE CHANGE RIEN AU DESIR 최정수 옮김 Human & Books 2006 1 5년 전에 헤어진 부부가 비 내리는 오후, 생 쉴피스 광장에서 다시 만나 뤽상부르 공원에서 키스를 나누고 뤽상부르 호텔에 들어가 집요하고 쓸쓸한 정사를 나누고 헤어집니다. 2 여자는 극심하게 쇠약해지고 있습니다. 남자가 먼저 전화를 했고 여자가 만나자고 했고 남자가 수락했습니다. 여자는 "울지 않겠다고, 그녀 안에서 굴종하려 하는 모든 것에, 세상을 포기하고 혼란에 몰아넣으려 하는 모든 것에 저항하고 그것들을 제지하겠다고 맹세"합니다. "이 남자가 모르고 그녀에게 안겨다 준 놀라움과 분노 때문에 이 남자 앞에서 울부짖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112) .. 2018. 5. 27.
베르나르 베르베르 〈아기의 애도〉 아기는 생후 8개월이 되면 특유의 불안감을 경험하게 된다. 소아과 의사들은 그것을 〈제9개월의 불안〉이라고 부른다. 엄마가 자기 곁을 떠날 때마다 아기는 엄마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엄마가 죽었다고 믿는 아이는 울음을 터뜨리고 심한 불안감을 드러낸다. 그 나이에 아기는 세상에서 자기가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기의 애도〉는 아기가 어머니로부터 따로 떨어져 있음을 의식함으로써 생기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기는 한 몸 같은 결합을 단념하고 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아기와 엄마는 떼려야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아기는 혼자 있게 될 수도 있고, 엄마 아닌 낯선 사람들―아기에겐 엄마 아닌 모든 사람, 경우에 따라서는 아빠, 할아버지, .. 2018. 2. 1.
역에서 역에서 Ⅰ 언제 어떻게 해서 이 산마루 고갯길에 와 있는지 모릅니다. 내가 이걸 왜 들고 있었나 싶은 자루가 나도 모르게 땅에 떨어졌고, 순간 그 속의 가루가 죄다 쏟아져 어떻게 할 사이도 없이 산산이 날아가버렸습니다. 바람이 불었을 것입니다. 그만 내려가야 합니다. 세월이 갔기 .. 2016. 5. 17.
모두 떠났다 Ⅰ 그 식당은 저 산 오른쪽 기슭에 있습니다. 자동차 전용도로로 춘천이나 양평 쪽으로 가면서 먼빛으로 한적한 산비탈의 그 식당 건물을 바라본 사람들은 누가 찾아갈까 싶었겠지만, 주말이나 공휴일에는 점심, 저녁 시간에 걸쳐 종일 사람들이 몰려들어 빈자리를 찾기가 어려울 때도 있었습니다. 식당에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계산대 옆에 커피 자판기, 원두커피 포트가 준비되어 있고, 맞은편 주방 앞에서는 분명히 안주인의 친정어머니일 듯한 할머니가 단정한 모습으로 마늘을 장만하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안주인의 다소곳한 품위를 그대로 물려준 어머니답게 더러 화장실을 갈 때가 아니면 여름에나 겨울에나 늘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할머니의 성품은 마늘조각에 그대로 나타나서 어느 조각이나 '무조건' 같은 크기였고 자른 모양도 한.. 2015. 1. 4.
가브리엘 루아 『삼리윙, 그대 이제 어디로 가려는가?』Ⅰ 가브리엘 루아 『삼리윙, 그대 이제 어디로 가려는가?』 김화영 옮김, 현대문학 2004 『세상 끝의 정원』 중에서 삼리윙, 빈손으로 캐나다에 도착한 그 중국인 사내는, '구름 떼처럼 많은 인부들 중의 하나로, 부두에서 일하는 한 알갱이의 인간, 먼지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 그에게는 이것이 바로 내 것이다 하고 기억해낼 만한 것'은 이름 정도가 고작이었습니다. '우리 중국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 이 세상 어딘가 다른 곳으로 가면 좀더 낫게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고, 그러다가 '중국의 여러 현과 도를 합쳐놓은 것보다 땅덩어리가 더 넓으면서도 사람이 별로 살지 않아서 텅 빈 것 같은 나라가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고, 동포 수천 명과 함께 그 희망의 나라로 떠납니다. ♣ 그리하여 도착한 곳.. 2013. 2. 26.
박형준「홍시」, 그리고 죽음에 대하여 고상한 척해 봐도 별 수가 없는 게 인간입니다. 돈이 많아 봐야 별 수 없고, 친구가 많아 봐야 별 수 없고, 자녀가 많고 다 잘 되었다 해도 별 수 없는 게 인간, 죽음입니다. 그것이 생각나게 하는 시 한 편을 봤습니다. ♣ 아내는, 내가 병원에 드나들게 됐는데도 별 기색이 없었습니다. 저러다가 말겠지, 그렇게 생각했거나 뭐 별 일이야 있을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며칠간 병실에 들어앉아서 별별 검사를 다 하고 있는 걸 좀 못마땅해하기도 했는데, 큰 병원으로 옮겨 가슴을 열고 중환자실에 들어가자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일반병실에 있다가 수술을 하거나 하여 중환자실에 들어가게 되면 당연히 그 일반병실은 비워야 합니다. 아내는 그걸 모르고 '이제 드디어 죽는구나!' 했답니다. 그러니 그 병실을 .. 2012. 7. 11.
오츠 슈이치 『삶의 마지막에 마주치는 10가지 질문』 C일보(2011.11.5)의 책 소개에서 「마지막 길 가려는 이에게 "가지 말라"고 할까, "편히 가라"고 할까」라는 제목을 봤습니다. 책 내용에서 특히 눈길을 끌 수 있는 자극적인 제목을 뽑은 것인 줄은 당장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목만 그런 것은 아니어서 "사회의 변화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죽음의 초보자로 만들었다. 때문에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죽음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착각한다."(108)는 내용을 딴 「당신은 TV에서 본 것처럼 죽지 않는다」는 소제목도 충격적이었습니다. 또 있습니다. 「가족도 피가 마른다」 「고독사는 나쁘다고 쉽게 말하지 말라」 같은 소제목도 그 내용이 궁금했습니다. 그 신문은 독자들을 위한 서비스를 확실하게 하겠다는 듯, 웬만큼은 궁금증을 풀 수 있도록 책의 .. 2011. 12.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