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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역에서

by 답설재 2016. 5. 17.






역에서












  언제 어떻게 해서 이 산마루 고갯길에 와 있는지 모릅니다.


  내가 이걸 왜 들고 있었나 싶은 자루가 나도 모르게 땅에 떨어졌고, 순간 그 속의 가루가 죄다 쏟아져 어떻게 할 사이도 없이 산산이 날아가버렸습니다. 바람이 불었을 것입니다.


  그만 내려가야 합니다. 세월이 갔기 때문입니다.

  잠깐 이렇게 서 있습니다.





  세월이 그렇게 흐른다는 건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들었다 해도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듣고 읽었지만 건성이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논리적으로만 이야기했고, 그건 결코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이 아니었습니다.


  모두들 마찬가지입니까?




  자루 속에 들어 있던 가루를 바람에 다 날려 보내고도 이렇게 서 있습니다.

  이 스산한 고갯마루에서……


  여기에 이르면 다 소진된 상태일 것이라는 짐작은 했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갖지 않은 상태가 될 것이라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줄 알았더라면 헤어질 때마다 무엇이든 나누어줄 걸 그랬습니다.

  그게 헤어짐이고 마지막이라는 건 매번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서로 그리 반갑거나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을 수도 있고,

  또 만날 줄 알았다고 변명할 만한 사이일 수도 있고,

  심지어 별생각 없이 헤어졌을 수도 있고,

  어쨌든 굳이 '이별'이라는 말을 하지 않고 헤어졌는데 마지막이 되어버렸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쿠키 한 봉지 정도야 얼마든지 좋을 일 아니었겠습니까?





  그 이별들이 애틋한 것이 아니어서 그렇습니다.

  그런 이별들이기에 섭섭해하는 것입니다.

  가루 날리듯, 낙엽 지듯, 떨어지고 날아가버려 몇 잎이나 남았는지 모르지만, 눈여겨보도록 하겠습니다.

  제대로 된 이별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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