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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영혼18

영혼 ② 호통치는 강아지 살아 있는 '진짜' 강아지인데 태엽을 감아 놓으면 "멍! 멍!" 짖으며 방바닥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하얀 장난감 강아지 같았다. 너무 더워서 일거리를 가지고 냇가로 나온 할머니를 지키고 있었다. 지금 "가던 길이나 갈 것이지 왜 기웃거리고 있느냐"는 듯 내 오른쪽에서 녀석을 내려다보는 노인을 부릅뜬 두 눈으로 꾸짖고 있는데, 딴에는 앙칼지게(그래봤자 앙증맞게, 그러니까 귀엽게) 짖어대는 중이었다. 하도 용을 써며 짖어서 앞뒷발이 약간의 시차를 두고 번갈아 뛰어올랐다. 저게 어떻게 무슨 짐승이나 새를 쫓을 때 한 발을 쾅 쾅 구르며 위협하는 사람처럼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싶었다. 강아지는 한 발로 구르는 게 아니라 두 발, 아니 네 발을 다 써서 그렇게 구르며 호통을 치고 있어서 더욱 앙증맞고 귀엽고(딴에.. 2024. 3. 4.
죽음 너머로의 대화 나는 오래전에 죽은 아버지, 어머니와의 대화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어쩌다가 몇 년에 한 번씩 나도 죽어 저승에 가면 만나서 회포를 풀 수 있을까 싶기는 했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가끔이긴 하지만 전보다는 자주 어머니를 생각하게 되었고, 특히 아버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하게 되었다. 또 전에는 내게 짐을 맡기고 일찍 세상을 떠난 두 분에 대한 원망이 컸지만 최근에는 있었던 일을 떠올리거나 이 일 저 일로 미안한 마음 같은 것들을 떠올린다. 원망하는 마음은 절로 사라졌다. 어머니는 저승으로 간지 51년, 논밭에서 죽도록 일만 한 일생, 큰댁에 걸핏하면 나락을 다 퍼주는 아버지와 다투던 일, 내가 초임 발령받은 학교 운동장에서 사진 찍은 일, 아내가 첫째를 임신하여 만삭의 몸으로 아픈 어머니.. 2023. 11. 17.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2》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2》 정서웅 옮김, 민음사 2009 파우스트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주선으로 온갖 세상을 다 경험한다. 심지어 헬레나와 만나 아들까지 낳으며 살았다.("구운몽"?) 제우스의 딸 헬레나는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아내. 메넬라오스(Menelas)는 왕비 헬레나가 트로야의 파리스 왕자에게 유괴당하자 전쟁을 일으켜 토로야를 멸망시켰다. 파우스트 내게 아직 두 눈이 있는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아름다움의 샘물, 철철 넘쳐나는 게 보이는가? 나는 무서운 여행길에서 가장 축복받은 선물을 가져왔구나. 지금껏 세계는 얼마나 보잘것없고 폐쇄돼 있었던가! 하지만 내가 사제가 된 이후로 어떻게 변했는가? 비로소 바람직한 것, 근본이 있고 영속적인 것이 되었다! 만일 내가 그대와 다시 떨어지.. 2022. 10. 26.
"무슨 생각해?" 저 녀석은 엄청 작았습니다. 방충망과 문틀 사이, 방충망을 설치한 회사를 믿고 당연히 그 틈이 없다고 생각해온 나로서는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없는 그 틈새를 뚫고 거실로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지난여름 폭우 때였습니다. 이틀째 그렇게 들어왔고 나갈 때는 꼭 나를 성가시게 했습니다. 8월 10일 아침에는 아내가 "쟤 좀 내보내 주지?" 해서 아뭇소리 않고 내보냈습니다. 이튿날 아침. "쟤 또 들어왔네!" 이런! 녀석은 나가고 싶어서 창문을 향해 이리 뛰고 저리 뛰었습니다. "그냥 둬버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워낙 연약해서 그렇게 몇 번만 더 뛰면 제풀에 죽어 나자빠질 것 같았습니다. 어쩔 수 없어서 곱게 싸서 또 내보냈는데 저렇게 쭈그리고 앉아서 숨만 쉬고 있었습니다. 뭘 생각하는지... 다 생각할 때까지.. 2022. 10. 13.
영혼 ③ 고양이네 가족 내가 포치 아래에서 바라보는 동안 고양이 일가족 세 명(?)이 놀다가 갔습니다. 저 가족이 잘 지내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겐 있고 저 가족에게는 없는 것이 있겠습니까? 그건 무엇입니까? 우애? 모정? 사랑? 영혼? 글쎄요... 2022. 9. 20.
영혼 ② 저 소 눈빛 좀 봐 내가 축사 앞에 서면 쳐다보기도 하고 설설 다가오기도 합니다. 무슨 말을 할 듯한 표정입니다. - 왜 들여다봐? - 심심한 것 같아서... - 왜 그렇게 생각해? - 거기 축사 안에서만 평생을 지내다가 가니까. (도살장이란 단어를 꺼내는 건 어렵다. 저들도 안다.) - 너희 인간들은 달라? 갇혀 살지 않아? - 글쎄, 우리는 멀리 여행도 가고... 그러잖아. 달나라에도 가잖아. - 그게 대단해? 속담에도 있잖아. 오십 보 백 보... - 오십 보 백 보... 그야 그렇지. 그렇다면 할 말이 없네. 나는 저 어미소와 아기 소(송아지)도 바라봅니다. 어쩌면 저리도 다정할까요? 저 앉음새의 사랑 속에 온갖 사연이 다 들어 있겠지요? 나는 축사 앞을 지날 때마다 들여다봅니다. 자꾸 나 자신을 보는 듯합니다. 2022. 9. 11.
영혼 ① 빵집 앞 강아지 빵집 앞에서 저 강아지가 네 박자로 짖고 있었습니다. "왈왈왈왈 ○ ○ ○ ○ 왈왈왈왈 ○ ○ ○ ○ 왈왈왈왈 ○ ○ ○ ○ .............................." 나는 빵집을 나오자마자 바로 저 모습을 보았는데 강아지는 빵집을 향해 똑바로 서서 네 박자씩 줄기차게 짖어대고 있었습니다. 여기선 보이지 않지만 유모차 안에는 아기가 있었습니다. - 이 강아지가 지금 어떤 생각으로 짖고 있을까? - 자신이 주인보다 윗길이라고 여기고 강압적으로 명령하고 있는 걸까? "뭘 꾸물거리고 있는 거야! 당장 나오지 않고!" - 아니면? 애원조로? '제발 빨리 좀 나오세요. 부탁이에요~ 초조해 죽겠어요. ㅜㅜ' 두 가지 중 한 가지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짖는 모습이나 그 목청으로 보면 아무래도 "들어간 .. 2022. 9. 8.
어머니의 영혼 꿈속에서 이미 저승으로 간 부모와 대화를 나누는 건 대체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포옹을 하거나 손을 잡거나 하는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오디세이아》에서 오디세우스와 그의 어머니도 대화는 나누었는데 손을 잡거나 하지는 못했습니다. 표독스러운 여신 키르케를 잘 다루어 1년간 꿈결 같은 대접을 받은 오디세우스는 그 여신의 안내로 저승세계를 찾아가게 되고 어머니도 만납니다. "오, 아들아, 어찌하여 이 어두운 세계로 들어왔단 말이냐. 너는 분명 살아있는 몸이 아니냐. 그런데 트로이에서부터 여태껏 바다를 헤매고 돌아다녔단 말이냐? 이제까지 이타카에는 전혀 가지를 못한 것이냐." "어머님, 제가 귀국하기 위해 이렇듯 테이레시아스 망령에게 신탁을 받으러 왔습니다. 트로이를 떠난 후 겹친 재앙 때문에 이렇듯 .. 2021. 12. 15.
저 강아지의 영혼, 나의 영혼 저 강아지가 이쪽으로 건너오고 싶어 합니다. 주인은 저쪽 길을 그냥 걸어내려가고 싶었습니다. 주인이 가자고, 그냥 가자고 줄을 당기면 강아지는 이쪽을 바라보다가 주인을 바라보다가 번갈아 그렇게 하면서 버텼습니다. 강아지는 말없이 주장했고 주인은 "가자" "가자" 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나는 '별 것도 아닌 걸 가지고 다투네' 하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았습니다. 누가 이기는지 보자 싶었습니다. 몇 번을 그렇게 하더니 주인이 강아지의 요청을 들어주었습니다. 이쪽으로 건너온 것입니다. 자초지종 다 살펴보고 이쯤 와서 생각하니까 '이런!' 어떤 여자였는지 살펴보질 못했습니다. 아니, 이건 말이 되질 않고 아마도 예쁜 여자 같았습니다. 아무런 주장도 하지 않는 강아지보다는 자기주장.. 2021. 6. 5.
결별(訣別) 2009년 11월 2일, 나는 한 아이와 작별했습니다. 그 아이의 영혼을 저 산비탈에 두었고, 내 상처 난 영혼을 갈라 함께 두었습니다. 이 포스팅을 새로 탑재하면서 댓글 두 편도 함께 실었습니다. .............................................................................................. …(전략)… 우리는 흔히 학생들에게 장차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애에게 교육은 무엇이고 장래는 다 무엇이었을까. 장래는 고사하고 하루하루 얼마나 고달픈 삶으로써 고사리 같은 짧은 인생을 채우고 마감하게 되었는가. 그걸 살아간다고, 어린 나이에 뿌린 눈물은 얼마였을까. 그러므로 교육의 구실은 우선 그날그날.. 2020. 9. 26.
한 영혼을 만나기 위한 준비 한 영혼을 만나기 위한 준비 전혀 엉뚱한 누렁이 Ⅰ 극락이나 천당, 지옥 같은 게 있다는 말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어쩌면 모두들 악착 같이 살면 다 피곤해지니까 마음이 약한 혹은 순한 사람이라도 좀 느슨하게 살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지어낸, 확인할 길 없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을 .. 2016. 6. 19.
멍멍이들을 위한 고백 멍멍이들을 위한 고백 Ⅰ 우리 집 마당에서 살던 그 멍멍이는, 저렇게 귀엽고 이쁜 개가 아니었습니다. 이름조차 없는 똥개여서 동네 다른 개들처럼 그냥 "워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다시 전쟁이 나면 죽을까봐 늦게 입학해서 읍내 중학교에 갔을 때는 이미 1960년이었지만, 그조차 아무.. 2013. 12.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