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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영혼18

인연-영혼 가을이 가고 있습니다. 내년에도 다시 올 가을, 끊임없이 반복될 가을입니다. 2012년 가을, 혹은 마지막 가을일 수도 있습니다. 나로 말하면 그 어떤 가을도 다 괜찮고 고맙고 좋은 가을입니다. 아무리 찬란한 가을도, 바람에 휩쓸려가는 낙엽 소리가 들리면 쓸쓸해지고, 골목길 조용한 곳에 모여 있는 낙엽을 보면 더 쓸쓸해집니다. 이듬해 가을이 올 때까지는 설명이 필요없게 됩니다. 이 가을에 37년 전 어느 교실에서, 내가 그 학교를 예상보다 일찍 떠나는 섭섭한 일로 겨우 5, 6개월? 날마다 나를 바라보던 한 여학생, 그 여학생이 어른이 되어 낳은 아이가 나를 찾아왔습니다. 그 아이는 나를 만나는 순간에 할 인사를 애써서 연습했답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그랬는지, 인사는 나누었는데 생각이 나지 않습.. 2012. 11. 10.
영혼의 여정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그다음 날 아침부터 40일에 이르는 여정을 시작한다. 그 여정이 시작되기 전날 밤, 영혼은 땀내가 밴 베게에 가만히 누워,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손을 잡아주고 눈을 감겨주는 모습을 지켜본다. 또한 문과 창문과 바닥의 틈새로 영혼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사람들이 방 안을 연기와 침묵으로 가득 채우는 모습을 바라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영혼이 강물처럼 집 밖으로 흘러나가기라도 할 것처럼……. 사람들은 동이 틀 무렵 영혼이 자기들을 떠나 과거에 머물렀던 곳, 즉 젊었을 때의 학교와 기숙사, 군대 막사와 주택, 허물어졌다가 다시 지어진 집들, 그리고 사랑과 회한, 힘들었던 일들과 행복했던 일들, 희망과 희열로 가득했던 일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의미 없는 소중한 기억들을 떠올리게 하는.. 2012. 6. 25.
영혼과 영원 나는, 초인간적인 행복은 없다는 것과 일상의 범위를 벗어나는 영원은 없다는 것을 배운다. 이 얼마 안 되면서도 본질적인 부속물들, 이 상대적인 진실들은 나를 감동시키는 유일한 것들이다. 다른 것들, 즉, 인 진실들에 관해서는, 나는 그러한 것들을 이해할 만한 영혼을 갖고 있지 않다. 인간이 짐승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나는 천사들의 행복에서 아무런 의미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다만 이 하늘이 나보다 더 오래 영속될 것임을 알 뿐이다. 그리고 내가 죽은 뒤에도 지속될 것 말고 그 무엇을 영원이라 부르겠는가? - 알베르 까뮈, 「알지에에서 보낸 여름」(철학 에세이) 중에서 (민희식 옮김, 『시지프스의 신화』 육문사, 1993, 부록 197~198쪽). 블로그 『강변 이야기』(2012.2.6.. 2012. 5. 1.
동요 '겨울나무' 저녁나절에 라디오에서 동요 '겨울나무'를 들었습니다. 오십여 년 전, 방학 때만 되면 돌아가 조용히 지내던 그 시골집 건넌방에서 듣던 라디오가 생각났습니다. 조용한 초겨울 저녁때여서 그 생각이 났을 것입니다. 라디오는 초겨울 저녁때나 듣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FM 프로그램은 그때나 지금이나 거의 같다는 느낌입니다. 변하지 않았다는 건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요. 우리가 세상에서 사라진 날에도 오늘 같은 초겨울 저녁나절에는 그리운 우리 가곡, 동요들이 어김없이 들려올 것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안심해도 좋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6학년을 맡아서, 어슬프게 가르친 나에게 그 아이들이 물었습니다. "선생님, 좋아하시는 노래가 뭐예요? 18번요." 곧 방학이고 그러면 졸업이 이어질 초겨울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런.. 2011. 12. 18.
조제 렌지니 『카뮈의 마지막 날들』 영 옮김, 『카뮈의 마지막 날들』(뮤진트리, 2 카뮈는 잠시 돌이 되어버린 듯 꿈쩍도 하지 않고 입이 붙어버린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런 침묵은 그를 편안하게 하면서도 한편 불안하게 했다. 밤마다 화석이 되어버리는 사막, 멈춰버린 모래시계의 침묵 속에 굳어버리는 사막의 밤처럼 한기가 느껴졌다.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빨아들였다. 또다시 저만치 멀어져가는 어머니의 사진을 바라보았다.(32~33) 카뮈가 손뼉을 쳤다. 골이 들어갈 뻔한 상황에서 루르마랭 팀의 공격수 한 명이 멋지게 막아낸 것이다. 카뮈는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언제나처럼 담배 연기를 최대한 길게 그리고 깊게 들이마셨다. 담배 연기는 찢어진 상처를 달래는 동시에 그 고통을 증가시켰다. 담배 연기를 들이마실 때마다 차가운 외피 .. 2011. 9. 21.
이재무 「꽃그늘」 꽃그늘 이재무 꽃그늘 속으로 세상의 소음에 다친 영혼 한 마리 자벌레로 기어갑니다 아, 고요한 나라에서 곤한 잠을 잡니다 꽃그늘에 밤이 오고 달 뜨고 그리하여 한 나라가 사라져갈 때 밤눈 밝은 밤새에 들켜 그의 한 끼 식사가 되어도 좋습니다 꽃그늘 속으로 바람이 불고 시간의 물방울 천천히 해찰하며 흘러갑니다 이재무 시인의 이 詩는 상봉역에 내려가 면목동 방향 중간쯤에 서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각자 저런 자벌레다, 우리의 영혼도 저런 자벌레의 영혼일 것이다, 그런 얘기겠죠. 시인이 그렇다면 당연히 그런 거죠. 어쩔 수 없는 거죠. 자벌레라면 싫다, 밤새의 밥이 되는 건 죽어도 싫다, 그렇게 말하면 웃기는 거죠. 더구나 세상의 소음에 다쳐 꽃그늘 속으로 들어갔으니까요. 더구나 천천히 해찰하며 가도 된다.. 2011. 5.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