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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이재무 「꽃그늘」

by 답설재 2011. 5. 25.

꽃그늘

 

 

이재무

 

 

꽃그늘 속으로 세상의 소음에 다친

영혼 한 마리 자벌레로 기어갑니다

아, 고요한 나라에서

곤한 잠을 잡니다

 

꽃그늘에 밤이 오고 달 뜨고

그리하여 한 나라가 사라져갈 때

밤눈 밝은 밤새에 들켜

그의 한 끼 식사가 되어도 좋습니다

 

꽃그늘 속으로 바람이 불고

시간의 물방울 천천히

해찰하며 흘러갑니다

 

 

 

 

 

이재무 시인의 이 詩는 상봉역에 내려가 면목동 방향 중간쯤에 서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각자 저런 자벌레다, 우리의 영혼도 저런 자벌레의 영혼일 것이다, 그런 얘기겠죠.

시인이 그렇다면 당연히 그런 거죠. 어쩔 수 없는 거죠.

자벌레라면 싫다, 밤새의 밥이 되는 건 죽어도 싫다, 그렇게 말하면 웃기는 거죠. 더구나 세상의 소음에 다쳐 꽃그늘 속으로 들어갔으니까요. 더구나 천천히 해찰하며 가도 된다고 이재무 시인이 얘기해 주었으니까요.

 

 

 

 

'……세상의 소음에 다친/영혼 한 마리 자벌레……'

그 부분을 읽을 때 불연듯 알베르 까뮈의 「티파사로 돌아오다」의 다음과 같은 부분이 떠올랐습니다(알베르 카뮈 『결혼·여름』 김화영 옮김, 책세상, 2009, 167).

 

 

"…… 우리 시대만큼 최선과 최악을 똑같이 대하기를 요구하는 시대는 없으므로 나는 바로 아무것도 제쳐놓지 않은 채 이중의 기억을 정확히 간직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 아름다움이 존재하는가 하면 모멸당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해내기가 아무리 어렵다 할지라도 나는 절대로 그 어느 한쪽에도 불충실하고 싶지는 않다.

이것 역시 어떤 도덕을 닮았지만, 우리는 도덕을 넘어서는 그 무엇을 위해 살고 있다. 그것에다가 이름을 붙일 수만 있다면 얼마나 고요하겠는가!……"

 

 

 

사진 출처 : 블로그 『강변 이야기』 「내 마음의 풍경」 중 '사랑의 유배'(2011.5.14)에서.- 덧붙여도 좋다면, 저런 곳에서, 더구나 시인의 '자벌레'처럼 지낼 수 있다면 얼마나……, 그 얼마나……

 

 

 

이 시인이, 언젠가 매주 한 번씩 어느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서 자신의 詩도 소개하고, 청취자들의 시덥잖은 詩(?)에 대해 "좋다" "뭐 어떻다" 평가를 해주는 걸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였는지, 시인이 방송에 나와서 뭐 그런 글들을 詩라고 감상해주고 그러나 싶어서였는지, 며칠 전에 어느 신문 한 면 가득 이 시인이 소개됐는데 '이 사람이 이재무 시인이구나' 사진만 한참 들여다보다가 기사는 읽지 않고 말았습니다.

오늘 아침나절 상봉역에서 저 詩를 읽으며 그걸 후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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