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를 느끼다
박 두 규
숲에 드니 온통 그대의 자취로 가득합니다.
아직 안개가 가시지 않은 편백나무 아래서 입 맞추고
함박꽃 활짝 핀 관목 숲 좁은 길모퉁이에서 그대를 수없이 안았습니다.
부드러운 가슴의 박동 소리에 놀라 새들이 날아오르고
숲을 뚫고 쏟아지는 빗살무늬 화살을 온몸에 받았습니다.
의식을 잃고 싶은 마음으로 더욱 또렷해지는 그대.
보면 볼수록 들으면 들을수록
세상은 온통 그대의 자취로 가득한데
나는 왜 그대 얼굴도 떠올릴 수 없는 것입니까.
나는 왜 아직도 그대의 모습조차 그릴 수 없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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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두규 1956년 전북 임실 출생. 1985년 『남민시南民詩』 창립동인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사과꽃 편지』 『당몰샘』 『숲에 들다』 등.
『現代文學』 2010년 9월호
이런 詩를 읽거나 가령 쇼팽의 즉흥환상곡을 듣는다면 세상이 아름답기만 한 걸로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아니, 꼭 착각하고 맙니다.
사는 게 그 모양이니 속고 나서 매번 가슴아파 하고 다신 속지 않겠다고 다짐하다가 늘그막에 들어섰고, 아직도 내가 그를 사랑하고 신뢰하면 그도 나를 사랑하고 신뢰하는 줄 알고, 더구나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사랑이 있는 걸로 착각하게 되고, 그러다가 호되게 당하고 또 그렇게 하고
그러면서도 이런 詩를 읽거나 가령 쇼팽의 즉흥환상곡을 들을 때는 세상이 참 아름답기만 한 걸로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아니, 꼭 착각하고 맙니다. 환상에 빠집니다.
추신 : 그럴 수밖에요. 사람은 가도 언제까지나 사랑의 그 기억은 남고, 남은 기억은 계절따라 피어나고 자라고 덧붙여지며 살아가는 거니까 '보면 볼수록 들으면 들을수록/세상은 온통 그대의 자취로 가득'하지만 사랑하던 사람의 얼굴은 떠올릴 수 없게 되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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