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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조 은 「적운」

by 답설재 2011. 3. 28.

 

 

 

                  적 운

 

                                           조 은

 

 

여자가 뛰쳐나오자 대문이 어금니를 물었다

밖에서는 이제 문을 열지 못한다

뒤돌아보는 여자의 머리에서

헝클어진 바람이 뛰어다닌다

부스스한 머리가 할 말 많은 혀처럼 꼬이는

여자의 그림자를 청색 분뇨차가

뭉개며 달려간다 아이들이

그림자의 허리에서 파편처럼 튄다

여자는 제 그림자 한복판에다 가래침을 뱉는다

오토바이와 자전거 바퀴에

끌려 올라가던 그림자의 머리채가

한 걸음도 못 가 맥없이 놓여 난다

꼼짝 않고 노려보던 데서 시선을

옮긴다 여자는 눈을

감는다 눈꺼풀이 떨린다 콧날이 꿈틀댄다

여자가 뛰쳐나온 대문 안에서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슬리퍼 끌리는 소리

수돗물 시원하게 쏟아지는 소리

꿈쩍 않는 평온의 소리가 들린다

여자가 눈을 뜬다

 

 

  ───────────────

조 은 1960년 경북 안동 출생. 1988년 『세계의 문학』 등단. 시집 『사랑의 위력으로』 『무덤을 맴도는 이유』 『햇볕 따뜻한 집』 『따뜻한 흙』 『생의 빛살』 등.

 

 

 

『현대문학』 2010년 6월호(96~97쪽)에서 본 시입니다.

 

너무 성급한 결정이었을까요? 여인이 집을 뛰쳐나왔습니다. 무의식적으로 뒤돌아보는데 대문이 '쾅!' 닫혔고, 이제 되돌아 그 대문 안으로 들어서고 싶어도 그럴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하자는 걸 한두 번 생각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 순간 바람이 불어와 머리칼을 헝클어 놓았겠지만 그렇게 헝클어지기로는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순간에는 모든 것이 다 헝클어집니다. 하고 싶은 말들도 그렇고, 하필이면 그때 지나가는 분뇨차도 그렇고, 천방지축으로 지나가는 아이들의 모습도 그렇고, 오토바이와 자전거도 그렇습니다. 그 속에 서 있습니다. 그렇게 서서 닫힌 대문을 노려보던 여인의 눈이 잠시 저절로 감깁니다. 설명할 길 없는 그 '무엇' 때문에 눈꺼풀이 떨리고 콧날이 시큰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뛰쳐나온 그 집 안에서는 그런데도 '생활'이 계속됩니다. 문이 열리고 닫히고, 누군가가 슬리퍼를 끌고 지나가고, 세수를 하려는지 무얼 하려는지 수돗물 쏟아지는 소리도 들립니다.

그걸 '평온'이라고 할까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여인에게 이렇게 이야기해 주고 싶습니다. "사실은 서로서로 평온한 척하는 거에요. 스스로에게도 그렇게 위안을 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돌아서고 싶든 아니든 이건 얘기해 주고 싶네요."

여인이 눈을 뜹니다. 어떻게 하려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이와 같을 때가 한두 번이겠습니까?

이러한 정경도 詩가 되어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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