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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조정인 「문신」

by 답설재 2011. 4. 21.

문신

 

 - 조정인 (1954 ~ )

 

 

고양이와 할머니가 살았다

고양이를 먼저 보내고 할머니는

5년을

더 살았다

나무식탁 다리 하나에

고양이는 셀 수 없는 발톱자국을

두고 갔다

발톱이 그린 무늬의 중심부는 거칠게 패었다

말해질 수 없는 비문으로

할머니는 그 자리를 오래, 쓰다듬고 또 쓰다듬고는 했다

하느님은 묵묵히 할머니의 남은

5년을 위해

그곳에 당신의 형상을 새겼던 거다

고독의 다른 이름은 하느님이기에

고양이를 보내고 할머니는 하느님과 살았던 거다

독거, 아니었다

식탁은 제 몸에 새겨진 문신을

늘 고마워했다

식탁은 침묵의 다른 이름이었다

 

 

 

 

부끄럽지만 한때 내가 죽으면 그 무덤에 세울 비석에 새기라고 부탁할 글을 구상한 적이 있다. 그렇게 한다면 나를 만나보지 못한 내 후손 중에는 나를 무슨 중시조(中始祖)나 되는 양 여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아, 큰일날 뻔했구나!' 아찔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럴 무렵의 나는 무덤을 굳이 매장으로 할 필요는 없고, 화장을 한들 어떠랴, 쯤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요즘은 굳이 내 무덤이 있어야 할까, 그 생각을 자주 하고 있다.

내 무덤이 있으면 뭐가 좋을까?

어떤 이로움이 있을까? ……

내 무덤이 없으면 어떤 점이 불편할까?

불편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까?

 

어쨌든 나는 좀 서둘러 이 문제에 대한 생각을 마쳐야 할 것이다. '좀'이라는 것도 애매하다. '얼른'이 좋고, 그 '얼른'도 알고보면 5cc라든지 60kg 혹은 50km처럼 제한적인 의미의 단어라야 할 것이다. 초년이나 중년이 내게도 있었던가 싶게 오늘 여기에 와 앉아 있으니까 나의 노년인들 울울창창할 것까지는 없을 것이다(미안하지만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다. 좋은 시간, 활기찬 세월은 쏜살 같다).

 

'고독의 다른 이름은 하느님이기에'……

 

 

 

 

「한국판 '색계'(色戒) - 상하이 외교관들, 중국 여성 덩신밍과 불륜, 그녀 한마디에 비자발급권 사실상 넘겨줘」

그 기사가 1면 톱으로 실린 날의 신문 맨 뒷면에서 이 시를 읽으며 내 무덤을 생각했다. 내 무덤이 꼭 있어야 할까? 그 생각이 더욱 절실해졌다.

 

문신(文身)이라면, 사우나에서 보는 그 사내들의 등에 새겨진 어마어마한 용(龍), 그걸 쳐다보다가 눈길을 돌리던 순간들이 생각난다.

그러나 내 눈에는 보이지 않으므로 나에겐 없다고 생각해온 나의 문신은, 나를 쳐다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서 더러운, 추한, 고약한, 어지러운, …… 여러 가지 형상들이 겹쳐 보일 이중(二重) 삼중 사중 오중의 내 문신은, 내가 저승으로 간 후에도 3, 4, 50년은 지나야 서서히 사라질 걸 생각하면 기가 막히는 일이다.

그러니까 무덤까지 만들어 그 '문신'이 더 오래 지워지지 않도록 해야만 할 것인가? 그 생각을 한다는 뜻이다.

 

나는 지금 그걸 스스로에게 묻고, 혹은 다짐 받고 하는 사고의 골짜기를 헤매고 있는 것이다. 좀 쓸쓸하지만 거기쯤에 와 있는 것이다. 

 

 

 

 

시인은 이 시를 이렇게 읽었다.

 

소도구 식탁 하나. 등장인물은 할머니 하나. 사건 한 점 없는 무언극 5년 동안 한결같이 무대에 올려진다. 인물의 동작은 언제나 똑같은 한 가지. 먼저 간 고양이가 식탁 다리에 셀 수 없이 남긴 발톱 자국의 거칠게 파인 중심부를 쓰다듬고 쓰다듬는 것. 식탁 다리에 남겨진 문신 하느님 되어, 독거할머니 하느님과 더불어 큰 고독과 침묵에 싸여서 고마운 동거생활을 했다는 보고. 하지만 독거할머니 반려 고양이도 없이 외롭게 살다 갔다는 얘기지 뭐. 할머니 가고, 5년 동안의 식탁 하나, 정말 말해질 수 없는 비문(碑文) 무대에 홀로 남았네. <이진명·시인>

 

시와 시인(이진명)의 글 출처 : 중앙일보 2011.3.9. 35면, [시가 있는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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