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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이희중 「햇볕의 기한」

by 답설재 2011. 4. 4.

 

 

 

 

햇볕의 기한

 

 

이희중

 

 

오십억 년이 지나면 해가 없어질 거라고 한다 바로 말하자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부풀어올라 아주 큰 붉은 별이 되었다가는 다시 쪼그라들어 아주 작은 흰 별이 된 다음 결국 뜨거운 먼지로 우주에 흩어질 거라고 한다 설사 지구가 녹아 사라지지 않고 더 뜨겁거나 차가워진 작은 태양을 여전히 돌고 있다 하더라도 그 위에 산 것은 더 없을 거라고 한다 그 막막한 세월에 나는 없을 것이니 그날을 걱정하는 일은 그야말로 기우라 비웃을 만한데, 나는 벌써 우울하고 답답하다 그 소식을 들은 후 오래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고작 육억 년만 지나도 이미 아무것도 살 수 없게 더워질 거라는데 우리 후손들은, 제 손으로 대를 끊지 않았다면 그 전에 이미 지구를 떠나 더 이상은 하나의 행성에 목매지 않는 우주 유목민이 됐을 거라고 과학자는 위로했지만, 떠돌이의 삶은 또 얼마나 고달플 것인가 지구를 못 떠나 불바다에서 재와 불꽃으로 흩날릴, 못나거나 가난하거나 버림받은 사람은 또 왜 없겠나 나는 왠지 그들 중에, 침몰하는 배에 남은 선장처럼 그 선장을 따르는 선원처럼 내가 다시 있을 것 같아 오늘 내리는 이 햇볕이 아깝다 서늘한 새벽을 밀어내며 넉넉히 내리는 오늘의 이 햇볕이 많이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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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중 1960년 경남 밀양 출생. 1987년 『광주일보』와 1989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푸른 비상구』 『참 오래 쓴 가위』 등.

 

 

 

『현대문학』(2010년 8월호, 160~161쪽)에 있는 詩.

 

 

 

이제 할일도 없고 그렇다고 굳이 찾는 사람도 없어 혼자 앉아 있는 저녁에 詩나 보며 하필이면 詩를 보며 자주 '요즘 본 詩 중에선 이게 최고구나!' 생각하며 다시 읽고 다시 읽는다. 남의 힘을 빌리지 않고 그런 시를 찾는 게 스스로 대견하기도 하다.

 

 

 

 

오십억 년이면 참 먼 훗날인데도 더구나 세상에 못하는 일 아무것도 없는 科學者들이 나서서(사실은 "구제역이나 후쿠시마 원전 문제도 하나 해결 못하는 주제에……" 하고 실컷 비웃고 싶지만) "그때쯤엔 사람들이 다른 행성으로 소풍가듯 할 것"이라고 위로해 주는데도 詩人은 걱정이 늘어졌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단다. 왜냐하면 못나고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한두 번 본 것이 아니니까

그런 사람들의 처지를 한두 번 생각한 것이 아니니까 "그런 사람들도 사랑하자(아무나 다 사랑하자!)" 말만 무성하고 사실은 저희들끼리 모여서 노래부르고 실컷 마시고 먹고 웃고 저희들끼리 사랑하고 저희들끼리만 오고가며 도와주는 꼴을 한두 번 본 것이 아니니까 '이걸 어떻게 하나.' '설사 사정이 허락하여 지구를 떠난다 해도 이 행성 저 행성으로 떠돌아야 하는 생활이 오죽하겠나.' '고향만 떠나도 고생인데, 이 별 저 별이라니, 얼마나 고생이겠나.' '혹 못난 놈 가난한 놈 버림받은 놈은 떠나지도 못하고 불바다가 된 이 땅에 남아 있다가 그만 재가 되고 말지 않겠나…….'

 

그래서 詩人은 지금 이 정도의 평화로움이 그나마 너무나 고맙다. "~ 오늘 내리는 이 햇볕이 아깝다 서늘한 새벽을 밀어내며 넉넉히 내리는 오늘의 이 햇볕이 많이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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