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里香
꽃망울 하나가 가라앉는다.
얼음장을 깨고 깊이 깊이
가라앉는다.
어둠이 물살을 그 쪽으로 몰아붙인다.
섣달에 紅疫처럼 돋아난
꽃망울,
저녁에는 함박눈이 내린다.
마을을 지나
잡목림 너머 왔다 간 사람은
아무 데도 발자국을 남기지 못한다.
『金春洙詩選2 處容以後』(민음사 오늘의 시인 총서, 1982), 76쪽.
봄입니다. 그걸 부정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부정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지난 2월 둘째 주 주말에만 해도 전국적으로 폭설이 내린 곳이 많았습니다. 동해안에는 백몇십 년 만에 처음 그렇게 많은 눈이 내려서 피해가 극심했습니다. 그 당시 불친 "강변 이야기"에 실린 사진입니다.
부치지 못했던 오랜 추억을 기억하던 편지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그분은 이 사진 아래에 오석환의 시 「눈(雪)은 부드러운 저항의 눈빛(眼光)을 갖고 있다」에서 위의 구절을 옮겼습니다.
자욱하게 눈 내리는 저녁 풍경을 저렇게 나타낸 사진을 본 적이 없습니다. 저런 풍경 속에서는 그리움이 맺혀 있지 않은 곳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가 나를 미워하든 말든 그립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다 지나고 나면 그만입니다. 잊히고 맙니다. 그래서 시인은 '마을을 지나 / 잡목림 너머 왔다 간 사람은 / 아무 데도 발자국을 남기지 못한다'고 했을 것입니다. 우길 것 없이 봄이 확실하므로 지난 겨울조차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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