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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남진우 「꽃구경 가다」

by 답설재 2011. 1. 24.

 

 

 

꽃구경 가다

 

남진우

 

봄날 피어나는 꽃 옆엔 으레 저승사자가 하나씩 붙어 있다

봄날 피어나는 꽃 옆에 다가가면 저승사자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오라, 너도 꽃구경 온 게로구나

이 꽃 저 꽃보다 나랑 진짜 꽃구경하러 갈까 한다

저승사자 손에 이끌려 꽃밭 사이 무수한 꽃들 위에 엎으러지고 뒤집어지다가

하늘하늘 져 내리는 꽃잎을 이마로 받고 가슴으로 받고 팔다리로 받다가

아 이 한세상 꽃처럼 속절없이 살다 가는구나 싶어 고개를 들면

저승사자는 그윽히 나를 바라보고 있다

길가 꽃그늘에 앉아 잠시 숨 고르고 꽃들이 내뿜는 열기 식히노라면

저무는 하늘에 이제 마악 별이 돋아나고

내가 가야 할 길 끝에 환히 열린 꽃마당이 보인다

저승 대문 닫히기 전

저 꽃마저 보지 않으련 은근히 속삭이는 저승사자 뒤를 따라 걸어가는데

아무리 걸어도 꽃대궐 가까워지지 않고

으슬으슬 추위가 내 몸을 감싼다

봄날 피어나는 꽃 옆에서 한 시절 놀다 풀려나오면

현기증처럼 아득하게 졸음 쏟아지고, 마악 잠 속으로 몸을 처박을 찰나

저승사자가 스윽 웃으며 나타나 내게 저승꽃 한 송이 건네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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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진우 1960년 전주 출생. 1981년 『동아일보』 등단. 시집 『깊은 곳에 그물을 드리우라』 『죽은 자를 위한 기도』 『타오르는 책』 『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 『사랑의 어두운 저편』 등. <김달진문학상> 등 수상.

 

 

『現代文學』2010년 6월호, 94~95쪽에서 옮김.

 

 

 

"오라, 너도 꽃구경 온 게로구나. 이 꽃 저 꽃보다 나랑 진짜 꽃구경하러 갈까"?

'한쪽 눈을 찡긋'하는 저승사자,

그를 따라가면 어떻게 되는 걸까……

가까이 다가가면,

오래 쳐다보고 있으면

온몸이 늪에 잠기듯, 아니면 스르르 눈 감기고 죽은 듯 잠들 듯

그 저승사자를 따라가게 되는 일이 벌어지게 되는 걸까……

 

'덮석' 손목 잡혀 가는 게 아니라(그렇다면 세상이 지옥 같아지겠지. 이 집 저 집에서 잡혀가는 사람 때문에 아내나 남편, 아들이나 딸, 때로는 사위, 며느리, 아버지나 어머니 같은 생사람이 놀라 자빠지는 소리가 간단없이 들려오겠지),

그처럼 무질서하고 무지막지한 방법으로 잡혀 가는 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나 스스로 끌려가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것 아닐까.

 

아이들처럼, 그 팔랑대는 나비들처럼 꽃밭이건 어디건 이리저리 팔랑대는 아이들처럼 말고,

일행(一行)과 떨어져 괜스레 마음 뺏기고 들여다볼 때,

그 저승사자가 보내는 야릇한 미소를 도저히 눈치채지 못하고 마는 건 아닐까……

'아무리 걸어도 꽃대궐 가까워지지 않고'

'봄날 피어나는 꽃 옆에서 한 시절 놀다 풀려나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스윽 웃으며 나타나 저승꽃 한 송이 건네고' 가는

비몽사몽의 저승사자라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이 겨울 가고

다시 봄이 와

어디 저런 꽃구경 가면

주위부터 한바퀴 잘 둘러봐야지.

 

저승사자 그림자 스민 곳부터 찾아봐야지.

빛깔 곱고 냄새 신비로운,

보면 볼수록 돌아설 수 없는,

아, 드디어 마음까지 빼앗는 꽃 가까이에는

분명 그 저승사자가 노리고 있을 테니까

날 홀릴 작정인지 아닌지 확인해 봐야지.

 

'아, 이 한세상 꽃처럼 속절없이 살다 가는구나'

 

아니!

이것 봐!

겨울 가고 봄이 오는 걸 기다릴 것도 없이

이 세상 어느 곳 어느 때든 그곳이 꽃밭이란 얘기가 아닌가? 혹 그런 얘긴 아닌가?

하얗게 눈 덮인 바깥을 내다보는 겨울 아침에

한 편의 영화 같은, 소설 같은 詩 한 편이 지나온 생애를 돌아보게 한다.

 

'저승사자 손에 이끌려 꽃밭 사이 무수한 꽃들 위에 엎으러지고 뒤집어지다가 / 하늘하늘 져 내리는 꽃잎을 이마로 받고 가슴으로 받고 팔다리로 받다가 / 아 이 한세상 꽃처럼 속절없이 살다 가는구나 싶어 고개를 들면 / 저승사자는 그윽히 나를 바라보고 있다'

'아, 이 한세상 꽃처럼 속절없이 살다 가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