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김민정 「피해라는 이름의 해피」

by 답설재 2011. 1. 3.

피해라는 이름의 해피

 

 

만난 첫날부터 결혼하자던 한 남자에게

꼭 한 달 만에 차였다

헤어지자며 남자는 그랬다

 

너 그때 버스 터미널 지나오며 뭐라고 했지?

버스들이 밤이 되니 다 잠자러 오네 그랬어요

너 일부러 순진한 척한 거지, 시 쓴답시고?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너 그때 「두사부일체」 보면서 한 번도 안 웃었지?

웃겨야 웃는데 한 번도 안 웃겨서 그랬어요

너 일부러 잘난 척한 거지, 시 쓴답시고?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너 그때 도미회 장식했던 장미꽃 다 씹어 먹었지?

싱싱하니 내버리기 아까워서 그랬어요

너 일부러 이상한 척한 거지, 시 쓴답시고?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진정한 시의 달인 여기 계신 줄

예전엔 미처 몰랐으므로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사연 끝에 정중히

號 하나 달아드리니 son of a bitch

 

사전은 좀 찾아보셨나요? 누가 볼까

가래침으로 단단히 풀칠한 편지

남자는 뜯고 개자식은 물로 행굴 때

비로소 나는 악마와 천사 놀이를 한다

이 풍경의 한순간을 시 쓴답시고

 

 

.............................................................................................  

김민정, 「피해라는 이름의 해피」,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문학과지성사, pp. 96~97.

『현대문학』 2010. 6월호, 「텍스트에 포개놓은 사진」에서 옮김.

 

 

 

 

 

 

당신 같으면 그런 상태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저 시에 나오는 저 시 쓰는 여인이,

'만난 첫날부터 결혼하자던 한 남자에게' 그 '개자식'에게 꼭 한 달 만에 차여버린 저 시인이,

기다린다고, 기다려본다고 무슨 수가 나겠습니까?

저렇게, 버스터미널 지나오며 한 이야기, 「두사부일체」 보면서 웃지도 않은 일, 도미회 장식했던 장미꽃 다 씹어 먹은 일까지 모조리 오해하고 있는데,

저 개자식이 그 사이에 있었던 어떤 일인들 저 여인에게 유리하도록 이야기해 주겠습니까. 그렇게 해석해 줄 리가 있겠습니까.

저렇게까지 해놓고 오해를 풀었다는 이야기를 단 한 번이라도 들어본 적 있습니까?

'대화'라는 게 그렇게 좋은 겁니까? 오해라는 게 그렇게 풀릴 수 있는 겁니까?

 

오해를 풀어보려는 시도 자체를 말아야지요.

포기할 건 얼른 포기해야지요.

그냥 그렇게 지내다가 말아야지요.

오해는 사람을 죽이는 거라니까요? 충분히 죽일 수 있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