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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윤석산 「벚꽃잎 같은 연분홍 아라베스크 자세로 서는 시를 위하여」

by 답설재 2010. 12. 8.

벚꽃잎 같은 연분홍 아라베스크

자세로 서는 시를 위하여

-환지통幻肢痛·6

   

                                                                                                                        윤석산

   

제가 지금 쓰고 싶은 시는 '사랑'이라고 쓰면

그 모습이 더욱 발그스름해지면서 어감語感이 탱글탱글한, 그리고 아라베스크 자세로 서는

 

까르르 웃으며 무수한 빛살이 쏟아지는 청보리밭이랑 사이로 도망가는

그래서 지난 사월 한 잎 한 잎 지던 벚꽃이었다가 분홍 나비가 되어 일제히 날아오르는 그런 시인데

 

사지四肢를 절단한 후 뇌신경세포의 착각으로 없는 팔다리가 있는 것처럼 아프다는 테마로 연작시를 쓰기 때문인지

창문 밖 아파트 공터에서 해바라기를 하는 옆 동 영감 이야기를 쓰고 싶어 원고마감 기일을 넘기고도 이렇게 낑낑대고 있습니다.

 

  *

 

그 영감님, 지난여름 뇌수술腦手術을 받은 뒤 간병看病교육을 받으러 간 아내를 생각하며 혼자 점심을 먹는다는. 저보다 서너쯤 살 위인. 오늘도 우두커니 벤치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며 하늘을 바라보고 있네요. 이제 우리가 간병 받을 나이인데 무슨 교육이냐고 말려도 평균수명 팔십 세인 세상에는 믿을 건 부부뿐이라며 고집 부리는 아내가 안쓰러워 혼자 밥을 먹을 때마다 제주 앞 바다 졸복*을 사다가 매운탕을 끓이고 소주 한잔을 걸치면 자는 듯이 죽는다는 걸 생각하다가,

그게 사랑인지,

아내를 더 슬프게 하는 게 아닐지,

자식들에게 누가 안 될지 판단이 안 선다는 영감이

혼자 해바라기를 하다가 쑥국새 울음을 들으며 산을 넘고 들을 건너 바다로 가네요.

 

*

 

제가 지금 쓰고 싶은 시는 왜 살고, 남자와 여자 마음이 어떻게 다르고, 사랑은 뭐며,

정말 사랑은 존재하는 걸까가 아니라

 

지난 사월 내 마음 언덕에서 한 잎 한 잎 지던 벚꽃 같은

분홍 나비가 되어 청보리밭이랑 위로 날아가던 그 꽃잎 같은

 

그를 바라보던 마음의 딱징이 아래 강물에서

연달아 튀어오르던 숭어뗴와

 

그 비늘에 꺾이어 쏟히던 햇살에

먼 산 풀꽃들이 화득화득 피어나는 시인데 자꾸만 그 노인의 이야기 쪽으로 가네요.

 

왜 요즘은 자꾸

이런 시만 쓰여지는지 모르겠어요.

   

  * 졸복鰒 : 참복과의 바닷물고기. 몸은 짧고 굵으며 누런 갈색. 알집과 간장에 맹독을 지니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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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석산 1946년 충남 공주 출생. 1972년 『시문학』 등단. 시집 『말의 오두막집에서』 『나는 왜 비 속에 날뛰는 저 바다를 언제나 바다라고만 부르는 걸까』 『다시 말의 오두막집 남쪽 언덕에서』 『우주에는 우리가 지운 말들이 가득 떠돌고 있다』 등. <윤동주문학상> 수상.

 

 

발그스름해지는 사랑, 더구나 탱글탱글한 사랑  환상적인 자태의 사랑  까르르 웃는 사랑  청보리밭이랑 사이로 도망가는 사랑  벚꽃 같다가 금방 분홍 나비 같아지는 사랑  저 청보리밭이랑 위로 날아가던 사랑  그가 생각나는 그 강물, 그 강물에서 연달아 튀어오르던 숭어떼  그 숭어떼 비늘에 비친 햇살  그 햇살에 화득화득 피어나는 먼 산 풀꽃 같은 사랑  ……

 

아직 등단(登壇)하지 못한 詩人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시인의 詩 같은 생활이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를 보내자 '이것 봐라!'  다른 한 명의 등단하지 못한 시인이 또 제 곁으로 다가왔고  이번에는 제가 그를 떠나오자  또 다른 한 시인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저는 그들이, 부담스러웠던 그 옛 시인의 화신(化身)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오는 족족 재깍재깍 돌려보내거나 돌아서버렸습니다.

 

저 시인 윤석산은 등단하지 못한 시인들을 울리거나 외면하지 않고 살아온 고마운 '소년'입니다.  젊은 날의 그 시인이 저렇게 해바라기를 하는 영감이 되어 있고,  자신도 바로 그 곁에 있어 그 해바라기 하는 영감이 되어가는 '환지통'을 앓고 있습니다.  그러니 무슨 다른 '사랑시'를 쓸 수가 있겠습니까. 해바라기 하는 그 영감 이야기가 바로 '왜 살고, 남자와 여자 마음이 어떻게 다르고, 사랑이란 뭔지'를 이야기하는 것이며,  '사랑은 정말로 존재한다'는 이야기니까요.

 

 

『현대문학』 2010년 5월호(VOL 665)에서 본 시입니다.

스르르 자는 듯이 죽게 되는 그 졸복은 어디서 살 수 있는가, 정말로 살 수 있기나 한가,

그런 현실적인 일도 생각해 보고,

요즘 누가 나를 보고 해바라기를 하는 저 영감쯤으로 여기면 어떻게 하나, 걱정을 하다가

그게 알고 보니까 '사치스런 부끄럼'이구나, 그런 생각도 해봤습니다.

그런 '아내가 안쓰러워 혼자 밥을 먹을 때마다 제주 앞 바다 졸복을 사다가 매운탕을 끓이고 소주 한잔을 걸치면 자는 듯이 죽는다는 걸 생각하다가,

그게 사랑인지,

아내를 더 슬프게 하는 게 아닐지,

자식들에게 누가 안 될지 판단이 안 선다는 영감'.

시인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 영감은 '혼자 해바라기를 하다가 쑥국새 울음을 들으며 산을 넘고 들을 건너 바다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1946년생이므로 저와 동갑입니다. 『현대문학』에 시가 소개되는 시인 치고는 나이가 많은 시인입니다. 그러므로 <윤동주문학상>만 받았다면 다른 시인에 비해 상을 적게 받았습니다. 『현대문학』에 소개되는 시인들을 보면 저 나이가 아니어도 적어도 네다섯 번은 받은 시인들이 수두룩합니다. 다른 시인들을 손가락질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아닙니다. 이 시인은 상복(賞福)이 없거나 상 받는 일에 소홀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