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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이기철 「대필 代筆」

by 답설재 2011. 2. 15.

대 필 代筆

 

 

이기철

 

 

마운령 넘다가 물집 잡힌 발바닥 다스리며 천수참千水站에 닿았다지요 양관 열하는 양 칠월 초순이 복더위라 노간주 그늘에서 땀을 말렸다 하셨군요 또 청석령靑石嶺 넘어 관우 묘에 읍하고 바리때 치는 도사를 에둘러 역졸들에게 참외를 샀다 쓰셨네요 등갓 쓴 중속환이들과 눈 잠시 맞추고 또 팔십 리, 낭자산狼子山에서 잤군요 우대령雨大嶺은 큰 비 고개니 빗소리 도와 코를 곯아도 나무랄 이 없고 유월 신미 날 비 맞으며 오리 정수리 빛 강鴨綠江을 건너 불함산 넘어 길 나선 여객이 내쳐 보름 완보니 지친 몸이 그만 가자 해도 마음이 당겨 또 백탑白塔으로 옮겼군요 근력 소진, 칠정의 말단 배냇아이 마음 하나 꺼내 크게 울었다 하셨으니 몸의 미편을 미루어 짐작합니다 영수사映水寺 거쳐 십리하十里河에 왔으니 또 칠십 리를 걸어 비자나무 아래 초려에 묵으며 잠시 명사明史도 읽었군요 내쳐 이백오십 리를 걸었으니 집 나설 때 신은 신이 다 해질 만도 하겠군요

 

내 읽음은 드뎌 도강록渡江錄까진 아직 사백 쪽이 남았습니다 저 신고辛苦 백오십 날의 예리성을 나는 빨리 읽을 마음이 없어 당초문처럼 천천히 음미합니다만 때론 그 간난과 역경이 송연해 앉아서 읽지 못하고 서서 읽기도 합니다 말 타고 지남이 일신이니 일신수필馹迅隨筆이라 하심은 겸양이 흔연하지만 거기까지 따르기엔 안력을 돋우어야 하겠습니다 저 한량없는 탐구의 실사구시는 길 떠난 이의 눈을 우수마발에도 머물게 했으리라 여기며 깨어진 기왓조각 구르는 똥거름 조약돌 벽무늬 빨래집게 말똥 줍는 오쟁이 송판단청 돌난간 바퀴 달린 손수레 물총차 양지바른 고치실 진흙으로 구운 찻잔…… 청맹과니 눈에도 어언 패루牌樓의 편액과 종루의 호소용음虎嘯龍吟이 들리는 듯합니다 이백 년 전 선인의 유필에 한 사흘 홀리다가 내 그저 넘기지 못해 시의 이름 빌어 두렵게 대필하옵노니 이 비재천학을 선인이여 용납하옵길, 경인 맹춘 한식날 예불비禮不備

 

* 燕巖의 『열하일기』 상권을 읽으며 그 뇌우 같은 목청을 견디지 못해 이렇듯 산문시 한 편으로 마음 대신함에 가편 있으시길. 경인년 각북 우거 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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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1943년 경남 거창 출생. 1972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 『청산행』 『열하를 향하여』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유리의 나날』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가장 따뜻한 책』 『정오의 순례』 등. <김수영문학상> 등 수상.

 

 

 

 

 

 

 

『현대문학』 2010년 7월호에서 본 詩입니다.

이런 詩 한 편 쓸 수 있었으면 아무라도 대단했을 것입니다.

다 접고 詩人이 되어 이런 詩 한 편 썼다면 좋을 것입니다.

그게 욕심이라면, 그 숱했던 세월, 그 많던 책, 단 한 권이라도 이렇게 한번 읽을 수 있었어도 좋겠습니다.

 

(嘯 : 휘파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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