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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시인3

시인과 쓸쓸한 공무원 시인 설목이 전화를 했습니다. (나) "여보세요~" (설목) "공문이 왔습니다~" (나) "무슨 공문요?" 마침 버스가 오르막길을 오르는 아파트 앞을 걸어 올라가고 있을 때여서 소음도 한몫하긴 했습니다. "봄이 왔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한 것이었는데 나는 공문이 왔다는 걸로 들었습니다. 공문과 거의 관계없는 삶을 산 지 오래되었는데도 아직 나는 이렇게 젖어 있습니다. 이건 쓸쓸한 일입니다. 문득 지지난해 여름의 일이 생각났습니다. 박수홍이 결혼을 했다는 뉴스를 본 아내가 내게 그 얘기를 할 때 마침 아파트 옆 오르막길을 버스가 용을 쓰며 올라가고 있었고 우리는 거실 창문을 열어놓은 상태였습니다. "박수홍이 결혼했다네~" 아내는 그렇게 말한 것인데 이쪽 방에서 책을 읽던 나는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복숭.. 2023. 3. 14.
"시(詩)는 낭비입니다"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마차를 모는 미소년으로 가장해서 부귀의 신 플루투스(Plutus)로 가장한 파우스트를 모시고 황제의 의전관을 만납니다. 《파우스트 2》(민음사, 56쪽)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의전관 그 기품은 설명할 수가 없구먼. 하지만 달처럼 둥글고 건강한 얼굴, 두툼한 입술에 꽃 같은 두 뺨이 터반의 장식 밑에서 빛나고 있구려. 주름 많은 옷을 입고도 마냥 편안한 모습이야. 그 단아한 모습을 무어라고 말할까? 통치자로선 잘 알려진 분인가봐. 마차를 모는 소년 바로 이 분이 부귀의 신 플루투스십니다! 이렇게 화려한 차림으로 납신 것은 지엄하신 황제의 간청 때문이지요. 의전관 그렇다면 그대 자신은 무엇 하는 누구인지 말해 보게나! 마차를 모는 소년 저는 낭비입니다. 시(詩)이지요. 자신의 재화를 아.. 2022. 10. 25.
심창만 「무인 등대에서 휘파람」 또 구월이 가고 시월이 와서 이러다가 어떻게 해보지도 못하고 무너지는 둑을 바라보듯 곧 끝장이 나는 것 아닌가 싶어 그 심란함을 써놓았더니 설목(雪木, 박두순)이 와서 보고 자기는 좋다고 시월도 좋아서 야외에 나가면 휘파람을 불겠다고 했습니다. 나는 문득 심창만 시인이 생각났습니다. 「무인 등대에서 휘파람」 곧 시집을 찾아보았더니 전에는 눈치채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시인이 아예 내 이야기를 써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시인은 허구한 날 이 세상 누군가를 위해 온 생애를 바치며 시를 써주는 사람이니 호의호식(好衣好食)하는 데 애쓰긴 어려울 것입니다. 연설문 대필을 직업으로 삼거나 남의 일생 이야기에 분칠을 해서 우아하게 보이도록 하는 자서전을 대필하는 것도 아니고 읽는 순간 입을 닫고 생각하게 하는 이야.. 2022. 10.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