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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심창만 「무인 등대에서 휘파람」

by 답설재 2022. 10. 5.

 

 

 

또 구월이 가고 시월이 와서 이러다가 어떻게 해보지도 못하고 무너지는 둑을 바라보듯 곧 끝장이 나는 것 아닌가 싶어 그 심란함을 써놓았더니 설목(雪木, 박두순)이 와서 보고 자기는 좋다고 시월도 좋아서 야외에 나가면 휘파람을 불겠다고 했습니다.

 

나는 문득 심창만 시인이 생각났습니다. 「무인 등대에서 휘파람」

곧 시집을 찾아보았더니 전에는 눈치채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시인이 아예 내 이야기를 써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시인은 허구한 날 이 세상 누군가를 위해 온 생애를 바치며 시를 써주는 사람이니 호의호식(好衣好食)하는 데 애쓰긴 어려울 것입니다.

연설문 대필을 직업으로 삼거나 남의 일생 이야기에 분칠을 해서 우아하게 보이도록 하는 자서전을 대필하는 것도 아니고 읽는 순간 입을 닫고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 그것도 단 몇 사람만 '아, 이런! 이건 내 이야기네?' 생각할, 정말로 가슴 시린 이야기를 단 몇 글자로 써내는, 아무리 생각해도 부자가 되겠다고 다짐하지는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심창만 시인이 잘 지내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를 읽어봅니다.

 

 

무인 등대에서 휘파람

 

 

아라비아 귀신처럼 우두커니 서서

나는 아무 주문도 외지 못한다

슬하에 바다를 두었던 한 시대가 낯설다

물고기 이름처럼 사소한 바다

 

시절이 있다는 것이 끔찍하다

시간의 거친 창이

불 꺼진 내 눈알을 길게 찔러놓았다

수평선은 내게 긴 목을 주었으나

늘어진 거미줄이 숨을 조여와

내 두개골은 폐허의 진앙지처럼 텅 비었다

 

달빛은 동맥을 뿌옇게 풀어놓고

도대체, 해당화는

10년 전의 피를 갖고도 꽃인 것이다

나는 무섭다

우두커니 서서 나는 나의 무덤도 아니다

10년 전에 내가 젊었었다니

사막 같은 바다에

내가 나의 표지(標識)였다니

 

달빛도 바람도 길을 잃는

퀭한 두개골,

무변(無邊)의 파도가 넘실대는

이 적요의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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