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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부부11

자유자재로 살아가는 신선 '독자(犢子)' 업(鄴) 땅 사람 독자(犢子)는 젊을 때 흑산(黑山)에서 송실(松實)과 복령(茯苓)을 먹었다. 그는 수백 년 동안 어떤 때는 장년으로, 어떤 때는 노년으로, 또 어떤 때는 미남으로, 어떤 때는 추남으로 보여 사람들이 그가 선인임을 알았다. 독자는 늘 양도(陽都)의 주점에 들렀는데, 양도의 딸은 좌우 눈썹이 자라 맞붙고 귀가 가늘고 길어서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겨 "천상의 인물"이라고 했다. 독자가 마침 누런 송아지 한 마리를 끌고 주막에 들렀을 때 양도의 딸이 보고 좋아하여 머무르게 하고 받들어 모셨다. 어느 날, 그들은 복숭아와 오얏을 가지러 나갔다가 하룻밤을 자고 돌아왔는데, 그 과일은 껍질까지 달고 맛있었다. 다음에는 마을 사람들이 그들의 뒤를 밟았지만, 그들이 문을 나서 송아지 귀를 끌고 걸어갔는데.. 2023. 9. 14.
부부 : 행운의 세례 혹은 상극관계 시험기간이 되면 모두들 집에 일찍 들어가고 나 혼자 쏘다녔습니다. 하기야 나는 동기생들하고는 놀지 않고 시내에 나가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고 다녔을 뿐이어서 대학생 주제에 들어앉아 허접한 내용들을 죽어라 암기하거나 좁쌀 글씨로 써서 커닝 준비를 하는 일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나를 보고 "저렇게 해서 발령이 난들 선생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고들 했는데 두어 명 여학생은 측은하게 여기고 도와주고 싶어 했습니다. 과제물을 만들어주기도 했고 저녁에 남 안 볼 때 불러서 찾아가면 노트 복사물을 주면서 좀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친절을 베푼 여학생(여 선생님) 한 명을 나중에 남한산성 동기회 때 만나게 되었는데 이런저런 시간 중에는 일부러 그러지 않았는데도 둘이서 걸을 수 있는 시간도 있.. 2023. 4. 30.
앨리스 먼로 〈물 위의 다리〉죽음 앞에서 만난 사람 앨리스 먼로 소설 〈물 위의 다리〉 소설집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뿔 2007) 마흔넷 유부녀 지니가 캄캄한 밤에 웨이터 리키와 함께 있다. 처음 만난 사이이다. "보여 드릴 게 있어요. 아마 한 번도 보지 못한, 그런 걸 보여 드릴 게요." 그가 말했다. 이전이었다면, 이전의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지금쯤 겁이 나기 시작했을 것이다. 사실 예전의 정상적인 그녀라면 애당초 이렇게 따라나서지도 않았겠지만. "호저예요?" 그녀가 물었다. "아뇨, 호저는 아니에요. 호저만큼 흔한, 그런 게 아니에요. 적어도 제가 아는 한은요." 1킬로쯤 더 가서였던가, 그가 전조등을 껐다. "별 보여요? 저기, 별이요." 그가 물었다. 그가 차를 세웠다. 처음에는 사방이 그저 고요로 가득한 것 같았지만 사실은 아주.. 2021. 11. 28.
앙드레 고르 『D에게 보낸 편지』 앙드레 고르 『D에게 보낸 편지』 임희근 옮김 / 학고재 / 2007 당신의 대답은 도망칠 여지를 주지 않았습니다. “만약 당신이 누군가와 평생토록 맺어진다면, 그건 둘의 일생을 함께 거는 것이며, 그 결합을 갈라놓거나 훼방하는 일을 할 가능성을 배제하는 거예요. 부부가 된다는 건 공동의 기획인 만큼, 두 사람은 그 기획을 끝없이 확인하고 적용하고, 또 변하는 상황에 맞추어 방향을 재조정해야 할 거예요. 우리가 함께할 것들이 우리를 만들어갈 거라고요.” 당신의 입에서 나왔지만, 이건 사르트르의 말 아니겠습니까.(24~25) 당신은 말하곤 했지요. 글을 쓰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람과 살고 있다고. 또 작가가 되려는 사람은 홀로 되어 밤이고 낮이고 어느 때건 메모를 해야 한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었습니다.. 2020. 10. 17.
'대화'라는 것 이 좋은 길을 젊은 부부가 걸어옵니다.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을 연령입니다. 그들이 내 곁을 지나가며 이야기합니다. 두 마디만 들렸습니다. "1 키로면 겨우 1000미터 아이가, 이 사람아!" "그래, 오르막길 1 키로면 멀다고!" 어느 한쪽이 양해할 것 같지는 않았고, 그들은 '별 것 아닌 것' 가지고 행복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판단해서 미안합니다. 어쩌면 그 별 것 아닌 것이 아주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을 것 같았습니다. 대화란 동등(同等)한 입장에서는 부질없을 때가 있다는 걸 인정할 필요가 있고, 어느 한쪽만이라도 그걸 인정한다면 그쪽이 입을 닫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대로라도 지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소리를 해서 정말 미안합니다. 2020. 9. 4.
沈復 《浮生六記》 沈復 《浮生六記》 흐르는 인생의 찬가 池榮在 역, 을유문화사 1 이 책을 다시 읽었습니다. 뭘 읽었는지 기억도 없어서 처음 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내가 가진 이 책(1984년, 19판)은 세로쓰기여서 읽기에 힘이 들었습니다. 심복이란 학자가 '부생육기(浮生六記)―흐르는 인생의 찬가'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얘기를 '사랑의 기쁨' '한가롭게 멋지게' '슬픈 운명' '산 넘고 물 건너' '유구국 기행' '양생과 소요' 등 여섯 편으로 쓴 '아름다운 자서전'입니다. 2 '사랑의 기쁨'은 아내 진운(陳芸)에 대한 사랑의 찬가입니다. 앞니 두 개가 약간 내다보이는 점은 관상적으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찰싹 달라붙는 듯한 태도는 사람의 넋을 송두리째 빼앗았다.(13) 옛사람의 이야기인데도 그들의 애틋한 사.. 2019. 11. 23.
엄연한 '노후' 1 날씨가 좀 풀렸다고 말합니다. 하나마나입니다. 정작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고, 이제 집에 들어가도 좋은 시간인지 모르겠다고 얘기하고 싶은 걸 감추고 있다는 걸 잘 압니다. 그렇긴 하지만 할아버지도 굳이 그걸 얘기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마나일 것입니다. 2 몰라서 그렇지 세상은 무저갱입니까? 정신을 바짝 차리려고 해도 금방금방 까무루해집니다. 그렇게 까무룩해져서 아래로, 그 아래로, 어디가 바닥인지도 모를 구렁텅이로 자꾸자꾸 내려갑니다. 많이 내려가면 정신을 차려봤자 다 올라오지도 못한 채 또 까무룩해집니다. 누가 먼저 떠나면 어떻게 하나, 그 생각을 자주 합니다. 남은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는 그 문제는, 생각은 자주 하지만 결론이 있을 것 같지가 않습니다. 얘.. 2018. 12. 23.
"생명력의 흡수" 버지니아 울프가 『등대로』에서 쓴 '남편과 아내' 이야기입니다. 한마디로 놀라웠습니다. 이런 걸 가지고 놀랍다고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찰스 탠슬리는 그를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형이상학자라고 찬양하고 있다며 그녀가 남편에게 말하였다. 그러나 남편은 그 이상의 것을 원했다. 그는 동정이 필요한 것이다. 자기가 세계의 한복판에 있는 영국에서 뿐 아니라 전세계가 그를 필요로 한다는 보장을 받고 싶은 것이다. 램지 부인은 편물 바늘을 분주하게 움직이며 꼿꼿이 앉아 있다가 응접실과 주방을 단정하게 정돈하였다. 그리고 남편에게 마음대로 그곳에 드나들며 마음껏 즐기라고 말하였다. 그녀는 웃으며 양말을 짰다. 그녀의 두 무릎 사이에 몸을 굳히고 서 있는 제임스는, 동정을 요구하며 사정없이 내리치는 메마른 아라비아.. 2018. 2. 13.
기승전결(起承轉結) 기(起) 승(承) 전(轉) 결(結) '나도 저렇게 해서 오늘 여기에 이르렀다면……' 소용도 없고 무책임한 생각을 하며 바라보았습니다. 나는 일을 저렇게 전개하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있는 사람의 손목을 잡고 억지로 끌고 왔습니다. 그렇게 해놓고 약속한 건 단 한 가지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더러 오탁번 시인이 생각났습니다. 핑계를 대고 위안을 삼고자 한 것입니다. 구름을 비껴 날으는 기러기 같은 당신을 밤나무나 느티나무 가지 위에 얼기설기 지어놓은 까마귀 둥지로 손짓해 불렀다는 생각이 들 때가 가장 괴롭습니다 어둠의 문 두드리고 또 두드리면서 우리가 꿈꾸어온 시간은 나뭇가지 끝 겨우살이처럼 덧없는 목숨은 아니었습니다 여름날 장독대 위에 내리는 여우비처럼 울 수만은 없어서 이렇게 높은 하는 쳐다보고 또 쳐다봅.. 2015. 9. 7.
저 이쁜 부부 운동복 차림에 허름한 모자를 쓰고 산비탈을 오릅니다. 저기쯤 앞에 오순도순 젊은 부부가 가고 있습니다. 뒤따르는 아내의 두 팔이 '팔랑팔랑' 나비날개처럼 움직여 오르막인데도 발걸음이 가벼워 보입니다. 그러다가 내가 뒤따르는 걸 눈치 챘는지 걸음이 좀 빨라지는 듯했고, 이내 남편이 뒤에 섰습니다. 내가 아무래도 음흉해 보이는가보다 싶었고, 공연한 추측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나는 무슨 볼일이나 있는 것처럼 멈춰 서서 먼 산을 좀 바라보며 어슬렁거리니까 이내 저만치 뒤처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더 오르면 안 되겠다 싶은 곳에서 골짜기를 벗어나 큰길로 나섰습니다. 그곳에서 다시 그 부부를 보았습니다. 그 길바닥에 앉아 있었습니다. 좀 흉측해 보이는 내가 뒤따르는 걸 이번에는 눈치 채지 못했는지 무슨 얘기.. 2013. 10. 13.
최문자 「부토투스 알티콜라」 부토투스 알티콜라° 최 문 자 당신은, 누우면 뼈가 아픈 침대 짙푸른 발을 가진 청가시 찔레와 너무 뾰족한 꼭짓점들 못 참고 일어난 등짝엔 크고 작은 검붉은 점 점 점. 점들이 아아, 입을 벌리고 한 번 더 누우면 끝없이 가시벌레를 낳는 오래된 신음이 들려야 사랑을 사정하는 당신은 일용할 통증 멸종되지 않는 푸른 독 너무 할 말이 많아서 아픈 침대 커버를 벗긴다. 아아, 이거였구나. 전갈 한 마리 길게 누워 있다. 유일한 고요의 형식으로 당신과 내 뼈가 부토투스 알티콜라를 추다가 쓰러진 전갈자리. 굳은 치즈처럼 조용하다. 전갈의 사랑은 그 위에 또 눕는 것. 같이. ˚ 부토투스 알티콜라-전갈이 수직으로 달린 꼬리로 추는 구애 춤 ............................................ 2009. 5.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