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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박상순12

박상순 「레몬 릴리」 레몬 릴리 박상순 지난여름의 카페는 문을 닫았다. 나는 겨울 속으로 들어갔다. 겨울 속을 걷는다. 고원에는 꽃이 피어 있다. 들어설 때는 겨울이었는데, 겨울비가 내렸는데, 어느새 나는 고원에 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풀밭뿐이다. 하늘만 보인다. 풀빛이 고원을 감싼다. 햇빛은 따가운데 바람은 제법 차갑다. 바람이 차가워서 돋아난 풀들은 낮게 드러누워 있다. 고원이라고 해야 할까. 초원이라고 해야 할까. 높은 산자락에는 비스듬히 풀빛만 가득하다. 멀리 보이는 희미한 세상은 까마득한 아래쪽에 있다. 이렇게 넓으니 초원이라고 해야 할까. 이렇게 높으니 고원이라고 해야 할까. 이렇게 먼 곳이니 세상의 바깥이라고 해야 할까. 가을 강을 건너서 겨울 속으로 왔는데, 꽃 피는 초원이다. 풀빛 사이로 군데군데 노란 꽃.. 2024. 2. 7.
이제니 「발견되는 춤으로부터」 발견되는 춤으로부터 이제니 멀리 성당의 첨탑에서 저녁 미사를 알리는 종소리 들려온다. 열린 창 너머로 어스름 저녁 빛 새어 들어오고 마룻바닥 위로 어른거리는 빛. 움직이면서 원래의 형상을 벗어나려는 빛이 있다. 어디로든 갈 수 있다고 속삭이는 옛날의 빛이 있다. 사제는 한 그릇의 간소한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가장 낮은 자리로 물러나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린다. 화면은 다시 정지된다. 일평생 봉쇄 수도원의 좁고 어두운 방에 스스로를 유폐한 채 기도에만 헌신하는 삶. 너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그 기도가 누구를 도울 수 있는지 묻는다. 화면은 다시 이어진다. 너는 책상으로 가 앉는다. 맞은편에는 비어 있는 의자. 비어 있음으로 가득한 의자. 책상 위에는 먼 나라에서 보내온 엽서가 놓여 있다... 2022. 2. 5.
「꾀꼬리도 지우고, 진달래도 지우고」 꾀꼬리도 지우고, 진달래도 지우고 박상순 그의 걸음은 빠르고 내 걸음은 무겁다. 자루 같은 가방 두 개를 멘 그의 걸음은 빠르다. 나는 조금 힘을 내서 그의 걸음을 따라잡는다. 그의 가방 하나를 내 어깨에 걸친다. 그의 걸음은 여전히 빠르다. 다시 그의 걸음을 쫓아가서 나머지 가방도 내 어깨에 걸쳐놓는다. 내 걸음은 무겁다. 손에 들거나, 어깨에 둘러메거나, 등에 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무겁다. 매일 무거워져서, 이것 하나 없애고, 저것 하나 없애고 빈 손에, 텅 빈 얼굴로 기억도 덜어내고, 추억도 덜어내고, 슬픈 꾀꼬리도 지우고 웃음 짓던 진달래도 지우고, 외톨이 쇠붙이는 파묻고, 나만의 별똥별, 나만의 새벽별도 버리고, 현재는 톡톡 털어서 햇볕에 말리고, 바삭하게 말리고, 어쩌면 무척 가벼울지도.. 2021. 10. 25.
「첫눈이 오시네요, 글쎄」 첫눈이 오시네요, 글쎄 박상순 노래하는 아이를 낳는 이른 아침 나뭇잎, 한낮의 붉은 잎, 저녁 담장, 밤 계단, 어둠의 손잡이, 그런 사람들을 품은 기계를 뜯어냈다. 아침 나뭇잎은 내 피부를 벗겼고, 한낮의 붉은 잎은 제 머리 위에 나를 거꾸로 올려놓았고, 저녁의 담장은 물속에 나를 빠뜨렸고, 밤의 계단은 내 발목을 잡았고, 어둠의 손잡이는 울었다. 쭈그리고 앉아 나는, 물방을, 무지개, 구름 귀신, 달 귀신, 웃음 귀신, 아기 귀신, 뿔뿔이 흩어지며, 물방울, 무지개......를 노래하는 아이들을 낳는 기계를 뜯어냈다. 밑판을 뜯어냈다. 이른 아침 나뭇잎이었던, 한낮의 붉은 잎이었던, 저녁 담장이었던, 밤 계단이었던, 어둠의 손잡이였던 기계. 나 또한, 아침 나뭇잎의 피부를 벗겼고, 내 머리 위에 한낮.. 2021. 1. 4.
박상순 「그녀의 외로운 엉덩이」 하얀 석판 하나가 트라클의 시를 품고 벽에 붙어 있었다. 「미라벨의 음악Musik im Mirabell」이다. 마지막 연은 다음과 같다. 하얀 이방인 하나가 집으로 들어선다. 개 한 마리가 낡은 복도를 내달린다. 하녀는 등불을 끄고, 귀는 밤에 소나타 음악을 듣는다. (…) 내 앞의 그녀1는 온통 흰색이었다. 따뜻한 흰색, 동그렇게 흰색, 요동치는 바다를 건너온 나의 울트라마린보다 반 뼘쯤 키가 큰 흰색, 그런데…… 더 이상 나는 그녀의 얼굴, 그녀의 목소리, 그녀의 눈빛, 그녀의 손가락 하나도 그리지 못한다. 말로도, 글로도, 그림으로도 옮기지 못한다. 그렇지만 나는 인스부르크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리고 이별했다. 이탈리아에서 알프스를 넘어 찰츠부르크, 인스부르크로 들어갔던 20년도 훨씬 지난 오래전의.. 2020. 2. 18.
박상순 《밤이, 밤이, 밤이》 "내 들꽃은 죽음" 《밤이, 밤이, 밤이》 박상순 시집, 현대문학 2018 박상순 시인은 요즘 뭘 하고 있을까? 엉뚱한 생각을 하곤 합니다. 이 시인의 시를 읽고 싶습니다. 시다! 이것이다! 얼마나 다행인가 생각합니다. 내 들꽃은 죽음 내 들꽃은 죽음. 웃다가 죽음. 낚싯대를 들고 오다가 죽음. 요리책을 읽다가 죽음. 지중해 해변에서 우편엽서를 사다가 죽음. 그 엽서를 쓰다가 죽음. 커다란 여행가방을 싸다가, 그 가방을 들고 가다가 혼자 웃다가. 아침부터 웃다가. 내 들꽃의 지난겨울.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외국인 청년이 한국어로 말을 걸었다. 실례지만, 물어봐도 될까요? 무슨 일이 있나요? 하지만 내 들꽃은 버스에서 내렸다. 내 들꽃의 지난여름. 땅속을 벗어난 지하철이 강을 건널 때, 중년의 여인이 .. 2019. 4. 14.
박상순(시집) 《슬픈 감자 200그램》 박상순 시집 《슬픈 감자 200그램》 난다 2017 즐거운 사람에게 겨울이 오면 즐거운 사람에게 겨울이 오면 눈보라는 좋겠다. 폭설에 무너져내릴 듯 눈 속에 가라앉은 지붕들은 좋겠다. 폭설에 막혀 건널 수 없게 되는 다리는 좋겠다. 겨울 강은 좋겠다. 그런 폭설의 평원을 내려다보는 먼 우주의 별들은 좋겠다. 즐거운 도시를 지난 즐거운 사람은 눈보라 속에 있겠다. 어깨를 움츠린 채 평원을 바라보고 있겠다. 무너져버린 지붕들을 보겠다. 건널 수 없는 다리 앞에 있겠다. 가슴까지 눈 속에 묻혀 있겠다. 하늘은 더 어둡고, 눈은 펑펑 내리고, 반짝이던 도시의 불빛도 눈보라에 지워지고, 지나온 길마저 어둠 속에 묻히고, 먼 우주의 별들도 눈보라에 묻히고. 즐거운 사람은 점점 더 눈 속에 빠지고 가슴까지 빠지고 어.. 2018. 9. 28.
「내 앞의 상자, 눈이 큰 상자」 내 앞의 상자, 눈이 큰 상자 박상순 며칠 동안 치우지 않고 창가에 놓아둔 상자. 오늘 문득 상자를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는다. 상자에서 오늘은 복숭아 향기가 난다. 창문을 연다. 창문을 닫는다. 상자에서 여전히 복숭아 향기가 난다. 아무것도 없는 상자. 그 안에 무엇인가 넣어두려고 했던 상자. 아직도 이 상자 안에 넣을 것은 생겨나지 않았다가 오늘, 내가 무심히 한번 들었다가 놓았는데, 상자에서 복숭아 향기가 난다. 상자의 두 볼이 발갛다. 나는 슬그머니 밖으로 나온다. 내 손에 복숭아 향기가 남아 있다. 오늘은 내가 죽어 복숭아 향기가 나는 허공에 떠 있는 걸까. 내 어깨에서도 가슴에서도 복숭아 향기가 난다.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다시 들어간다. 상자의 두 볼이 여전히 발갛다. 여전히 복숭아 향기가 .. 2018. 9. 11.
박상순(시집) 《Love Adagio》 《Love Adagio》 박상순 시집 민음사 2005(1판2쇄) "Love Adagio"는 한 편의 소설 같았습니다. 이 '소설'을 세상에 책이라고는 교과서밖에 없었던 시절의 아이들이 여름, 겨울에만 만날 수 있었던 그 얄팍한 방학책처럼 읽었습니다. 그러니까 한꺼번에 많이 읽지는 말고 조금씩 조금씩 읽었고, 더 읽고 싶으면 이미 읽은 시를 다시 읽었습니다. 자칫하면 이런 시도 '난해한 시' 취급을 하기 쉬울 것 같았습니다. 얼마 전에 이 시인의 시 「너 혼자」를 여기에 옮겨놓았더니 어느 불친이 아래와 같은 글을 써주셨습니다. ☞「너 혼자」 http://blog.daum.net/blueletter01/7639237 저는 요즘 시인들의 작품을 대할 때마다 난해한 방정식을 푸는 마음입니다. 소개하신 시도 그러.. 2018. 9. 4.
박상순 「너 혼자」 너 혼자 박 상 순 1. 너 혼자 올 수 있겠니 2. 너 혼자 올라올 수 있겠니 3. 너 혼자 여기까지 올 수 있겠니 안개가 자욱한데. 내 모습을 볼 수 있겠니. 하지만 다행이구나 오랜 가뭄 끝에 강물이 말라 건너기는 쉽겠구나. 발밑을 조심하렴. 밤새 쌓인 적막이 네 옷자락을 잡을지도 모르니 조심해서 건너렴. 나는 삼십 센티미터의 눈금을 들고, 또 나는 사십 센티미터의 눈금을 들고, 또 나는 줄자를 들고 홀로 오는 너를 기다리고 있단다. 1. 너 혼자 말해볼 수 있겠니 2. 너 혼자 만져볼 수 있겠니 3. 너 혼자 돌아갈 수 있겠니 바스락 바스락, 안개 속에 네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들리는구나. 네가 네 청춘을 밟고 오는 소리가 들리는구나. 하지만 기운을 내렴. 한때 네가 두들기던 실로폰 소리를 기억하렴.. 2018. 7. 31.
박상순 「내 봄날은 고독하겠음」 내 봄날은 고독하겠음 박 상 순 의정부에 갔었음. 잘못 알았음. 그곳은 병원인데 봄날인 줄 알았음. 그래도 혹시나 둘러만 볼까, 생각했는데, 아뿔싸 고독의 아버지가 있었음. 나를 불렀음. 환자용 침상 아래 거지 같은 의자에 앉고 말았음. 괜찮지요. 괜찮지. 온 김에 네 집이나 보고 가렴. 바쁜데요. 바빠요, 봐서 뭐해요. 그래도 나 죽으면 알려줄 수 없으니, 여기저기, 여기니, 찾아가보렴. 옥상에 올라가서 밤하늘만 쳐다봤음. 별도 달도 없었음. 곧바로 내려와서 도망쳐 왔음. 도망치다 길 잃었음. 두어 바퀴 더 돌았음. 가로등만 휑하니 내 마음 썰렁했음. 마침내 나 죽으면 알려줄 수 없는 집, 여기저기 맴돌다가 빠져나왔음. 의정부에 다시 갔음. 제대로 갔음. 길바닥에 서 있었음. 내 봄날이 달려왔음. 한때.. 2016. 4. 7.
"너 혼자 갈 수 있겠니?" 성복초등학교 학부모님께 드리는 파란편지 "너 혼자 갈 수 있겠니?" 시詩 한편 소개합니다. 왠지 조금 쓸쓸한 것 같지만 그 쓸쓸함을 보여드리고 싶은 건 아니고 '너 혼자'라는 낱말의 이미지가 간절하여 보여드리고 싶어졌습니다. 1, 2, 3 번호가 붙는 시는 흔하지 않지만 몇 번 보면 이상할 것 없게 됩니다. 너 혼자 - 박상순(1961∼ ) 1. 너 혼자 올 수 있겠니 2. 너 혼자 올라올 수 있겠니 3. 너 혼자 여기까지 올 수 있겠니 안개가 자욱한데, 내 모습을 볼 수 있겠니. 하지만 다행이구나, 오랜 가뭄 끝에 강물이 말라 건너기는 쉽겠구나. 발 밑을 조심하렴. 밤새 쌓인 적막이 네 옷자락을 잡을지도 모르니 조심해서 건너렴 (중략) 1. 너 혼자 내려갈 수 있겠니 2. 너 혼자 눈물 닦을 수 있겠니.. 2007. 8.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