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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꾀꼬리도 지우고, 진달래도 지우고」
꾀꼬리도 지우고, 진달래도 지우고 박상순 그의 걸음은 빠르고 내 걸음은 무겁다. 자루 같은 가방 두 개를 멘 그의 걸음은 빠르다. 나는 조금 힘을 내서 그의 걸음을 따라잡는다. 그의 가방 하나를 내 어깨에 걸친다. 그의 걸음은 여전히 빠르다. 다시 그의 걸음을 쫓아가서 나머지 가방도 내 어깨에 걸쳐놓는다. 내 걸음은 무겁다. 손에 들거나, 어깨에 둘러메거나, 등에 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무겁다. 매일 무거워져서, 이것 하나 없애고, 저것 하나 없애고 빈 손에, 텅 빈 얼굴로 기억도 덜어내고, 추억도 덜어내고, 슬픈 꾀꼬리도 지우고 웃음 짓던 진달래도 지우고, 외톨이 쇠붙이는 파묻고, 나만의 별똥별, 나만의 새벽별도 버리고, 현재는 톡톡 털어서 햇볕에 말리고, 바삭하게 말리고, 어쩌면 무척 가벼울지도..
2021. 10. 25.
「첫눈이 오시네요, 글쎄」
첫눈이 오시네요, 글쎄 박상순 노래하는 아이를 낳는 이른 아침 나뭇잎, 한낮의 붉은 잎, 저녁 담장, 밤 계단, 어둠의 손잡이, 그런 사람들을 품은 기계를 뜯어냈다. 아침 나뭇잎은 내 피부를 벗겼고, 한낮의 붉은 잎은 제 머리 위에 나를 거꾸로 올려놓았고, 저녁의 담장은 물속에 나를 빠뜨렸고, 밤의 계단은 내 발목을 잡았고, 어둠의 손잡이는 울었다. 쭈그리고 앉아 나는, 물방을, 무지개, 구름 귀신, 달 귀신, 웃음 귀신, 아기 귀신, 뿔뿔이 흩어지며, 물방울, 무지개......를 노래하는 아이들을 낳는 기계를 뜯어냈다. 밑판을 뜯어냈다. 이른 아침 나뭇잎이었던, 한낮의 붉은 잎이었던, 저녁 담장이었던, 밤 계단이었던, 어둠의 손잡이였던 기계. 나 또한, 아침 나뭇잎의 피부를 벗겼고, 내 머리 위에 한낮..
2021. 1. 4.
박상순 「그녀의 외로운 엉덩이」
하얀 석판 하나가 트라클의 시를 품고 벽에 붙어 있었다. 「미라벨의 음악Musik im Mirabell」이다. 마지막 연은 다음과 같다. 하얀 이방인 하나가 집으로 들어선다. 개 한 마리가 낡은 복도를 내달린다. 하녀는 등불을 끄고, 귀는 밤에 소나타 음악을 듣는다. (…) 내 앞의 그녀1는 온통 흰색이었다. 따뜻한 흰색, 동그렇게 흰색, 요동치는 바다를 건너온 나의 울트라마린보다 반 뼘쯤 키가 큰 흰색, 그런데…… 더 이상 나는 그녀의 얼굴, 그녀의 목소리, 그녀의 눈빛, 그녀의 손가락 하나도 그리지 못한다. 말로도, 글로도, 그림으로도 옮기지 못한다. 그렇지만 나는 인스부르크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리고 이별했다. 이탈리아에서 알프스를 넘어 찰츠부르크, 인스부르크로 들어갔던 20년도 훨씬 지난 오래전의..
2020. 2.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