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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박상순 「레몬 릴리」

by 답설재 2024. 2. 7.

레몬 릴리

 

 

박상순

 

 

지난여름의 카페는 문을 닫았다. 나는 겨울 속으로 들어갔다. 겨울 속을 걷는다. 고원에는 꽃이 피어 있다. 들어설 때는 겨울이었는데, 겨울비가 내렸는데, 어느새 나는 고원에 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풀밭뿐이다. 하늘만 보인다. 풀빛이 고원을 감싼다. 햇빛은 따가운데 바람은 제법 차갑다. 바람이 차가워서 돋아난 풀들은 낮게 드러누워 있다.

 

고원이라고 해야 할까. 초원이라고 해야 할까. 높은 산자락에는 비스듬히 풀빛만 가득하다. 멀리 보이는 희미한 세상은 까마득한 아래쪽에 있다. 이렇게 넓으니 초원이라고 해야 할까. 이렇게 높으니 고원이라고 해야 할까. 이렇게 먼 곳이니 세상의 바깥이라고 해야 할까. 가을 강을 건너서 겨울 속으로 왔는데, 꽃 피는 초원이다. 풀빛 사이로 군데군데 노란 꽃들이 조그맣게 피어 있다.

 

봄의 카페에서 노란 꽃잎이 말했다. "병원에 갔다 왔어요. 꽃이 지는 병원이에요" 나는 진한 커피를 마셨다. 꽃잎은 창가를 비추는 햇빛을 마셨다. 봄의 사거리를 왼쪽으로 돌아서 첫 번째 버스가 지나갔다. 여름 정류장에서 나는 꽃잎을 기다렸다. 다음번 버스에서 노란 꽃잎이 내렸다. 버스가 닿자마자 제일 먼저 내렸다. 그날 여름의 카페에서 노란 꽃잎이 말했다. "병원에 갈 거예요. 꽃 피는 병원이에요" 한 잎, 메마른 나뭇잎이 내 커피잔 옆으로 떨어졌다. 노란 꽃잎이 손가락을 펼쳐서, 내 눈에서 떨어진 나뭇잎을 걷어내 주었다.

 

고원은 여름이다. 노란 꽃이 피었다. 군데군데 피었지만, 초원이 너무 넓어서 아주 많이 피어 있다. 너무 많이 피어 있다. 나는 고원의 길 위에 있다.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는 길은 비탈을 휘감고 먼 세상으로 이어진다. 이곳의 노란 꽃은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쪽에서 왔을까, 저쪽에서 왔을까. 길이 이어지는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데 "여기예요" 앞자리에서 말한다. 겨울 골목에 자동차가 멈췄다. 나는 뒷자리의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겨울 골목엔 소리가 없다. 먼저 내린 두 사람이 내게 눈짓한다. 나는 뒤따른다. 소리 없는 골목을 지난다. 두 사람은 느릿느릿 걷는데 저만치 앞에 간다. 나는 서둘러 따라간다. 그래도 그들은 멀리 앞서 나간다. 골목 끝에서 두 사람이 오른쪽 식당으로 들어간다. 소리 없는 사람들이 지나간다. 마침내 나는 그들이 들어간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두리번거리는 사이, 앞섰던 두 사람이 위층 계단에서 내려왔다. 나를 향해 가볍게 웃었다. "다음 주에도 볼까요?"

 

여름의 정류장에서 나는 꽃잎을 생각했다. 가을 정류장을 지날 때도 나는 꽃잎을 생각했다. 지난여름, 카페에서 나왔을 때 노란 꽃잎이 내 옷자락을 잡고 말했다. "이제 병원에는 안 가요" 그리고 머뭇거렸다. "하지만…… 좋은 일은 아닐 거예요" 그리고 겨울이 왔다. 겨울의 시간은 반나절쯤 빨리 지나갔다. 아침이었는데 저녁이 되었다. 저녁이었는데 새벽이 되었다. 점심에, 노란 꽃잎이 부끄러운 얼굴로 내게 말했다. 저녁에, 노란 꽃잎이 환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나는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나는 겨울 속을 걷는다. 어느새 나의 겨울은 초원에 있다. 지난여름의 카페에서 "저기, 저곳은 십 년 전에도, 그전에도 있었어요. 그대로예요" 노란 꽃잎이 말했다. "천만번 여름이 오면, 함께 갈 거예요. 초원에" 그날 꽃잎의 무릎 위로 천만번 여름이 왔다. 천만번의 여름이 내 겨울 강을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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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순  1991년 『작가세계』 등단. 시집 『6은 나무 7은 돌고래』『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Love Adagio』『슬픈 감자 200그램』『밤이, 밤이, 밤이』 등. 〈현대문학상〉〈현대시작품상〉〈미당문학상〉 등 수상.

 

 

 

 

 

 

 

박상순 시인의 시를 읽으면 누구에겐가 보여주고 싶다.

"천만번의 여름이 내 겨울 강을 건넜다"는 시가 있다고 알려주고 싶다.

이 자리에서 읽어보라고 하고 싶다.

읽기를 기다려 어떤 이야기가 떠올랐는지 물어보고 싶다.

시를 읽은 그 마음에 어떤 물결이 일고 있는지 좀 보여주거나 이야기해 달라고 하고 싶다.

그렇게 하고는, 나는 이 시인이 그리는 세상이 한 편의 영화처럼 떠올라서 하고 싶은 얘기가 많다고, 만약 시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내가 그 얘기를 해주고 싶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박상순 시인에게는 이런 '이야기(혹은 영화)'가 많다.

그가 이런 '이야기(혹은 영화)'를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또 다른 '이야기(혹은 영화)'를 제작 중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기대가 된다.

우리는 우선 이 '영화(이야기)'를 감상하면서 그 '영화(이야기)'를 기다리자고 하고 싶다.

 

(『현대문학』2024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