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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박상순(시집) 《Love Adagio》

by 답설재 2018. 9. 4.

《Love Adagio》 박상순 시집

  민음사 2005

 

 

 

 

 

 

"Love Adagio"는 한 편의 소설 같았습니다.

이 '소설'을 세상에 책이라고는 교과서밖에 없었던 시절의 아이들이 여름, 겨울에만 만날 수 있었던 그 얄팍한 방학책처럼 읽었습니다.

그러니까 한꺼번에 많이 읽지는 말고 조금씩 조금씩 읽었고, 더 읽고 싶으면 이미 읽은 시를 다시 읽었습니다.

 

자칫하면 이런 시도 '난해한 시' 취급을 하기 쉬울 것 같았습니다.

얼마 전에 이 시인의 시 「너 혼자」를 여기에 옮겨놓았더니 어느 불친이 아래와 같은 글을 써주셨습니다.

 

  ☞「너 혼자」 http://blog.daum.net/blueletter01/7639237 

 

저는 요즘 시인들의 작품을 대할 때마다 난해한 방정식을 푸는 마음입니다.
소개하신 시도 그러해서 시인의 작품만으로는 의미가 전해져 오지 않았는데
선생님 글을 읽으니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선입관이란 게 이렇게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써주신 그 작가에게 마음을 다하여 고마워했습니다. '이게 내가 고마워할 일인가?' 싶기도 했지만 시를 쓰진 못해도 읽으려고 애쓴 그동안의 제 노력을 그분이 인정해준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박상순 시인의 시를 읽게 된 것을 참으로 즐거워합니다.

그 시인의 시집 중에서 『6은 나무 7은 돌고래』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은 본 적이 없어서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건 또 기다려봐야 할 일입니다.

이 시집 "Love Adagio" 표지 안쪽에는 섬세한 표정의 시인 사진과 프로필이 붙어 있었는데 야금야금 시를 읽으며 자주 그 사진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의사 K와 함께1

 

 

의사 K의 옷장에서 놀이공원 지도를

발견했습니다.

의사 K는 나의 오랜 친구이지만

놀이공원에는 가지 않습니다.

 

의사 K는 지금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긴급한 전화를 받고

잠시 자리를 비웠습니다.

 

그가 서둘러 옷을 입고 나간 뒤

나는 의사 K의 열린 옷장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K의 옷장에서 놀이공원 지도를

발견했습니다.

내 오랜 친구인 의사 K는

놀이공원에는 가지 않습니다.

 

전에도 의사 K는

어떤 긴급한 전화를 받고

오늘처럼 밖으로 나갔습니다.

K는 훌륭한 의사입니다.

 

그때도 나는 K의 옷장에서

놀이공원 지도를 보았습니다.

 

롤러코스터, 휴게소, 작은 광장, 매표소,

분수, 징검다리, 유령의 집, 전망대

 

지도에는 정확한 위치

조목조목 일러주는 설명문이 있었고

심지어는 이곳에서

그곳으로 가는 길

 

잘못 들면 빠져나와

다시 쉽게 가는 길도 적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의사 K는 물론

나 역시

놀이공원에는 절대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또

의사 K의 옷장에서

새로 바뀐 놀이공원 지도를

발견했습니다.

 

의사 K는 나의 오랜 친구입니다.

내가 그를 찾아가면 꼭

긴급한 전화가 옵니다.

K는 참 바쁜 의사입니다.

 

그가 나가면

옷장 문이 또 이렇게

열려 있게 됩니다.

 

놀이공원 지도 속엔 걷는 사람, 뛰는 사람

쉬는 사람, 누운 사람, 의사 K와 같은 사람

하나 없지만

나는 또 할 수 없이

이런저런 사람들을 생각하며

지도를 보며

의사 K를 기다립니다.

 

K를 기다리며 나는 옷장에서 떨어진

놀이공원 지도를 보고 있지만

의사 K는 놀이공원에는 가지 않습니다.

나 또한 가지 않습니다.

 

의사 K는 지금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긴급한 전화를 받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나는 지도를 보며 K를 기다립니다.

의사 K는 나의 오랜 친구입니다.

놀이공원에는 절대로 가지 않을 겁니다.

 

 

얼마나 재미있는지, 나는 이 이야기를 몇 번째 읽으며 한 번 본 영화를 또 보는 것 같은―재미가 없으면 또 볼 리가 없겠지요― 재미를 느꼈습니다.

 

 

 

철근 한 묶음2

 

 

놀이터 반쪽을 가로막고 천막이 섰다. 철근을 실은 트럭이 왔다. 한 사람이 내렸다. 철근 한 묶음이 짐칸 옆으로 비스듬히 내려질 동안, 천막에서 두 사람이 나왔다. 기다른 철근 묶음을 어깨에 멨다. 앞에 선 사람은 천막 쪽으로, 뒤에 선 사람은 반대쪽으로 어깨 위에 철근을 올렸다. 두 사람의 어깨에 대각선으로 길게 얹힌 철근 묶음이 출렁거렸다.

 

꽃밭을 돌면서 앞사람이 주춤댔다. 철근은 더 크게 출렁거렸다. 뒷사람은 정지했다. 대수롭지 않은 듯 앞사람이 다시 꽃밭의 모퉁이를 돌았다. 그동안 뒷사람은 옆으로 조금씩 꽃게처럼 움직였다. 다시 두 사람이 똑바로 나아갔다. 천막 옆 빈 자리에 철근을 내렸다. 두 사람은 다시 꽃밭을 돌아 트럭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트력에서 내렸던 첫째 사람은 여전히, 나머지 한 묶음을 비스듬히 세우고 철근처럼 트럭 옆에 멈춰 서 있었다.

 

그때 나는 15층 아파트의 10층 베란다에 서서 손가락 끝에 담배를 끼운 채 좌우로 출렁이고 있었다. 내 손가락 끝에서 보글거리는 게들이 빠져나갔고, 손톱 밑으로 조개들이 몰려왔고, 갯벌이 조금씩 짧아지기 시작했고, 십 미터도 안 되는 리아스식 해안의 짧은 모래밭도 물속에 가라앉아 버렸다. 자욱한 물안개가 내 허리를 감았다. 10층 아래, 바다 속의 놀이터 꽃밭 옆엔 트럭이, 햇볕에 달구어진 마지막 철근 한 묶음을 내리며 오랫동안 정지되어 있었다.

 

「철근 한 묶음」은 그림 같았습니다. 그림처럼 아릅답더라는 얘기가 아니라(아름답다고 해도 전혀 문제가 없긴 하겠지만) 그림을 들여다보는 느낌으로 읽었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정말로 이 시인이 작정하고 쓴 시 두 편을 옮겼습니다.

나는 이런 시를 읽을 때는 딴생각은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그냥 시인이 이야기해주는 대로 따라가기만 합니다. 이런 시를 읽으며 뭐 하려고 딴생각을 하겠나 싶기 때문입니다.

 

 

 

자유의 여신3

 

 

경기도에서 버스를 타면 조심하세요. 영국으로 갈지도 몰라요. 히드로 공항에 도착할지도 몰라요. 검은 모자를 쓴 흑인 아저씨가 당신을 내려다보며 숙소가 어디냐고, 왜 왔느냐고, 주소를 말해 보라고 다그칠지도 몰라요.

 

조심하세요. 경기도에서 버스를 타면 낙타 시장으로 갈지도 몰라요. 나는 가방도 없고 물병도 없고 빛을 가릴 안경도 두고 왔는데 사막을 가로질러 낙타를 타고 가야 한대요. 그럴지도 몰라요.

 

버스를 타면 조심하세요. 검은 모자를 쓴 타조가 운전을 하고 검은 안경을 쓴 물개가 내 옆에 앉아 더 큰 세상, 더 큰 세계, 이런 곳에 대해 물어볼지도 몰라요. 어디서 왔느냐고, 어디로 가느냐고, 당신 목에 칼을 대고 물어볼지도 몰라요.

 

조심하세요. 나와 함께 경기도에서 버스를 타면. 세상의 끝에 내릴지도 몰라요. 나와 함께 내릴지도 몰라요. 물어도 대답 없는 남쪽 끝에 처박힐지도 몰라요. 한 걸음만 더 디디면 떠나왔던 그 자리가 사라질지도 몰라요.

 

경기도에서 버스를 타면 조심하세요. 서울 가는 길, 안양 가는 길. 영국으로 가는 길, 고원으로 가는 길, 케이프타운으로 가는 길. 당신이 내게 비둘기와 화살과 조개에 관해 묻는다면 나는, 숨이 멎을지도 몰라요. 지구는 둥글지 않으니까 조심하세요. 우산은 꼭 챙겨가세요.

 

 

'자유의 여신'

경기도에서 버스를 타면 온갖 일이 다 벌어진다는데, 경기도에서 살며 수없이 버스를 탔지만 이 시인이 얘기한 일은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이 시를 읽으며 생각하는 일만으로도 나는 좋았습니다.

시를 읽으며 들어간 꿈을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생각만 해도 즐겁고, 하필 경기도 버스를 이야기한 시인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침묵의 뿌리4

 

 

토로(吐露). 사흘째 이어지는 빗속으로 손을 잡고 간다. 버스를 타고, 작은 배를 타고 손을 잡고 간다. 첫 번째 사건이 벌어진다. 아침부터 단테는 신곡을 쓰기 시작한다. 마키아벨리는 피신 중에 있다. 사건은 진실의 문을 열기 시작한다. 젊은 여자들이 길을 떠난다. 그중 몇몇은 사랑을 좇아 새 집을 짓고 그중 몇몇은 또 길을 떠난다. 그런 여자들 중 하나가 밤 열한 시에 외출을 한다. 지상의 모든 아이들은 나와 함께 잠들어 있다. 꿈을 꾸는 중이다. 심야의 옷가게에서 여자는 속옷을 고른다. 코코슈카와 키르히너의 그림이 찍힌 이상한 속옷을 고른다.

두 번째 사건이 벌어진다. 아직 풋내기인 비디오 아티스트 하나가 오토 뮐러의 그림이 찍힌 포스터 앞을 지난다. 포스트 속의 그림은 집시 커플. 늘어진 젖가슴의 집시 처녀가 그림의 한가운데서 살구빛 젖꼭지를 들이민다. 풋내기 아티스트는 살구빛 그것을 보지 못한다. 네 번째 사건은 숲에서 일어난다. (세 번째 사건은 사라졌다.) 칠월, 파워플랜트의 높다란 굴뚝에서 내려온 반쯤 늙은 사내가 숲에서 자전거를 발견한다. 녹슨 자전거. 대수롭지 않은 듯 사내는 잡목 숲을 떠난다. 그때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숲으로 들어간다. 이틀 후 굴뚝에서 내려온 사내는 경찰서로 불려가 조사를 받는다.

칠월이 가고 팔월이 온다. 여름이 두 다리를 벌리고 굴뚝 위에 올라앉는다. 지상의 모든 아이들은 나와 함께 잠들어 있다. 신곡을 집필하던 단테가 슬며시 내 꿈속으로 들어온다. 속옷을 고르던 젊은 여자가 살구빛 집시 처녀의 손을 잡고 비행기 안으로 들어온다. 녹슨 자전거를 탄 경찰관이 한 무리의 청년들과 함께 터널 속으로 들어온다. 굴뚝에서 내려왔던 그 사내는 빈 명을 들고 단테 옆에 서 있다.

토로(吐露). 사흘째 이어지는 빗속으로 나는 손을 잡고 간다. 작은 배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도 손을 잡고 간다. 고독한 내 상상의 산맥 아래에서 가면을 쓴 알레산드로 디 마리아노 필리페피 보티첼리가 그가 죽고도 몇백 년이 지나 아시아에서 쓰인 한 젊은 시인의 시구를 낭송한다. ―네가 떠날 때 바다는 그가 품었던 모든 물고기들을 수면 위로 밀어냈다5―떠오르던 물고기들의 소음(騷音). 그러나 사람들은, 속옷 꾸러미를 든 여자들은 이 터무니없는 소음 뒤에서 이 우주를 이루고 있는 정적을 식별해 낸다. 잠든 아이들이 웅얼거린다. 수없이 많은 물방울들이 꿈속에서 터진다. 그러나 하나의 기둥인 나는, 내 침묵의 실뿌리들을 잘라내지 못한다. 식별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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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92~93.

2. http://blog.daum.net/_blog/92~93.
3. 82~83.

4. 94~96.

5. 시인의 시 피날레 Finale의 1연(3행 ; 내가 떠날 때 / 바다는 그가 품었던 모든 물고기들을 /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하였다//(이 시집 132~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