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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내 앞의 상자, 눈이 큰 상자」

by 답설재 2018. 9. 11.

내 앞의 상자, 눈이 큰 상자

 

 

박상순

 

 

  며칠 동안 치우지 않고 창가에 놓아둔 상자. 오늘 문득 상자를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는다. 상자에서 오늘은 복숭아 향기가 난다. 창문을 연다. 창문을 닫는다. 상자에서 여전히 복숭아 향기가 난다. 아무것도 없는 상자. 그 안에 무엇인가 넣어두려고 했던 상자. 아직도 이 상자 안에 넣을 것은 생겨나지 않았다가 오늘, 내가 무심히 한번 들었다가 놓았는데, 상자에서 복숭아 향기가 난다.

  상자의 두 볼이 발갛다. 나는 슬그머니 밖으로 나온다. 내 손에 복숭아 향기가 남아 있다. 오늘은 내가 죽어 복숭아 향기가 나는 허공에 떠 있는 걸까. 내 어깨에서도 가슴에서도 복숭아 향기가 난다.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다시 들어간다. 상자의 두 볼이 여전히 발갛다. 여전히 복숭아 향기가 난다. 내가 정말 죽었는지, 살았는지 상자에게 물어볼까? 복숭아 향기가 나는 상자, 두 볼이 빨개진 상자. 아무것도 아닌 상자, 두 눈이 몹시 커다른 상자, 변신을 멈추지 않는 상자, 내 앞의 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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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순 1962년 서울 출생. 1991년 『작가세계』 등단. 시집 『6은 나무 7은 돌고래』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 『Love Adagio』 『슬픈 감자 200그램』. <현대문학상> <현대시작품상> 등 수상.

 

 

『現代文學』 2017년 7월호 109, 129쪽.

 

 

 

 

 

 

 

  시인이 상자를 들었다가 놓고, 창문을 열었다가 닫고, 다시 상자를 바라보다가 나왔습니다.

  그 '동영상'이 꿈결같습니다.

  문득 시인을 따라다니고 싶어졌습니다. 시인은 성가시다 하고 모두들 주책이라고 하겠지만……

 

 

  나는 시를 쓴다. 나의 언어는 밤새, 홀로, 길을 건너서, 어디선가에서 내가 가져온 것들이기도 하다. 시적 대상을 포착하는 나의 시선은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현실 대상을 바라보는 화가의 눈일 수도 있다. 아마도 '화가의 눈'을 가졌기에 시적 대상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은 관념적인 것보다는 사실적인 것을 더 강하게 포착할 것이다. 동시에 대상이나 환경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화가의 눈을 통해 본다면, 중심과 외곽, 텅 빈 것과 꽉 찬 것, 가까운 것과 먼 것 등등의 화면 구성, 대조와 대비의 관계를 순간적으로 포착하는 남다른 기능이 드러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소박한 그림으로 옮기지는 않는다. 그림으로서의 표현일 경우에는 표현하는 공간 위에서, 그림 그리기에 관한 또 다른 관점이 더해져야 한다. 이것은 예술작품을 구성하는 행위를 통해 표현 대상으로의 기억이나 현실과는 일치하지 않는, 다른 차원의 사실적 형상이나, 추상적 형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특히, 언어는 물질성을 바탕으로 하는 미술과는 달리 개념이나 기호를 통해 현실을 재현하거나 확장하는 매체다. 그리고 다른 예술작품처럼 시적 언어는 그것 스스로 의미를 만든다.

  내가 '화가의 눈'을 가진 것은 맞지만, 시인으로서의 나는, 화가의 도구를 손에서 내려놓고, '시인의 언어'라는 미디어를 운용한다. 나의 시는, 사실적이거나 구체적인 사건이나 행위를 다루기도 하고, 시적 대상으로 보이는 본래의 어떤 현실을 예술적 표현의 관점에서 다른 차원으로 전환하기도 한다. 시적 표현으로 다루어지는 현실의 사건이나 대상들은 이미 한 편의 시를 향해 첫 마디를 쓰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원래의 그것과는 결별한다. 현실이나 기억은 하나의 동기(모티프)로서 작용하지만, 시적 대상들의 과거를 다시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시적으로 표현된 사건과 행위 또는 대상들은 온전히 '시'의 내부에서 새로 탄생한다. 그것은 '시 쓰기'라는 표현 행위의 본질이며, 대상과 생각을 지우면서 대상과 생각과 느낌이 다시 태어나는 과정이다.

 

    박상순 '그의 카페―시인이 되고 싶었던 나를 이곳에 남겨놓고'(에세이, 『현대문학』 2017년 7월호, 118~129)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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