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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박상순(시집) 《슬픈 감자 200그램》

by 답설재 2018. 9. 28.

박상순 시집 《슬픈 감자 200그램》

난다 2017

 

 

 

 

 

 

 

즐거운 사람에게 겨울이 오면

 

 

즐거운 사람에게 겨울이 오면

눈보라는 좋겠다.

폭설에 무너져내릴 듯

눈 속에 가라앉은 지붕들은 좋겠다.

 

폭설에 막혀

건널 수 없게 되는 다리는 좋겠다.

겨울 강은 좋겠다.

그런 폭설의 평원을 내려다보는

먼 우주의 별들은 좋겠다.

 

즐거운 도시를 지난 즐거운 사람은

눈보라 속에 있겠다.

어깨를 움츠린 채 평원을 바라보고 있겠다.

무너져버린 지붕들을 보겠다.

건널 수 없는 다리 앞에 있겠다.

가슴까지 눈 속에 묻혀 있겠다.

 

하늘은 더 어둡고, 눈은 펑펑 내리고,

반짝이던 도시의 불빛도 눈보라에

지워지고, 지나온 길마저 어둠 속에 묻히고,

먼 우주의 별들도

눈보라에

묻히고.

 

즐거운 사람은 점점 더 눈 속에 빠지고

가슴까지 빠지고

어깨까지, 머리까지 빠지고.

 

아주 먼 우주의 겨울 별들은 좋겠다.

밤은 좋겠다.

점점 더 눈 속에 파묻히는 즐거운 사람을 가진

폭설의 겨울은 좋겠다.

 

파묻힌 사람을 가진 겨울은 좋겠다.

파묻힌 사람을 가질 수 있는 겨울은 좋겠다.

 

얼어붙은 겨울 강은 좋겠다.

폭설에 묻혀, 그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건널 수 없는 다리는 좋겠다.

 

즐거운 사람에게 겨울이 오면

눈 덮인, 막막한,

추운, 그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안타까운, 밤새도록 바람만이 붕붕대는, 간절한,

눈 속에 다 묻혀버린,

저 먼 우주까지, 소리 없는,

겨울이 오면.

 

 

이 분위기에 뭐라고 하는 건 부질없을 것입니다.

다른 생각 하지 않고 긴 소설 한 편을 읽는 한밤이 떠오릅니다.

어서 겨울이 오고 싸늘해지고 눈이 까짓 것 엄청 내려버리면 좋겠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집을 나서야 할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나 하다가 그건 그때 가서 보자고 생각합니다.

이 시를 읽고 싶을 때가 오지 않으면 나는 정말 한심할 것입니다.

 

 

 

요괴들의 점심 식사

 

 

볼록한 요괴와 넓적한 요괴, 가마솥 해장국집에서 해장국을 주문한다. 따로따로 해장국을 먹던 시커먼 요괴 둘이 뒤를 돌아본다. 볼록한 요괴도 못 본 척. 넓적한 요괴도 못 본 척한다. 오후 3시, 늦은 점심 식사. 나는 해장국을 먹는다.

 

볼록한 요괴와 넓적한 요괴. 시커먼 요괴, 더 시커먼 요괴, 요괴들은 삭았다. 주방에 있는 조금 튼튼해 보이는 요괴와, 해장국을 나르는 아직 새것처럼 보이는 요괴도 이미 다 낡았다. 내 얼굴도 삭았다.

 

서로 모른 척하려는 요괴, 그래도 마주치는 요괴, 여전히 모른 척하는 요괴, 플라스틱 폐품 같은 요괴, 엉덩이도, 얼굴도 폐품이 되어버린 요괴, 가슴에 큰 구멍이 난, 너덜너덜한 요괴. 오후 3시의 늦은 점심 식사. 너덜너덜, 해장국을 먹는다.

 

 

시가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다니!

이 시에 나타나는 장면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오르지만 그 장면을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시를 읽어보면 다 알 수 있는데 내가 뭐 하려고 이야기하겠습니까?

뭐 하려고 내가 그 난처한 얘기를 해서 홀랑 뒤집어쓰겠습니까?

 

혼자서 씨익 웃으며 저 요괴들을 바라보기만 합니다. "볼록한 요괴와 넓적한 요괴. 시커먼 요괴, 더 시커먼 요괴", 삭은 요괴들. "주방에 있는 조금 튼튼해 보이는 요괴", "해장국을 나르는 아직 새것처럼 보이는" 그렇지만 그나마 이미 다 낡아빠진 요괴, 그 요괴들과 함께 앉아 있는, 삭아버린 내 얼굴, "서로 모른 척하려는 요괴, 그래도 마주치는 요괴, 여전히 모른 척하는 요괴, 플라스틱 폐품 같은 요괴, 엉덩이도, 얼굴도 폐품이 되어버린 요괴, 가슴에 큰 구멍이 난, 너덜너덜한 요괴."

 

요괴들이 난무하는데도 즐겁습니다. 미소라도 짓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 히히!!!^^

왠지 속이 후련합니다.

 

 

 

내가 그린 기린 그림

 

 

내가 그린 기린 그림은 바닷가를 달리는 기린 그림.

세 시간 또는 네 시간씩 걷기만 하는 기린을 그린 그림.

기린 밖에 없는 기린 그림.

그래도 오랫동안, 매일매일 그린 내 기린 그림.

어쩌다가 다시 보면 비행접시처럼 떠 있는 기린 그림.

때로는 나를 향해 불화살을 쏘아대던 기린 그림.

꿈속의 달나라에서도 그린 내 기린 그림.

뉴욕이나 런던의 호텔방에서도 그린 그림.

하노이에서도, 인스부르크에서도, 풀밭에서도,

벌판에서도 그린, 섬에서도 그린 그림,

기린이 무서워서 그린 기린 그림, 언젠가 만나게 될

죽은 기린이 무서워서 그린 비행접시 같은 기린 그림.

달빛으로도 찍은 기린 그림, 메조틴트로 찍은 기린 그림,

리도그래프로 찍은, 사진기로도 찍은 흑백의

기린 그림, 손바닥으로도 찍은, 이마로도 찧은

온통 붉은 기린 그림, 그 위에 다시 몇 년을 반복해서 칠한

찬란하게 빛나는 기린 그림.

전화기 저 멀리서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내가 한마디, 어떤 기린이 한마디, 평생 그 한마디로 끝난

그 기린을 그린 그림. 그 기린에게 전화를 걸어, 내게는

한마디,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 기린에게만

'내가 말했지, 내가 말했었지'라고 말하며 내게는

전화기만을 건네준, 그 기린을 그린 그림. 그 뒤로는

매일매일 바닷가를 달리는 기린 그림. 나를 생각하다가,

네 시간 또는 다섯 시간씩 걷기만 하는 기린을 그린,

한 마리의 기린을 그린, 두 마리의 기린을 그린,

세 마리의 기린을 그린 기린 그림. 하지만 오직

한 마리였던 기린 그림, 십 년을 그린 기린 그림,

이십 년을 그린 기린 그림.

 

다 그린 기린 그림.

볼 수 없는 기린 그림, 지울 수도 없는 기린 그림,

죽도록 그린 기린 그림, 내가 그린 기린 그림.

 

 

"내가 그린 기린 그림", 이 빈한한 생애도 시가 될 수 있을까.

백 페이지도 넘는 그런 책이 아닌, 딱 한 페이지만으로 좋은 자서전이 될 수 있을까.

 

이 시집을 보는 시간이 정말! 즐거웠습니다.

국보, 보물로 가득찬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한 전시실에 들어간 느낌이어서

이 시 저 시에 온통 정신이 팔려 온 종일 돌아다녔습니다.

 

어려운 시도 몇 편 있었습니다.

두 번 세 번 읽어야 할 시들인데 다른 시가 더 궁금해서 훌쩍훌쩍 넘겼습니다.

읽기 시작하자마자 재미있고, 읽기 시작하자마자 마음을 흔드는 시가 많았기 때문이지만

그래도 그렇게 하는 것이 무슨 죄를 짓는 것 같았습니다.

 

다음에 또 이 시집을 보면 어떤 시를 옮겨놓고 싶어 할지…….

「할머니들의 동그라미」?

「좀 이쁜 누나 순수 연정님」?

「죽은 말의 여름 휴가」?

「철문으로 만든 얼굴들」?

 

이 시인이 좋습니다. 정말 좋습니다.